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시기 국군 징병제 최초 실시 [김정한의 역사&오늘]

1952년 9월 1일

제76주년 국군의 날 서울 세종대로 일대에서 열린 시가행진에서 도보부대가 행진하고 있다. 2024.10.1/뉴스1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1952년 9월 1일, 포성과 화염이 한반도를 뒤덮던 대한민국은 전란 속에서 첫 정규 징병검사를 개시했다. 1949년 병역법 제정 이후 전쟁으로 미뤄졌던 법정 징병제가 마침내 전국적 체제로 가동된 순간이었다. 가두 징집과 임의 모병에 기대던 군은 비로소 국가 주도의 조직적인 병력 수급 체계를 갖췄다.

개전 초기 청년들의 징발은 가혹하고 혼란스러웠다. 정밀한 신체검사나 호적 대조 없이 길거리와 피란길에서 붙들려 훈련소로 향하기 일쑤였고 군번도 없이 최전선에 투입됐다.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국민방위군 사건의 비극 역시 주먹구구식 병무 행정과 통제 불능의 징발이 낳은 참담한 역사의 그림자였다.

전선이 고착되고 휴전 회담이 길어지자 지속 가능한 상비군 구축은 국가 존망을 가를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정부는 임시수도 부산을 중심으로 행정력을 수습하고 만 20세 청년들을 일제히 호명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국가가 개인에게 병역 의무를 법적으로 직접 집행한 무겁고도 불가역적인 결단이었다.

전국 각지의 징병검사장은 비장함과 비통함이 교차했다. 영양이 부실해 앙상하게 마른 청년들은 묵묵히 측정기 앞에 섰고, 아들의 등을 지켜보던 부모는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합격 도장이 찍힌 소집영장은 가족의 생계를 뒤로한 채 포연 자욱한 최전선 고지로 향해야 하는 가혹한 운명의 멍에였다.

이날 가동된 정규 징병제는 대한민국 국군을 현대적 정규군으로 탈바꿈시킨 결정적 분수령이었다. 창군기 임기응변식 인력 충원을 넘어 60만 대군을 체계적으로 육성하는 기틀을 세웠다. 그러나 동시에 개인의 자유와 삶을 국가 안보의 틀 속에 강력하게 편입시키는 징병 국가 체제의 서막이기도 했다.

포성은 멎었으나 그날 시작된 청춘의 헌신과 의무는 반세기를 훌쩍 넘어 오늘날까지 한반도의 현실로 이어진다. 조국을 위해 꽃다운 시절을 바치고 묵묵히 전선으로 걸어 들어간 청년들의 희생 위에 오늘의 평화가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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