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한의 역사 크루즈] 전쟁 영웅의 실수…게티즈버그 전투(하)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어느 기병 장교의 동상

게티즈버그 전투는 1863년 7월 1일부터 3일 동안 벌어졌다. 마지막 순간까지 승자를 확신할 수 없는 아슬아슬한 날이 이어졌다. 첫 전투가 벌어진 지역은 뒤로 교회의 종탑과 붉은 벽돌로 지은 집들이 보이는 벌판이다.

넓은 벌판에 말을 탄 기병장교의 동상이 외로이 서 있다. 북군의 기병사단장 존 뷰퍼드 장군의 동상이다. 게티즈버그 전투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이 동상이 생뚱맞게 느껴질 수 있다. 아무리 봐도 동상을 세울만한 장소는 아니다.

그날 뷰퍼드 준장은 2개 기병 여단을 이끌고 게티즈버그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 동상이 있는 지점에서 그는 남군이 이곳으로 올 것이며, 이곳이 격전장이 될 것이며, 돼야 한다고 확신했다.

지금껏 북군은 제대로 이겨본 적이 없었다. 전투를 포기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필전필패였다. 그런데도 뷰퍼드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적극적인 의지와 용기가 확신을 주었다. 그는 즉시 1군단장 레이놀즈에게 자기 생각을 전하고 게티즈버그로 급행해 달라고 요청했다.

미국 게티즈버그 국립군사공원에 있는 북군 기병사단장 존 뷰퍼드 장군 동상. (필자 제공)

반면 남군은 승리에 대한 자신감은 충만했지만 북군 주력의 위치도, 자신들이 싸워야 할 곳의 위치도, 게티즈버그의 지형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게티즈버그로 진입하고 있었다.

처음 이곳에 도착한 남군은 힐의 3군단 소속 히스 사단이었다. 리는 전 병력이 도착해서 자리를 잡기 전에는 전투를 벌이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놓았지만, 히스는 맨발의 병사들에게 신길 구두를 확보하기 위해 마을에 진입했다. 그의 눈에 교회의 종탑과 그 앞 들판에 있는 북군이 보였다.

히스는 그들을 몰아내려고 했다. 하지만 북군의 저항은 예상외로 완강했다. 히스 부대가 진격한 곳은 완전한 개활지였지만, 늘 승리를 쟁취했던 그들은 북군을 우습게 보고 진격하다가 매서운 총탄 세례를 받았다.

이곳 들판은 평원처럼 보이지만 실은 약간 경사가 져 있다. 북군 방어진지에서 보면 남군의 진격지점이 놀랄 정도로 선명하게 보인다. 북군 병사들은 자신감이 차올랐고, 확고하게 총알을 퍼부었다.

2시간에 걸친 전투에서 남군은 큰 손실을 보았다. 그러나 남군 병력이 3배나 우위였다. 뷰퍼드의 부대가 무너지려고 할 즘에 검은 모자를 쓴 북군 철의 여단이 갑자기 나타났다. 레이놀즈가 2배의 행군 속도로 달려갈 것을 명령했고, 덕분에 레이놀즈 군단 중에서도 최정예인 철의 여단이 그 순간에 도착했던 것이다.

그러나 남군도 속속 도착해서 북군을 계속 수에서 압도했다. 철의 여단은 3분의 2가 전사했다. 뒤늦게 도착한 레이놀즈는 저격병에게 사살됐다. 최악은 리의 도착이었다. 전술의 천재였던 남군 총사령관은 전장에 도착하자마자 상황을 정확히 깨달았다. 이곳이 결전장이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북군 주력이 도착하기 전에 북쪽 능선을 점령해야 한다. 그는 모든 부대가 도착한 뒤에 전투를 벌인다는 자신의 명령을 취소하고, 최선을 다해 능선을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묘지가 있어서 묘지 능선이라고 불린 이 능선은 리의 판단대로 이 전투의 승패를 가르는 지형이었다. 당시는 위성지도도 없었고, 지도도 부정확했다. 그런데도 순식간에 이런 판단을 내린 리의 판단력은 경이롭다고 할 수밖에 없다.

