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바닷마을 다이어리'와 가마쿠라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 포스터. /사진=네이버 영화

(서울=뉴스1) 조성관 작가 = '바닷마을 다이어리'. 최근 10년 사이 내가 감동한 일본 영화 중 하나다. 세 자매가 배다른 여동생의 등장으로 잠시 혼란을 겪다가 가족애로 융합하는 과정이 바닷마을 가마쿠라를 배경으로 잔잔하게 펼쳐진다.

그런데 이상하게 나는 이 가족영화를 만든 감독의 이름이 입에 붙지 않았다. 책에 이름을 써놓고도 외우진 못했다. 주인공 아야세 하루카의 서글서글한 눈빛에 빠져서일까. 또 다른 가족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찍은 감독인데도 말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是枝裕和) 감독. 내가 고레에다를 확실하게 기억하게 된 것은 헤르만 헤세(1877~1962)로 인해서다. 지니어스 테이블에서 '헤르만 헤세 강연'을 준비하던 중 그의 이름이 툭 튀어나왔다. 고레에다 감독은 자타가 공인하는 '헤세 팔로워'였다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랬다. 헤세의 대표작들이 모두 인간의 영적 성장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고레에다 감독의 작품들과 맥이 닿아 있었다.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다시 봐야지 하면서 머릿속으로 여러 장면을 회상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슬램덩크'의 바람이 훅 불어왔다. 1990년대에 히트한 만화 '슬램덩크'. 최근 개봉한 '더 퍼스트 슬램덩크'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에서 큰 인기를 끌면서 '슬램덩크'의 무대가 다시 주목받았다. 이제, 가마쿠라 이야기를 한번 쓸 때가 되었구나.

'슬램덩크'의 성공은 '콘고지신'이라는 신조어를 탄생시켰다. 콘텐츠(Contents)+온고지신(溫故知新)의 합성어다. 20~30년 전 유행한 콘텐츠가 새로운 형식으로 변주되어 인기몰이를 하는 현상을 아우르는 용어다. 콘고지신을 뒷받침하는 콘텐츠로는 '포켓몬', '마시마로', '베르사유의 장미' 등이 있다.

가마쿠라 고교 앞 역 건널목. /사진=조성관 작가

'슬램덩크'로 인해 유명해진 장소가 가마쿠라 고코 마에(鎌倉 高校 前)역 건널목이다. 우리말로 풀어 쓰면 '가마쿠라 고교 앞'역. 기차에서 내려 역사를 빠져나가면 바로 나오는 건널목이다.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건널목 중 하나가 아닐까. '슬램덩크' 팬들은 만화 시리즈로 이 건널목을 알았지만 나는 '바닷마을 다이어리'를 통해 이곳을 접했다.

'도쿄가 사랑한 천재들'을 취재하면서 나는 이 건널목을 가보았다. 구로사와 아키라(1910~1998) 감독이 잠든 곳이 가마쿠라의 아뇨인(安養院) 사찰 묘지. 미국영화를 무섭게 연구해 마침내 할리우드를 뛰어넘은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

자료 조사를 하다 보니 구로사와 감독의 묘지가 도쿄에 없었다. 도쿄에서 나서 도쿄에서 주로 활동한 영화감독 묘지가 왜 가마쿠라에 있는 거야. 처음엔 짜증이 났다. 한 사람의 생애가 완결되는 곳이 묘지다. 묘지는 천재 연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생각이 바뀌어 가마쿠라에 안식처를 마련한 구로사와 감독에 감사하게 되었다.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무대가 가마쿠라였기 때문이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묘비. /사진=조성관 작가

태평양과 나란히 달리는 에노덴 열차

가마쿠라는 가나가와현(縣)의 도시. 가마쿠라 여행은 열차를 타는 게 최상이다. 도쿄 신주쿠역 오다큐(小田急)선 창구에서 가마쿠라 왕복 티켓을 판다. 가마쿠라까지는 직행이 없어 후지사와(藤澤)역에서 열차를 바꿔 탄다. 신주쿠역에서 후지사와역까지 걸리는 시간은 50분.

후지사와역에서 내려 역사를 나와 에노덴(Enoden) 선으로 환승한다. '에노시마 전철선'의 줄임말이다. 에노덴 선의 출발역이 후지사와역이고, 종점이 가마쿠라역이다.

내 인생에서 가마쿠라가 최초로 들어온 것은 역사 시간이었다. '일본 최초의 무사 정권이 가마쿠라 막부였으며, 140여년간 일본을 통치했다.' 고려를 침탈한 몽골군은 섬나라 일본을 탐냈다. 고려군을 앞세운 '여몽연합군'의 두 차례 일본 원정(1274년·1281년)이 모두 가마쿠라 막부 시대에 벌어졌다.

