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나가와 오케하자마의 승리 [임용한의 역사 크루즈]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편집자주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를, 경희대 대학원에서 한국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쟁과 역사' 등 많은 저서를 출간했고, 유튜브 누적 조회수 8000만이 넘는 국방TV '토크멘터리 전쟁사'에 출연했다. 현재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로 활동하며 유튜브 채널 '임용한TV'와 '인문채널휴'를 운영하고 있다. 동서양을 넘나드는 해박한 역사지식을 토대로 통찰력 있는 글을 쓰고 있다.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운명의 날

1560년 5월 19일(일본 음력, 일본 음력은 우리보다 하루가 늦다), 현재의 일본 나고야 남쪽에 위치한 오케하자마 고갯길에는 비가 주룩주룩 쏟아지고 있었다. 도토미와 스루가 지역(현재의 시즈오카현)의 다이묘인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기분이 좋기도 하고 조금 불쾌하기도 했다.

회심의 오와리 공격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자신이 이끄는 주력부대는 이 고갯길에서 하루 쉬고, 날이 개면 내일은 오와리의 중심부로 순탄하게 진격할 예정이었다. 노부나가 집안의 거성인 현재의 나고야성과 노부나가가 최근에 자리 잡은 기요스 성은 손쉽게 함락할 수 있을 것이다.

오와리를 병합하면 요시모토는 근처의 모든 가문을 압도하는 최대 영지를 확보하게 된다. 오와리 북쪽 미노국(현재의 기후시)의 사이토 도산도 제압하고, 서쪽의 교토로 진군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면 쇼군도 자신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때 어떤 관직을 달라고 할까. 즐거운 상상이었다.

오케하자마 전투 당시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본진이 자리 잡았던 것으로 알려진 고토쿠인 경내. (출처: 일본 아이치현 관광청 홈페이지)

요시모토가 있는 곳은 현재 고토쿠인(高德院)이라는 사찰이 있는 곳이었다. 언덕길을 올라 8부 능선 정도에 위치한 이곳은 고개 정상 너머는 보이지 않았지만, 고개 아래쪽의 전망은 확실하게 탁 트여 있었다. 앞으로 자신의 땅이 될 벌판을 내려다보며 즐거운 상상을 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그러나 이곳에 도착한 순간부터 갑자기 검은 구름이 몰려오더니 비가 내리면서 뿌연 연무가 전망을 가로막았다.

"뭐, 따뜻하게 데운 술이나 한잔하도록 하지." 요시모토는 체격이 크고 무예도 뛰어났지만 시와 가무, 풍류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그가 꿈꾸는 높은 자리에 어울리는 풍모와 자질, 재능을 모두 갖춘 인물이었다. 오와리의 바보, 품격 부재한 오다 노부나가는 비교 불가한 인물이었다.

요시모토가 빗속의 풍류를 즐기고 있을 때 북쪽 언덕 정상에서 벼락같은 함성이 들려왔다. 언덕 정상 부분은 2개의 길이 Y자로 교차하는 곳이었는데, 요시모토가 있는 곳과는 200여m밖에 되지 않았다. 노부나가 군대의 기습이었다. 정상부에 위치한 요시모토군과 노부나가군이 접전한 지역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요시모토의 자리에서 300m 이상 떨어진 곳은 아니었다.

요시모토의 병력은 2만 명에서 4만 명이었지만, 오케하자마에 포진한 병력은 많아야 5000명 정도였을 것이다. 그들이 한곳에 모여 있지도 않았다. 좁은 언덕길, 노부나가의 병력은 2000명 정도였지만 좁은 고개에서 그 정도 병력 차이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노부나가는 요시모토의 선두 병력에 소리 없이 접근했으며 전투가 개시되자마자 요시모토를 향해 최고의 정예 무사를 창처럼 돌격시켰다.

요시모토는 제대로 무장을 갖출 시간도 없었다. 더욱이 적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꽂히고 있었다. 200명 정도 되는 요시모토의 호위대는 온몸으로 요시모토를 감싸고, 주력이 있고 병력 우위라는 장점을 발휘할 수 있는 아래쪽 평지로 내려가려고 했다. 300m 정도만 내려가면 됐다.

