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 해방의 굳건한 신념을 지닌 지성과 외교의 거장 [역사&오늘]

3월 4일, 존 퀸시 애덤스의 미국 제6대 대통령 취임

존 퀸시 애덤스. (출처: 조지 피터 알렉산더 힐리(1858),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1824년 3월 4일, 존 퀸시 애덤스가 미국의 제6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미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지성과 외교적 수완을 지닌 인물 중 한 명이다.

1767년 매사추세츠주 브레인트리에서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와 애비게일 애덤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외교 업무를 위한 유럽 출장을 따라다니며 가정 교육을 받았다. 이를 통해 뛰어난 언어 능력과 기록 능력을 키웠고,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한 후 법조계에 입문했다.

존 퀸시 애덤스는 1794년 네덜란드 주재 미국 공사를 시작으로 프로이센, 러시아, 영국 등 유럽 각지에서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1817년에는 제임스 먼로 대통령의 국무장관으로 임명되어 '먼로 독트린'의 기초를 다졌다. 이는 유럽 열강의 아메리카 대륙 간섭을 배제하고 미국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기조를 세운 것으로, 오늘날에도 미국 외교 노선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는 1824년 대통령 선거에서 앤드루 잭슨에게 승리해 제6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대통령 재임 기간에는 도로, 운하, 대학 건설 등 국가 발전을 위한 다양한 사업을 전개했다. 하지만 잭슨 지지자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재선에는 실패했다.

대통령 퇴임 후 그는 1831년부터 1848년까지 하원의원으로 활동하며 정치 경력을 이어갔다. 그는 노예 제도에 반대하고 전쟁 중 정부가 노예를 해방시킬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 최초의 의원 중 한 명이다. 영화 '아미스타드'에는 그가 아프리카에서 불법으로 잡혀 온 흑인 노예들의 석방을 위해 변호인단 측에서 활약했던 일화가 상세하게 묘사돼 있다.

존 퀸시 애덤스는 미국 최초의 부자(父子) 대통령이었으며, 지미 카터와 함께 대통령 퇴임 후 활발한 활동을 계속하며 존경을 받은 인물 중 하나로도 손꼽힌다. 특히 그의 노예 해방 주장은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노예 해방 선언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acenes@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