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한의 역사 크루즈] 무신정권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무신정권에 대한 회고

필자는 유신시대에 초중고교를 다녔고, 전두환 정권 시절을 대학에서 보냈다. 주변 사람들에게서 군사정권에 대한 알레르기가 차고 넘쳤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사학과에 갔더라면 무신정권을 연구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여러 번 만났다. 그때마다 역사가는 현실 세계에서 문제의식을 채록해야 하지만, 현실을 과거에 대입해서 억지 교훈을 찾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곤 했다.

그때 한 분이 이렇게 반박했던 것이 지금도 기억난다. "그렇다면 무슨 재미로 역사를 합니까?" 필자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전문 역사학자들도 종종 이런 덫에 빠진다. 무신정권이 특히 그랬다. 사람들은 연구자의 결론에서 현실 비판의 근거를 찾으려고 하거나 연구자가 군사정권을 옹호한다고 째려보기도 했다.

이런 과한 부담 때문인지 무신정권에 대한 연구는 과한 부담이 몰리고 해석이 자유롭지 못했다. 신화와 구호가 만들어지고, 드라마에도 영향을 미쳤다. 요즘은 학계에서 많은 교정이 이뤄졌지만, 대중들에게는 아직도 과거의 오해들이 짙게 깔려 있다. 그런 몇 가지 오해를 중심으로 무신정권의 발발 원인에 대해 살펴보겠다.

난봉꾼 의종

무신란 발생의 책임자로 지목받는 사람은 의종이다. 밤낮 없이 향락을 즐기고, 궁을 떠나 놀러 다니는 바람에 경호하는 무신들의 원망을 샀다. 심지어 문신들은 따뜻한 실내에서 술을 마시며 파티를 여는데, 무신들은 밖에서 경호하며 추위와 배고픔에 떨었다.

여기에 김돈중이 정중부의 수염을 태우고, 젊은 문신이 나이 든 대장군의 뺨을 때리는 등 무신들을 업신여겼다. 여기에 분노해서 무신들이 봉기했고, 문신 복장을 한 자는 다 죽이는 대학살극이 펼쳐졌다고 한다.

의종은 고려 18대 국왕으로 인종의 맏아들이다. 의종은 태자 시절에 왕위 계승에 위기를 겪었다. 친모였던 공예왕후가 의종의 통치 능력을 의심해서 둘째 왕경으로 교체하려고 했다. 태종의 세자였던 양녕대군은 이런 상황을 맞이하자 더 삐뚤어졌다가 세종으로 교체되고 말았는데, 의종은 다행히 스승의 코치를 받아 조신하게 행동했다. 운도 따랐다. 태자 교체를 고심하던 인종이 37세로 요절했다. 의종은 19살이었다.

인종 부부가 태자 교체를 고심한 이유는 의종이 극도의 난봉꾼이어서가 아니다. 인종 때의 정치 상황이 녹록지 않았다.

고려는 건국 후에 두 번의 큰 전쟁을 치른다. 거란의 침공과 윤관의 별무반으로 상징되는 여진 정벌이다. 전쟁이 터지면 국가는 가용한 모든 자원을 동원해야 한다. 가문보다는 능력으로 출세할 기회가 높아진다. 신분제가 융통성을 발휘하고 신진세력이 대거 정계로 진입했다.

위기를 느낀 기성관료계는 M&A를 통한 구조조정을 실시한다. 신진세력을 자기 휘하로 포섭하면서 자신의 권력은 늘려간다. 소수의 귀족이 힘의 균형을 갖고, 공존하던 체제에서 소수의 대귀족이 왕실과 신진세력을 손에 넣고 독보적인 권력을 키워가는 시스템으로 바뀐다. 이 구조조정의 최종 승자가 이자겸이었다. 세 딸 모두 왕비가 돼 왕실을 장악하고, 척준경 같은 신흥 무장을 끌어들여 하부구조를 채웠다. 인종은 척준경을 회유해서 이자겸을 제거했다. 이 과정에 궁이 불타고, 인종은 죽음의 위기를 겪는다.