미국 남북전쟁에서 북군에 결정적 승리를 가져다준 게티즈버그 전투 150주년을 맞아 2013년 당시 전투를 재현한 모습. ⓒ AFP=뉴스1
계속되는 실수

리는 군단장 이월에게 묘지 능선을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이월은 역전의 용사이고 리의 충실한 지지자이며, 뚝심 있는 장군이었다. 그러나 이월은 리의 지시를 이행하지 않는다. 그는 지금껏 본 적이 없게 강력하게 저항하는 북군의 기세를 보고 능선에 당연히 북군의 대병력이 주둔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북군 전 병력은 벌판에서 남군과 싸우느라 기진맥진해 있었고, 능선에는 배치할 병력도 없었다. 저녁 늦게 북군 2군단이 도착해서 비로소 묘지 능선에 병력을 배치했다.

나중에 게티즈버그 전투를 복기하면서 이월의 명령 불이행이 남군 패배의 결정적 요인이었다고 지목됐다. 그때 능선을 점령했더라면 다음 날 북군은 능선을 공격하다가 궤멸했거나 전투를 일찍 포기했을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후회해도 소용이 늦었다. 2일 차에 남군은 북군 병력이 가득한 묘지 능선을 공격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밤사이에 북군이 속속 도착해서 병력과 화력은 완전히 역전됐다. 병력 화력 모두 북군이 2배였다.

리의 오른팔인 롱스트리트 장군은 묘지 능선을 공격하지 말고 전선의 끝을 타격해서 북군을 교란하고 후방을 차단해 괴롭히자고 했다. 리는 반대했다. 이전처럼 남부 영토에서 싸우는 방어전이라면 롱스트리트의 의견이 옳다. 그러나 여긴 북부이고, 남군은 보급에 한계가 있다. 전쟁을 끝내려면 속전속결로 진행해야 한다. 리는 북군의 요충지를 단숨에 점거해서 북군 전선을 일거에 무너트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리의 생각도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북군의 요충지는 북군도 중요성을 알고 있었고, 지형도 방어 측에극도로 유리한 곳이었다.

2일 차 전투에서 결정적인 지점은 둥근 바윗돌이 있어서 라운드 탑이라고 불리는 고지였다. 이날 전투는 혼돈의 연속이었다. 남군은 리와 롱스트리트의 의견이 대립하면서 공격 지점을 두고 혼란이 벌어졌다. 그 사이에 북군이 큰 실수를 했다. 리틀 라운드 탑 부근의 병력을 재배치하면서 이 고지를 비워버렸던 것이다.

어이없는 실수 같지만, 하늘에서 보지 않는 이상 지형을 제대로 감지하기는 어렵다. 능선은 너무 길고, 양측의 대군이 집결했음에도 모든 곳에 병력을 배치할 수는 없었다. 시야를 어떻게 두느냐에 따라, 지휘관의 지형 감각에 따라 전투 지형의 이해는 달라진다.

미국 게티즈버그 국립군사공원에 있는 북군 공병참모 워런 장군 동상. (필자 제공)

그렇게 고지가 비었는데, 마침 전선을 순찰하던 공병참모 워런 장군이 이 능선에 올랐다. 그는 고지가 비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화들짝 놀랐다. 이 지점에 지금 워런의 동상이 서 있는데, 워런은 북군에서는 드물게 뛰어난 전술가였다. 그는 당장 이곳에 배치할 병력을 찾았고, 이때 북군을 위한 두 번째 기적이 벌어진다. 마침 워런의 눈에 띈 부대가 북군 최고의 전쟁영웅이 되는 체임벌린 대령의 메인 20연대였다.

체임벌린은 군대 경험이 없는 대학교수 출신이었다. 당시만 해도 정규 장교가 부족해서 변호사, 교수, 지역유지들이 대뜸 지휘관으로 특채되곤 했다. 일병과 다름없는 전쟁 초보자였음에도 체임벌린은 연대를 훌륭하게 지휘했고, 병사들의 인망을 얻었다. 역전의 용사가 된 그와 그의 연대 386명이 리틀 라운드 탑에 자리를 잡았다.

