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용한의 역사 크루즈] 자연의 부조화, 사회의 부조화

임용한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생텍쥐페리는 소설가로 알려졌지만, 그의 원래 직업은 조종사였다. 세계의 오지를 누비는 모험적인 조종사였다. 그의 대표작 '어린 왕자'는, 내면에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을 담고 있다고 해도 겉모습은 판타지 동화의 모습을 띠고 있다. 동화가 아닌 어른의 글 형태를 한 대표작이 조종사로 겪은 모험과 다양한 만남을 회고록 형태로 엮은 '인간의 대지'다.
이 책에 이런 내용이 있다. 생텍쥐페리와 동료들은 북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에 사는 원주민의 삶을 개선해 주고 싶었는데, 이런 분들 특유의 전통에 대한 강한 집착과 자부심으로 도무지 호응을 해 주지 않았다. 생텍쥐페리는 교만한 문명인들처럼 기술의 우위로 그들을 누르려고 하는 대신 저들에게 세상은 그들이 아는 세계보다 훨씬 넓다는 걸 보여주기로 한다.
부족의 어른들을 비행기에 태우고 빅토리아 폭포로 데려갔다. 쏟아지는 물줄기를 보면서 그들은 넋을 잃었다. 폭포를 보면서 사막의 어른들은 떠날 줄을 몰랐다. 인제 그만 가야 한다고 하자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기왕 보러 온 거 끝날 때까지 보고 갑시다."
이날의 소감을 생텍쥐페리는 이렇게 적었다. 정확한 복원은 아니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세상은 얼마나 불공평한가. 저들은 낙타 오줌 냄새나는 말라붙은 우물에서 나오는 물을 찔끔찔끔 받아서 간신히 생명을 유지하고 사는데, 그들이 사는 세상 남쪽에서는 1년 동안 그들을 먹여 살릴 물이 끝없이 펑펑 쏟아지고 있으니 말이다.
생텍쥐페리의 본의는 세상의 불공평함을 말하려고 한 건 아니었지만, 지구 전체로 봐도 자연의 세계는 불공평하다. 우리는 자연의 조화라는 말을 좋아하고 낭만적으로 미장하는데, 자연의 조화는 아름다운 조화, 균형감 있는 조각들이 쌓여서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사막과 빅토리아 폭포, 열대와 극지방처럼 차이가 격돌하면서 생성하는 야만적이고 파괴적이고, 울부짖는 조화다. 그러나 자연의 불균형보다 더 심각한 불균형은 자원을 이용하는 능력이 만들어 내는 불균형이다.
이스라엘에 갔을 때였다. 비행기가 텔아비브 공항에 도착하면서 창밖으로 텔아비브의 풍경이 보였다. 나는 복도 쪽에 앉아서 창밖 세계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비행기가 하강하는 한 5분 동안 작은 창 사이로 보이는 세상을 온 신경을 집중하고 봤다. 텔아비브에 대한 첫 소감은 의외로 나무가 많다는 것이었다.
우리 세대는 1970~80년대에 광야를 옥토로 바꾼 이스라엘의 농업 기적에 대해 워낙 많은 얘기를 들었던 터라 텔아비브는 저런 나무들이 자연적으로 자랄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감탄스러웠다.
자세히 보니 아파트나 주택단지에 잎이 무성하고 건장한 나무들이 밀집해 있었다. '그래, 주택 주변은 잘 가꿨겠지' 생각했다. 공원처럼 보이는 녹지도 있고 도로변의 가로수도 상당히 많았다. '저런 나무들이 사막의 기적이라 불리던 이스라엘의 걸작이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버려진 땅, 공한지, 하천변의 둑 같은 곳에서 숲이나 나무의 군집이 보였다. 대신 이런 나무들은 잎 색깔도 옅고 성장도 부실했다. 한국에서 보면 영락없이 저절로 자란 나무들일 것이다. 그런데 연간 강수량이 530㎜에 불과한 텔아비브에서 저런 나무가 저절로 자라났을까? 인공적으로 키웠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사소한 잡목들도 있었다.
착륙 후 차를 타고 달리면서 그 나무들을 다시 관찰할 기회가 있었다. 하천변, 다리 옆 나대지 같은 곳에 저절로 자랐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막에서 자라는 그런 종류도 있었지만 그런 곳에도 꽃과 올리브 나무 등이 자연스럽게 군집을 이룬 곳도 많았다.
황량한 땅임에도 뜨거운 태양 덕분에 조금만 물을 주면 풀과 나무들의 성장이 대단히 빠르다고 한다. 주택가에서 볼 수 있는 아름드리 고목이 만들어지는 시간도 놀랍도록 빠르다고 한다. 기술로 문을 열자 숨겨져 있던 자연의 비밀이 드러났다고 할까. 사막을 녹지로 만드는 데는 인간의 기술과 노력 외에 이런 비밀이 또 숨어 있었다.
이스라엘의 농업혁명은 주변국들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가장 놀라운 시도를 보이는 곳이 이집트다. 이집트의 보물이 나일강이다. 이집트는 이스라엘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못하지 않은 사막 위에 세워진 나라다. 그런데도 고대부터 놀라운 풍요를 자랑할 수 있었던 건 대단한 수량을 보유하고, 적도의 열대지역이 생산해 주는 풍부한 유기물을 공급해 준 나일강 덕분이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토목기술로 나일강물을 끌어들여 사막을 옥토로 바꿨다. 하얗게 보일 정도로 생명력이 빠져나가 탈색된 땅에 나일강물이 흘러 들어와서 농작물을 키웠다. 이집트를 여행해 보면 이 광경이 정말 놀라운데, 나일강물이 도달해서 생명을 부여한 모래와 그렇지 않은 모래가 땅에 금을 그은 것처럼 확연히 구분된다.
