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대한민국의 품격은? [이근면의 품격 몽상]

이근면 초대 인사혁신처장(사람들연구소 이사장)

편집자주 ...대한민국은 더 이상 가난한 나라는 아니지만, 성취에 걸맞은 존중과 신뢰를 충분히 누리고 있는지는 여전히 질문으로 남아 있다. '품격 몽상'은 기업·대학·정부 현장에서 체감한 이 간극에서 출발한다. 이 시선과 시각에서 말하는 품격은 결과가 아니라 권한을 쓰는 방식, 규칙을 대하는 태도, 갈등을 조정하는 국가의 언어다. G3 국가를 지향한다는 것은 경제 규모가 아니라 세계가 신뢰할 수 있는 운영의 품격을 갖추는 일이다. '품격몽상'은 성장 이후 대한민국이 반드시 넘어야 할 국격의 문턱을 사유하는 기록이다.

이근면 초대 인사혁신처장(사람들연구소 이사장)

부쩍 거리에 외국인이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합법적 상주 외국인이 160만 명이니 이제 세계 속의 한국이 실감 난다. 거기다 외국인 관광객 또한 급증가세이니 살기 좋은 나라, 행복한 나라가 된 듯하다. 그런데 국제사회에서의 눈은 어떨까? 우리는 스스로 행복한가? 우리 국민들은 어떤 세계인의 생각과 자세, 가치를 갖게 됐을까?

GDP는 올랐는데 국격은 왜 불안한가

대한민국은 더 이상 가난한 나라가 아니다. 1인당 국민소득은 3만 달러를 넘어섰고, 세계 10위권 경제 규모에 진입했다. 반도체·조선·배터리·방산에 이르기까지 핵심 산업은 글로벌 최상위권 경쟁력을 확보했다. 정치적으로도 군사 독재를 끝내고, 여러 차례의 평화적 정권교체와 탄핵까지 제도 안에서 해결해 왔다. 숫자와 이력만 놓고 보면 대한민국은 분명 성공한 국가다.

그런데 이상하다. 국제사회가 바라보는 한국의 이미지는 여전히 불안하다. '불안한 선진국', '시끄러운 민주주의', '예측하기 어려운 국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우리는 분명 잘살게 됐는데, 왜 존중은 그만큼 따라오지 못하는가. 이 질문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대한민국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느냐를 가르는 구조적 질문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대한민국은 성장에는 성공했지만, 운영의 품격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가의 품격은 GDP나 군사력에서 나오지 않는다. 법이 얼마나 일관되게 작동하는지, 권력이 얼마나 절제되는지, 행정이 얼마나 책임 있게 판단하는지, 약자가 제도 안에서 보호받는지, 국제사회에서 얼마나 신뢰받는지가 국격을 결정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국정 운영을 보면 '강한 국가'는 됐을지 몰라도 '품격 있는 국가'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2019년 4월 25일 오후 국회 의안과 앞에서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 의원과 보좌진들이 여당(더불어민주당)의 공수처법 등 패스트트랙 지정 법안 제출을 저지하기 위해 몸으로 막아서고 있다. /뉴스1 ⓒ News1 이종덕 기자

정치는 매 순간 전쟁처럼 작동한다. 타협은 배신이 되고, 설득은 패배가 된다. 국회는 합의의 공간이 아니라 상대를 쓰러뜨리는 링이 됐고, 정책의 완성도보다 정파적 유불리가 먼저 계산된다. 국익보다 지지층의 감정이 앞서는 정치가 반복될수록 국정의 연속성은 무너지고, 국가는 늘 출발선으로 되돌아간다. 정치가 갈등을 조정하지 못할수록 사회 전체의 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행정 역시 품격을 잃고 있다. 공무원은 판단보다 책임을 먼저 계산한다. 적극 행정보다는 감사·수사·소송의 리스크를 걱정한다. 결정을 내리는 순간 개인 책임으로 귀결되는 구조에서 가장 안전한 선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 결과 행정은 느려지고, 현안은 쌓이며, 국가는 위기 앞에서 늘 한발 늦게 움직인다. 이는 개인의 무능이 아니라 결정하지 않도록 설계된 시스템의 문제다.