이자겸은 사라졌지만 정계는 여전히 불안정했다. 왕은 신흥무장들, 신진세력을 어떻게 해서든 자기 휘하로 끌어들이려고 했다. 무신란의 주동자였던 정중부와 동급의 장군들은 의종 치세가 아니라 인종대에 국왕의 경호실, 친위대에 등용된 무사들이었다.

의종은 이런 무사들을 계속 불러 모았다. 다시는 이자겸의 난, 척준경의 난이 발생해서는 안 됐다. 의종은 계속 친위대를 강화하는데, 출신과 지역을 가리지 않고 유능한 무사는 등용하고 승진시켰다. 천민이면서 과거도 깨끗하지 못했던 이의민을 무술의 대가라고 장교로 승진시킨 사람이 의종이다. 정중부도 평민 출신으로 병사 시절에는 폭력, 문제사병이었던 것 같은데, 인종과 의종이 대를 이어 총애하면서 경호부대의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름이 잘 안 알려져서 그렇지 무신정권의 주동자들, 초기 권력자들 대부분이 이런 출세 과정을 거친 무장들이었다. 여기서 무장들이 문신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고, 심지어 굶주리기까지 할 정도로 차별을 받았다는 부분을 검토해 보자.

1170년 보현원에서 무장들이 봉기할 때 명분은 배고픔과 차별 대우였다. 정중부, 이고, 이의방이 최초로 쿠데타를 모의할 때도 명분은 문신들은 파티를 벌이는 동안 경비를 서는 무신들은 굶주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번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왕과 문신을 경호하고 눈비를 맞으면서 경비를 서는 건 고된 일이기도 하지만 무신들의 아이덴티티이자 독보적 영역이기도 하다. 이의민이 서류 작업을 맡았다면 장교로 승진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드 워크, 하이 리턴이라고 할 수 있다.

무신란의 주동자들은 당시 신분제 기준으로서는 파격적인 승진을 이룬 사람들이었다. 힘들고 굶주렸다는 것도 박봉에 야전 임무를 맡기면서 밥도 주지 않고 부려 먹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요즘 말로 하면 식사 추진 계획이 잘못되어서 2끼가 필요한데 1끼만 온다거나 시간을 한참 넘겨서 배식 추진이 되는 그런 사고였다. 물론 왕과 문신들의 배려가 한참 부족했던 건 사실이고, 의종은 평민 주제에 장군까지 승진했으니 그 정도는 참고 감사할 것이라고 안이하게 생각했던 건 사실인 듯하다.

그렇다고 해도 이건 구호이지 원인이 아니다. 군인은 힘들고 위험한 직업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병사들이 봉기할 때는 늘 이런 '특별한 고생과 낮은 대우'를 구호로 내세운다. 하지만 순수하게 그 이유 때문이라면 세상의 모든 군대는 한 달 간격으로 봉기해야 할 것이다.

반란의 조건

인종 이전부터 무신뿐 아니라 신진관료들이 진입하면서 관료사회가 포화하고 경쟁이 심화했다. 고려 때 관료가 된다는 건 지금처럼 공무원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경제력, 사회적 권력 모두가 관직에 좌우된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점이 있다. 고려 때는 문무 구별이 철저하지 않았다. 문신들도 활쏘기와 무술을 익혔다. 여진정벌 때만만해도 과거 장원급제자가 전방부대 중대장, 대대장으로 발령받아 야전을 벌이며 살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문신의 아들도 무장이 되기도 하고, 무장이라고 자손이 문반으로 입사할 가능성이 원천 봉쇄되지 않는다. 그런데 경쟁이 거세지면 자기 보호가 발동한다. 무리를 지어서 내 영역을 지키려고 한다. 이 방어막에는 지연, 학연, 혼맥 모든 것이 동원된다. 자기 영역을 지키려니 아이덴티티를 강조하고, 나와 다른 아이덴티티를 무시하고 차별하고 박해한다.

