"멈춘 고전에 숨을 불어넣다"…이이남 '재생중인 기억'전

빙하미술관 10월 25일까지

이이남, 바다가 보이는 방 (빙하미술관 제공)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시간의 궤적을 디지털 비트로 치환하는 미디어아트의 거장, 이이남의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빙하미술관은 오는 4월 18일부터 10월 25일까지 고전의 아우라와 현대 기술이 조우하는 개인전 '재생중인 기억 (온 리피트 메모리: On Repeat; Memory)'를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박제된 과거의 이미지가 동시대의 감각 안에서 어떻게 반복되고 새롭게 태어나는지에 주목한다.

이번 전시의 가장 큰 특징은 평면에 갇혀 있던 동양 고전 회화를 움직이는 영상 언어로 해체하고 재구성했다는 점이다. 전시장 입구에서 관객을 맞이하는 '기운생동 87마리 새'는 붓끝에서 태어난 생명들이 화면 밖으로 날아오르는 듯한 경험을 선사하며 전시의 포문을 연다. 이어지는 공간에서는 '고향의 봄'을 통해 달빛과 물결이 자아내는 서정성을 극대화하여 관람객을 명상적인 시간의 흐름 속으로 안내한다.

전시의 핵심부에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전통 명작들이 현대적 옷을 입고 등장한다. 겸재 정선의 필치를 사계절의 순환으로 확장한 '인왕제색도-사계'와 분단이라는 현실적 비극을 고전 산수에 투영한 '단발령망금강'은 과거의 유산이 오늘날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질문을 던진다. 또한 고양이와 나비, 호랑이 등을 다룬 영모화들이 미디어와 결합하며 시대의 경계를 허문다.

이이남, 사계-인왕제색도 Four seasons-Drawing of colors for In wang mountain (빙하미술관 제공)

전시는 단순한 시각적 관람에 그치지 않고 오감을 자극하는 몰입형 환경을 구축했다. 레이저와 안개, 거울 오브제가 LED 월과 어우러진 '미래의 산수' 구역에서 관객은 작품 속 풍경을 직접 가로지르는 주체가 된다. 이는 산수를 단순한 그림이 아닌 사유가 가능한 공간으로 인식하게 하는 장치다.

전시 후반부는 팝아트적 재치와 도시적 감수성이 돋보인다. 고전적 도상들을 현대 소비사회의 맥락으로 비튼 작업들은 일상의 감각을 환기시킨다. 특히 지하철을 모티프로 한 퇴장로는 전시라는 환상적인 시간 여행을 마치고 현실로 연착륙하는 독특한 장소적 경험을 제공한다. 부대시설인 카페까지 확장된 AI 오드리 헵번 영상은 기술이 재현한 기억의 변주를 끝까지 이어가게 한다.

반년 가까이 이어지는 이번 전시는 선형적인 시간관에서 벗어나 감각적으로 쌓이는 기억의 층위를 탐구한다. 관람객들은 끊임없이 재생되는 이미지의 파동 속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교차하는 특별한 미학적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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