사막이 키워낸 농작물은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뜨겁고 건조한 태양과 만나 오히려 정상적인 토양에서 자란 곡물보다 더 훌륭한 품질을 생성해 낸다. 로마 제국이 제일 사랑한 곡물이, 아니 반드시 확보하려고 했던 곡물이 이집트 밀이었다. 로마는 도시로 몰려든 수십만 명의 빈민, 노동자들에게 무상으로 식량을 공급했다. 이를 흔히 '빵과 서커스 정책'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실 이들에게 배급된 건 빵이 아니라 죽이었다. 이탈리아와 갈리아의 밀로는 빵을 제조할 수 없었다고 한다. 우수하고 찰진 이집트 밀이 들어오면서 빵을 구울 수 있게 됐다.
페르시아제국,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 카이사르, 유스티니아누스 등은 모두 이집트를 정복한 뒤 세계 제국으로 추진하는 동력을 얻었다. 나폴레옹은 넬슨 제독 때문에 실패하기는 했지만, 그가 이집트 원정을 시도했던 이유도 이들을 따라 이집트를 자기 영지로 삼은 뒤 자기 제국의 꿈을 펼치려고 했던 것이 틀림없다.
고대 이집트야말로 이스라엘 이전에 농업혁명을 이룬 나라였다. 다만 거대한 나일강에 너무 압도된 나머지 고대 이집트의 풍요는 '나일강의 선물'이라는 말을 잘못 해석했다. 이 '선물'이라는 단어가 인간의 지혜와 노력을 제외하는 선입견을 줬던 것이다.
어쩌면 농업혁명을 추구한 초기 이스라엘의 통치자와 기술자들도 이집트에서 영감을 얻었던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 풍요한 나일강과 고대 선조들의 교훈을 현대의 이집트가 오해하고 있는 듯하다.
현재 이집트는 나일강을 이용해서 사하라 사막의 불모지대를 녹지로 바꾸는 엄청난 공사를 벌이고 있다. 사막 깊숙이 파고드는 도로를 닦고, 나일강을 끌어오는 파이프라인을 건설하고, 엄청난 분무기를 이용해 하루 종일 물을 뿌린다.
그 물을 받아 사막에서 푸른 풀이 고개를 내민다. 눈으로 보면 정말 신기하다. 그런데 그 광경을 보면서 계속 의문이 들었다. 풀은 자라는데, 체계적으로 물을 공급하고, 작물을 키워내는 것이 아니라 사막을 쥐어짜서 풀을 자라게 하는 것처럼 보였다. 단지 풀을 자라게 했을 뿐인데, 그 옆에는 벌써 도시를 세우고 있었다.
이 소감은 이집트의 정책 담당자로부터 구체적인 계획과 비전을 들은 것이 아니고 그저 눈으로 보고 느낀 것이기에 정확하지는 않다. 이집트 당국은 충분히 설득력 있는 계획을 세우고 단계적으로 추진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모르는 정책을 전제한다고 해도 이스라엘이 겨우 500㎜의 강수량과 작은 호수와 지하수의 수원으로 이룬 농업혁명에 비하면 이집트는 거대한 나일강의 물을 낭비하고 있거나 대단히 비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실제로 이집트가 이 사업을 추진하면서 함께 나일강을 이용해야 하는 주변국들, 특히 에티오피아와 군사적 충돌까지 야기할 수준으로 반목하고 있다. 수자원을 이용한 이 갈등은 조만간 전쟁으로 치달을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하다. 양국이 서로 이용하려는 수량이 아니라 기술과 효율로 접근한다면 어쩌면 쉽게 해결할 수 있고 더 놀라운 성과를 거둘 수도 있는데, 물량으로 도전하는 현재의 방법이 성과와 평화 모두를 놓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가 부조화, 불평등에 불만이 높다. 세계의 자원과 경제, 심지어 인력이 이제는 소외된 곳이 없을 정도로 글로벌 네트워크에 합류해서 작동한다. 전 세계 구석진 곳까지 경제성장이 작동하니 평균 소득이 상승해도 상대적인 격차도 커진다.
자원의 유무, 기술의 유무, 사회적 합의와 정체의 건전함, 모든 요소가 비교 대상이 되고, 부족한 요소, 차별적 요소에 대한 자각이 커진다. 문제는 자원의 불균형, 환경의 부조화는 지구의 태생적 한계라고 해도 그 자원을 이용하는 국가적 능력에서도 거대한 차이가 발생한다는 거다. 어떤 이들은 과거 역사를 들먹이며, 그 능력의 차이도 선진국, 약탈자들에 의해 조성된 것이라고 책임론을 들먹인다.
자연의 부조화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선한 환경이 환경적 부조화를 극복하는 힘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태고 시대의 자연도, 인류의 역사도 그렇다. 다만 부조화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인류는 악한 방법을 수없이 자행해 왔다. 동시에 악한 방법을 극복하려는 노력도 꾸준히 해왔다.
현대인들은 이해하기 힘들고, 선동가들은 어떻게든 부정하려고 하지만, 고대, 중세에도 그랬다. 단지 그 노력이 아직 진행형일 따름이고 과연 성공하는 날이 올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성공에 가까이 가려면 부조화의 종류와 내용을 아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물의 부조화가 주는 교훈도 그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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