차라리 200명이 결사적으로 방어선을 쳐서 시간을 벌고, 요시모토가 평지로 달려 내려갔다면 어땠을까? 경호대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고, 당황한 요시모토도 하지 못했다. 경호대는 꽤 정예였지만 싸우기보다는 요시모토를 둥글게 감싸는 불리한 진형을 택했다. 이것이 치명적이었다. 노부나가의 무사들은 연쇄 공격으로 방어막을 벗겨냈다. 200m도 가기 전에 요시모토의 호위는 50여명으로 줄었다.

마침내 노부나가의 무장핫토리 고헤이타가 경 경호대를 뚫고 들어와 요시모토를 쳤다. 당황한 요시모토는 지휘는 실패했지만 무술 실력은 죽지 않았다. 핫토리의 공격을 막아내고 허벅지를 베어 쓰러트렸다. 그러나 이 틈에 뒤이어 달려든 모리 신스케가 창으로 요시모토를 찔렀다. 요시모토는 즉사했다. 모리는 즉시 요시모토의 목을 베었다.

'오와리의 멍청이' 오다 노부나가가 순식간에 전국시대 최고의 기린아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이날 전투의 이상한 진실

필자는 이 전투 이야기를 중학교 수업 시간에 역사 선생님에게 처음 들었다. 그 선생님이 무술 유단자에 이런 스토리를 좋아하는 분이어서 아주 신명 나게 들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는 요시모토가 교토를 향해 진격하는 길이었고, 그를 막을 세력이 없어서 그야말로 요시모토가 천하 패권을 쥘 상황이었는데, 오다 노부나가의 기습에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다. 그 바람에 우승 후보가 사라지면서 이후 수십년간 천하 패권을 둘러싼 격렬한 대결이 벌어진다는 이야기가 정설이었다.

역사 연구가 진행되면서 요시모토의 목적은 교토 입성이 아니라 오와리 정복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이날의 기습, 노부나가의 기이한 대응과 성공 비결은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여러 가지 해석이 제시되고 있다. 그 이유는 문인과 학자들은 전쟁을 잘 모르고, 역시 같은 이유지만, 화끈하고 저돌적인 부분만 강조하는 노부나가의 성격과 자질에 대한 오랜 오해가 결부됐던 탓인 것 같다.

가노 소슈의 오다 노부나가 초상화(부분, 1583, 일본 중요문화재,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이 전투를 노부나가의 시점에서 다시 복기해 보자.

요시모토의 침공은 5월 17일부터 시작됐다. 요시모토는 오와리의 남동쪽에서 진입해서 북쪽으로 진군했다. 요시모토는 군을 두 갈래로 나눴는데, 휘하 부대 중에서 최강의 무사단이던 젊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미카와군이 좌익을 맡아 오와리의 서쪽 해변가를 따라 진군했다(당시는 해안이 지금 해안선보다 안쪽으로 많이 들어와 있었다).

이 해안선을 지키는 오와리의 국경요새가 와시즈, 마루네 성이었다. 도쿠가와는 성을 포위하고 맹공을 퍼부었다. 요시모토는 그 동쪽 내륙길로 진군했고, 별다른 전투 없이 오케하자마에 도달했다. 두 군대가 겉보기에는 동서로 나란히 진군하지만 내용으로 보면 도쿠가와가 전투를 도맡고, 요시모토는 유유히 뒤를 따르는 그런 형세였다.

18일부터 와시즈, 마루네가 포위됐지만, 기요스에 있던 노부나가는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았다. 노부나가의 이런 태도에 가신들은 혀를 찼다. 전국시대 성들은 거의가 유럽의 기사들처럼 반독립적인 소영주, 기사들이다. 이들의 위기를 못 본 척한다면 주군으로서 자격이 없고, 이를 목격한 다른 기사들은 순식간에 떨어져 나갈 것이다. 가노, 가신들이 노부나가가 정신이 나간 것 같다고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휘하 병사들이 집결했지만 노부나가는 명령이 있을 때까지 쉬고 있으라고 했다. 다들 어이없어하는데 노부나가는 노래를 부르고 춤까지 추고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출동명령을 내리더니 병사들이 모이는 걸 기다리지도 않고 벼락같이 기요스의 성문을 달려 나갔다. 과장이 섞인 것 같지만, 너무 갑자기 달려 나가서 동행자가 5명의 호위무사뿐이었다고 한다.

