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물리학의 거성 엔리코 페르미 출생 [김정한의 역사&오늘]

1901년 9월 29일

엔리코 페르미. (출처: Smithsonian Institution,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1901년 9월 29일, 이탈리아계 미국인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가 이탈리아 로마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수학과 물리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918년 피사 대학교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해 물리학을 전공했다. 그의 입학시험 답안지는 이미 박사학위 논문 수준이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926년, 페르미는 불과 25세의 나이에 로마 라 사피엔차 대학교의 이론물리학 교수가 됐다. 이 시기에 배타 원리를 따르는 입자들의 통계적 분포를 설명하는 '페르미-디랙 통계'를 폴 디랙과 독립적으로 발견했다. 이 입자들은 훗날 '페르미온'이라 불리게 된다. 또한 '베타 붕괴'에 대한 독자적인 이론을 정립하며 약한 상호작용의 연구에 중요한 기초를 놓았다.

1930년대에는 중성자를 충격해 인공적인 방사성 원소를 만드는 연구를 진행했다. 특히 느린 중성자가 핵반응을 일으키는 데 효과적임을 발견했는데, 이는 원자력 이용의 핵심 원리가 됐다. 이 공로로 1938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노벨상 수상을 위해 스웨덴을 방문한 페르미는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권과 반유대주의 정책을 피해 유대인인 아내 라우라 카폰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와 시카고 대학교에서 핵분열과 연쇄 반응의 가능성을 연구했다.

페르미는 미국의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인 맨해튼 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1942년 12월 2일, 그는 세계 최초의 핵반응로인 '시카고 파일-1'을 성공적으로 가동해 인공적인 핵 연쇄 반응을 실현했다. 하지만 전후에는 핵무기 개발에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며 평화적 원자력 이용에 관심을 돌렸다.

전후 1954년 11월 28일 사망하기 전까지 페르미는 시카고대 엔리코 페르미 핵연구소에서 고에너지 물리학과 입자 물리학 연구를 계속했다. 그의 이름은 기본 입자인 '페르미온', 원소인 '페르뮴', 그리고 다양한 상과 연구소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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