메인 20연대가 자리를 잡자마자 남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남군도 이 능선의 중요성을 알았던 터라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었다. 2시간 동안 10여 차례 파상공격을 퍼부었다. 병력은 남군이 10배였다. 여러 번 방어선이 뚫렸지만, 체임벌린은 간신히 간신히 공격을 막았다. 하지만 탄약이 떨어졌고 병력은 3분의 1만 남았다.

최후의 순간 체임벌린은 착검을 명령하고 비탈 아래로 돌진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남군이 너무 서두른 것이 실수였다. 쉴 새 없이 고지를 오르느라 남군도 남군대로 체력이 소진돼 있었다. 비탈 위에서 북군이 착검돌격을 해오자 패배를 모른다던 남군이 도주했다.

최후의, 그러나 과감한 정면 돌격

3일 차. 분노한 리는 북군 전선 중앙 평원을 지나 정면공격을 명령한다. 이 공격을 맡은 피켓 사단의 이름을 따 '피켓의 공세'라고 불리는 이 공격은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가장 극적이고 장엄하며 비극적인 전투였다.

게티즈버그 국립군사공원에 있는 기념비. (필자 제공)

그날의 공격 지점, 남군 선발대가 도착했던 지점까지 게티즈버그 현장에는 표시가 돼 있다. 북군의 최후 방어 지점은 반원을 그리는 곳이었고, 약간 높아서 아래 벌판이 제대로 관측되는 곳이었다.

당시는 밀집대형으로 서서 전진하는 전투였다. 남군이 집중포화와 사격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온 것도 믿기지 않는 선전이었고, 놀라운 감투 정신이었다. 하지만 북군도 물러서지 않았다. 최후 방어선이 무너지려 할 때쯤 후위에 있던 북군 병사들도 놀라운 용기로 역습을 가했고, 피켓 사단은 등을 돌리고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게티즈버그 전투는 남군의 비극으로 끝났다. 리는 그 후에도 빛나는 승리를 여러 번 거뒀지만 게티즈버그 실패의 충격은 죽을 때까지 극복하지 못했다.

남군 패배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남군 지휘관들의 이해할 수 없는 실수들이었다.

이월은 비겁자가 아니었지만 그날 명령을 어겼다. 리틀 라운드 탑에서 남군은 고지가 비었을 때 점령할 수 있었지만 행동이 꿈떴고, 초조했던 그들은 너무 성급하게 밀어붙이다가 역전패를 당했다. 피켓의 공세는 거의 이판사판식의 도박이었다. 설사 승리했더라도 피해가 너무 커서 워싱턴을 압박한다는 본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반면 실수를 거듭하던 북군 지휘관들이 게티즈버그에서는 놀랄만한 신속함과 용기, 정확한 판단력을 보여줬다.

갑자기 남군과 북군 지휘관의 영혼이 바뀐 듯한 차이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두 가지 이유를 들고 싶다. 남군은 사기는 드높았지만 내면은 불안했다. 귀와 눈을 가리고 결전장으로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급, 병력, 모든 요인이 단기 승부를 요구하고 있었고, 내면의 초조함과 압박은 컸다. 리는 이 요소를 무시하고 모두가 이전처럼 대응하고 반응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 요인은 북군 지휘관들의 재량권이다. 총사령관 미드는 북군이 처음 맞이한 제대로 된 군인이었다. 급박한 상황에서 북군의 지휘관들은 상당한 재량권을 얻었다. 무능한 장군들은 재량권을 줘도 활용하지 못한다.

반면 소수의 역량가는 신속하게 움직였고, 자신들의 홈그라운드라는 이점을 제대로 살렸다. 이에 비해 남군은 계속되는 악재 속에서 지형을 두려워하고 소극적으로 움직였다. 그것이 3일간의 전투 내내 불리한 지형에서 무리한 공격이라는 악수를 유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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