18일 밤 혹은 19일 새벽에 마루네와 와시즈가 함락됐다. 노부나가는 연기를 보고 상황을 짐작했는데, 전혀 개의치 않고 아츠타 신궁에 가서 달려오는 병사들을 모았다. 겨우 200명 정도였지만 노부나가는 계속 앞으로 나가 젠쇼지 성까지 가서 병력을 수합했다. 더 나가면 안 된다는 수하의 만류를 뿌리치고 다시 진격해 나카지마성에 들어갔다. 이때 다 모인 병력이 2000명 정도였다.

여기서 사람들이 놓친 핵심이 나카지마 성 입성이다. 여기까지 가면 마루네와 와시즈의 병력이 노부나가의 뒤를 손쉽게 차단할 수 있다. 병력도 얼마 안 되는데, 도쿠가와 군과 요시모토 군 사이에 끼일 수 있는 위치에 노부나가가 스스로 걸어 들어간 것이다. 완벽한 기습을 위해 예상치 못한 행동을 했다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아무리 대담하다고 해도 명장은 승부를 운에 맡기지 않는다. 명장은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판단하기 때문에 대담해 보이는 것이다.

요시모토는 노부나가가 젠쇼지 아래로 내려오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음이 틀림없다. 요시모토가 오케하자마에서 한가하게 지내고 심지어는 음주·가무까지 하고 있었던 것은 과장된 이야기가 아니라 노부나가가 젠쇼지에서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할 것이란 확신 때문이었음이 틀림없다. 아니면 젠쇼지까지 왔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을 수도 있다. 요시모토의 정보원이 노부나가가 기요시에서 미적대고 있다는 정보 정도는 보냈을 것이다. 그 이후 노부나가는 벼락같이 움직였는데, 이 속도는 정보원들이 탐지해도 빠르게 요시모토에게 전달하기가 쉬운 속도가 아니었다.

설사 요시모토의 정보망이 신속하고 훌륭하게 작동했다고 해도 젠쇼지 입성 정도까지나 보고됐을 것이다. 어쩌면 노부나가가 일부러 젠쇼지 입성을 흘렸을 수도 있다.

요시모토는 노부나가가 기요스에서 놀다가 소수만 거느리고 젠쇼지로 왔다는 정보를 들었다고 해도 노부나가의 엉망진창 행동에 전혀 위협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고, 미치지 않고서야 젠쇼지 남쪽으로 진격한다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초상화. (출처: Kanō Tan'yū,,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그러나 노부나가는 젠쇼지를 나서서 오케하자마로 단숨에 진격했다. 사람들이 놓치는 또 하나의 진실이 이때 서쪽에 있던 도쿠가와 군이다. 당시 도쿠가와는 급한 진격과 전투, 군량 수송으로 너무 지쳐서 와시즈와 마루네 성 남쪽에 있는 오타카 성에서 쉬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설사 노부나가가 요시모토 살해에 성공한다고 해도 도쿠가와 군이 바로 동쪽으로 이동하면 노부나가는 퇴로가 끊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노부나가의 대담한 기습에 결정적인 요건이 도쿠가와의 휴식 혹은 방관이었다. 도쿠가와의 방심이었을까, 노부나가와 내통이 있었던 것일까. 우리가 현장 답사를 하고, 지도를 보면서 이 이야기를 나눴을 때 함께 간 모든 분이 도쿠가와와의 밀약에 표를 던졌다.

노부나가의 기습은 완전한 드라마에 치밀하게 짜인 각본이었다. 요시모토의 공격을 예상하고 도쿠가와와 통하고, 내부 사정에 정통해야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다. 바보의 기괴하고 상식 파괴의 행동이 거둔 우연한 승리가 절대 아니다.

이런 치밀한 각본에 도움을 준 보이지 않는 힘이 상인 집단과 그들의 정보력이다. 노부나가가 방어력이 미약한 기요스에 자리 잡고 상인을 육성한 효과가 여기에도 나온다. 전투 후에 노부나가는 최고 공로자로 요시모토를 공격했던 두 무사와 정보조직을 선정했다.

노부나가는 절대 충동적인 인물이 아니다. 그의 대담하고 기이한 충동성은 시대를 앞선 선견지명, 치밀한 계산의 결과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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