몽골군의 일본 원정은 때마침 불어온 태풍으로 인해 실패로 끝났다. 일본은 그 고마운 태풍을 가미카제(神風)라 불렀다. 일본은 태풍의 도움으로 간신히 정복당하는 것을 면했지만 전쟁의 후유증으로 가마쿠라 막부 정권도 붕괴되었다. 두 번째 막부 정권이 교토에서 출범한 무로마치 막부다. 나는 최초의 막부 정권이 존속했던 가마쿠라가 어떤 곳인지 궁금했었다.

'도쿄가 사랑한 천재들'에 들어가는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1867~1916)도 가마쿠라와 인연이 있었다. 도쿄에서 영어교사를 하던 나쓰메가 폐결핵 진단을 받고 요양을 한 곳이 가마쿠라의 엔카쿠지(圓覺寺)였다.

가마쿠라-후지사와를 왕복 운행하는 에노덴 열차. /사진=조성관 작가

그러나 나쓰메가 요양한 사찰이 가마쿠라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가마쿠라행(行)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구로사와의 만년유택(萬年幽宅)이 가마쿠라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쾌재를 불렀다. 구로사와를 만나러 가는 길에 '바닷마을 다이어리'와 가마쿠라 막부의 현장도 확인하면 그야말로 일석삼조 아닌가.

가마쿠라 여행의 백미는 에노덴 열차에서 보는 풍광이다. 보통 3~4량으로 운행되는 열차는 주택가 사이로 난 철길을 조심스럽게 달린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바다가 짠하고 나타난다. 이때 에노덴 열차를 처음 타본 사람은 탄성을 지른다. 바다의 윤슬이 차창 너머로 한가득 들어온다. 태평양이다.

에노덴 열차는 그렇게 바다와 손을 잡고 20여분을 달린다.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도 에노덴 열차가 해안선을 따라 곡선을 그으며 미끄러져가는 장면이 나온다. 누구나 저길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여행객들이 가마쿠라 역에 앞서 우르르 내리는 곳이 '가마쿠라 코코 마에' 역이다.

여행객들은 건널목에서 숨죽인다. 가마쿠라 역을 출발한 기차가 역사 플랫폼으로 진입하는 순간을 기다린다. 그리고 열차가 건널목 철로를 지나가는 그 2~3초의 순간을 동영상으로 담는다. 마치 오페라극장의 검은색 막이 확 열리면서 화려한 무대가 순식간에 눈앞에 등장하는 것 같은 경이로움이 눈앞에서 펼쳐진다. 이어 차단봉이 올라가면 사람들은 건널목을 우르르 건넌다.

가마쿠라의 별미 멸치덮밥. /사진=조성관 작가

가마쿠라의 별미 '멸치덮밥'

고레에다 감독은 헤세에게서 내러티브를 배웠고, 헤세는 융(Jung)의 정신분석 치료법을 소설에 녹였다. 어떤 영화가 긴 여운을 남기려면 음식 이야기가 들어가야 한다. 역사와 사찰과 풍광을 제외하고 가마쿠라를 유명하게 만든 게 멸치덮밥이다. 바다에서 잡은 잔멸치를 뜨거운 물에 살짝 데친 다음 물기를 말려 밥에 올려 먹는 것이다. 여기에 달걀노른자를 얹어 비벼 먹는다.

영화에서 멸치덮밥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자매들에게 정체성 융합의 매개로 등장하는 게 멸치덮밥이다. 네 자매는 멸치덮밥과 얽힌 추억을 하나씩 꺼내면서 서로의 상처를 쓰다듬고 사랑으로 하나가 된다.

멸치덮밥은 가마쿠라 여행의 필수코스다. 구글앱을 따라 고마치(小町)의 허름한 골목길로 들어섰다. 식당 앞에는 이미 10여명이 줄을 서고 있었다. 40분을 기다려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부부 두 사람이 운영하는 식당은 모든 게 소박했다. 테이블은 8~10개 정도. 드디어 멸치덮밥이 나왔다. 비주얼은 너무나 평범했다. 슥슥 비볐다. 한입 먹었다. 순간, 입안에서 불꽃이 터졌다. 세상에 이런 맛도 있었구나. 또다른 맛의 신세계가 열렸다. 나도 모르게 속으로 외쳤다.

"아리가토~구로사와."

author@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