인종-의종대에 특히 의종대에 이런 풍조가 급속히 증가했던 것 같다. 문신들은 출신배경이 좋지 않은 사람이 많은 무신들에게 노골적으로 무안을 주기 시작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자기 몸에서 무신적인 징표들을 떼어내기 시작한다.

무신란 직전 의종이 서경(평양)에 행차했다. 왕을 따라 수도에서 온 문신들과 서경의 지방문신들이 활쏘기 시합을 벌였는데, 개경의 문신들이 서경 문신의 상대가 되질 않았다. 개경의 문신들, 문신 가문들은 스스로 무신적 역량을 거세하고, 문신의 영역으로 섹트화 되고 있었다는 증거다. 의종도 자기 친위대를 키우면서 이들을 섹트화하고 있었다. 의종은 이것이 그들의 충성심을 높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반대로 그들의 단결과 야망의 공유를 촉진하고 있었고, 권력에 대한 욕구가 왕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넘어섰다. 이런 심리는 왕과의 사연이 적은 중하급 장교층에서 더 강하게 번졌던 것 같다.

문신과 무신이 단절되면서 힘의 균형과 무신과 군대에 대한 통제력도 깨어졌다. 정중부가 쿠데타를 결심했을 때 이미 이런 생각이 무신들 사이에서 돌고 있었다. "문관을 없애는 건 썩은 나무토막을 부러트리는 것처럼 쉽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왕궁을 점령하기는 쉽다. 그러나 통치가 문제다. 왕궁만 점령해서 권력을 획득할 수 있다면 인류 역사에서 쿠데타는 수만 배는 더 발생했을 것이다.

다시 문신으로 돌아오면 문신들도 과포화 상태였다. 문무 갈등에 가려졌지만, 고위문벌귀족과 신진가문 사이에 알력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특히 신흥가문 출신 중에는 무신들과 잘 지내는 관료들이 많았다. 즉 무신정변이 성공했을 때 국가 통치의 파트너 협력자로 끌어들일 문신 집단이 이미 충분하게 존재했다. 반란 음모자들은 여기에서 성공 가능성, 통치의 가능성을 봤다.

보현원에서 살해된 문신은 50명이었다. 개경 입성 후에 추가돼서 총 150명 정도로 추정한다. 이들의 시종, 수행원까지 포함하면 실제 희생자는 몇 배로 늘 것이다. 5명이라고 해도 생명은 소중하지만, 모든 문신을 다 죽이는 대학살은 아니었다. '문신의 관을 쓴 자는 다 죽여라'는 실행 명령이 아니라 개경으로 입성한 쿠데타군이 거리에서 외친 협박성 구호였다. 문관을 다 죽일 필요도 없고 다 죽여도 안 됐다. 오히려 희생자를 줄이기 위해 집 밖으로 나오지 말고 저항하지 말라는 협박성 구호였다.

무신과 친하게 지냈다는 이유로 살생부에서 빠져나가거나 사전에 안배된 문신들이 훨씬 많았다. 모의자들은 정변 후에 내각 구성, 등용할 문신들도 구성해 놓았던 것이 틀림없다.

무신 중에도 정변 이전부터 문신들과 친하게 지내고, 문신들을 보호하려고 노력한 무신들이 많았다. 정변 주도층은 온건파와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완전히 배제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정변 성공 후 권력욕에 취한 강경세력들은 결국은 온건파 무장과 문신의 협력세력에 의해 제거된다.

무신정권의 진정한 원인은 무신 차별 이전에 세습 기득권층의 섹트화와 무능화다. 이 역시 역사적으로 무수히 반복되지만, 이런 사태가 벌어질 때 보면 놀라울 정도로 무능하고, 눈과 귀는 막혀 있고, 말과 생각은 한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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