사법은 정치가 풀지 못한 갈등을 떠안고 있다. 정치적 문제는 협상과 합의 대신 고발과 소송으로 넘어가고, 국정의 주요 쟁점은 법원의 판단을 기다리는 상태가 된다. 사법은 최후의 보루여야 하지만, 일상의 조정자가 되는 순간 과부하에 걸린다. 정치의 책임 회피가 사법의 부담으로 전가되면서 국정은 상시적 불안 상태에 놓인다.

이렇게 권한은 커졌지만 책임은 공중으로 흩어졌다. 지금 대한민국은 '권력은 있는 나라'지만 '책임지는 국가'라고 말하기 어려운 상태다. 문제는 이 구조가 국민의 삶에 직접적인 비용으로 돌아온다는 점이다. 정치가 합의하지 못하면 예산은 늦어지고, 정책은 표류하며, 기업은 투자를 미룬다. 행정이 결단하지 않으면 민원은 쌓이고, 사회 갈등은 법정으로 직행한다. 사법이 정치의 최종 심판자가 될수록 국정은 언제든 멈출 수 있는 잠재적 위기 상태에 놓인다. 이 모든 비용은 결국 국민의 시간과 기회, 그리고 신뢰의 상실로 귀결된다.

그런데도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이 있다. 대한민국은 이미 세계 속에 작지 않은 영토를 만들어 왔다는 점이다. 수출입 규모로만 봐도 한국은 세계 10위권 교역 국가이며, 글로벌 공급망 곳곳에 깊숙이 연결된 경제적 영토를 갖고 있다. 한국 여권은 세계 최상위권의 이동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단순한 편의가 아니라 한국 국가 시스템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뢰가 축적된 결과다. 여기에 약 700만 명이 넘는 해외 동포와 재외 국민은 세계 곳곳에서 기업인, 연구자, 노동자, 예술가로 활동하며 대한민국의 영향력을 확장해 왔다.

이 모든 것은 지난 세기, 우리가 피땀으로 닦아온 성취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이렇게 어렵게 확보한 경제적 영향력, 여권의 힘, 해외 동포가 쌓아온 신뢰를 지켜내고 더 발전시킬 수 있느냐 하는 다른 차원의 과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세계는 더 이상 "얼마나 성장했는가"를 묻지 않는다. 이 나라는 믿을 수 있는가, 예측 가능한가, 내부 갈등을 스스로 관리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는 순간, 세계 속 대한민국의 영토는 서서히 마모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지금 국가의 품격은 선택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이룬 성취를 지속시키기 위한 최소 조건이다. 정치가 절제되고, 행정이 책임지며, 시장이 공생하고, 시민이 품격을 지킬 때만 대한민국은 세계 속에서 '함께 가고 싶은 나라'로 남을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성장국가의 정상에 올라섰다. 이제 남은 길은 운영의 품격으로 다시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부산항 신선대부두와 감만부두 야적장에 컨테이너가 가득 쌓여 있는 모습. /뉴스1 ⓒ News1 윤일지 기자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할 시간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얼마나 더 성장할 것인가"만을 물어서는 안 된다. 대신 "이 성취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 "다음 세대에 어떤 나라를 넘겨줄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품격은 선언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정치의 언어, 행정의 판단, 시장의 질서, 시민의 태도가 매일 같이 쌓여 형성되는 국가의 습관이다.

이 글은 하나의 결론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정치의 품격, 행정의 품격, 시장과 노동의 품격, 교육·복지·주거의 품격, 그리고 시민의 품격까지. 대한민국이 '잘사는 나라'를 넘어 '존중받는 나라'로 가기 위해 무엇을 고쳐야 하는지, 어디서부터 다시 설계해야 하는지를 차례로 짚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품격을 말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이 나라는 이미 충분히 멋질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 필자는 삼성광통신 CEO 출신으로 초대 인사혁신처장을 지냈다. 성균관대·아주대·경성대 교수와 청년미래네트워크·청년위함 운영위원장을 역임했고, 지금은 사람들연구소 이사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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