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시대, 민족의 염원을 담아낸 민족의 노래 [역사&오늘]
2월 20일, 안익태의 한국환상곡 아일랜드 더블린 초연
- 김정한 기자
(서울=뉴스1) 김정한 기자 = 1938년 2월 20일,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한 편의 음악이 세상에 첫선을 보였다. 작곡가 안익태의 '한국환상곡'은 웅장한 오케스트라의 선율 속에 민족의 아픔과 희망을 담아낸 역작으로, 초연 당시부터 뜨거운 감동과 함께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06년 평양에서 태어난 안익태는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음악가의 꿈을 키웠다. 일본에서 음악을 공부하던 그는 민족의 현실에 눈을 뜨고, 음악을 통해 항일 운동에 참여하고자 했다. '한국환상곡'은 이러한 그의 민족적 울분과 독립에 대한 염원을 담아 작곡된 곡이다.
'한국환상곡'은 1938년 2월 20일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안익태의 지휘로 아일랜드 방송 교향악단에 의해 초연됐다. 초연 당시 4악장으로 구성됐던 이 곡은 '아리랑', '천안삼거리' 등 한국 민요 선율을 담아 민족의 정서를 표현했으며, 마지막 악장에는 '애국가' 선율을 넣어 감동을 더했다.
초연 이후 안익태는 '한국환상곡'을 여러 차례 수정하며 완성도를 높여갔다. 1940년 일본의 압력으로 '코리아 판타지'라는 제목으로 연주되기도 했으나, 1946년 '한국환상곡'이라는 본래 이름으로 되돌려 연주하며 민족의 자긍심을 되찾았다.
'한국환상곡'은 이후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연주되며 한국을 알리는 데 기여했다. 특히 1958년 미국 할리우드에서 완성된 버전은 현재 우리가 듣는 '한국환상곡'의 최종 형태이며, 웅장한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의 조화가 돋보이는 명곡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2006년 그의 1943년 만주국 건국 10주년 축전 음악회를 지휘한 베를린 필하모닉 지휘 영상이 공개되면서 그에 대한 친일 행적 의혹이 불거지기도 했다. 이로 인해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등재됐다. 안익태기념재단 측은 "당시 본인 선택과 상관없이 국적을 잃은 안 선생은 일본인으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명했다.
acenes@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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