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이화여대 ECC와 도미니크 페로
(서울=뉴스1) 조성관 작가 = 프랑스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Dominique Perrault).
'세계인문여행' 연재를 시작하면서 수첩에 이 프랑스 건축가이자 도시계획가의 이름을 적어놓았다. 언젠가 적당한 기회가 되면 한번 써봐야지. 하지만 그 적절한 계기가 찾아오지 않은 채 2019년이 지났다.
뜻밖에도, 페이스북이 그 연결고리를 선물해 주었다. 나는 페이스북에서 많은 아이디어를 얻곤 한다. 여러 분야에 종사하는 전문가들의 게시물을 읽다 보면 새로운 관점과 지혜를 배울 때가 많다. 때때로 게시물 속에는 글감이 다이아몬드 원석(原石)처럼 번쩍거릴 때도 있다. 페이스북이 집단지성의 네트워크를 가능하게 했다.
페이스북 초기 화면에는 새롭게 친구가 된 사람 6명의 이미지가 뜬다. 2020년 1월 어느 날, 친구 란에 두 명의 새로운 페이스북 친구가 같은 배경 사진을 올렸다.
'어, 이게 뭐지!'
서울에 있는 도미니크 페로의 설계작품 앞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한 사람은 학생들과 찍은 단체 사진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독사진이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같은 건축물을 배경으로 찍은 프로필(소개) 사진으로 올린 것을 보면서 '쿵' 하는 느낌이 왔다. 영감은 언제나 그렇듯 예기치 못한 곳에서 점화(點火)된다. 이젠 도미니크 페로(1953~) 이야기를 쓸 때가 되었구나.
도미니크 페로의 작품이란, 이화여대 캠퍼스복합단지(ECC)를 말한다. ECC에는 강연장, 영화관을 비롯해 없는 게 없다. 나는 이화여대 ECC를 여러 번 이용한 경험이 있다. 이곳에서 강연도 했고, 차를 마시고 밥도 먹었다. 앞으로도 이화여대 ECC에서 약속이 생기면 기꺼이 갈 것이다.
프랑스국립도서관 설계자
ECC를 갈 때마다 여러 가지를 느끼곤 한다. ECC는 '빛의 계곡'으로 불린다. 햇빛의 흐름에 따라 시시각각 ECC는 다른 표정을 짓는다. 빛의 계곡에는 언제나 사유의 계곡풍(風)이 분다.
뛰어난 건축가 한 사람이 공간을 이렇게도 바꿀 수 있구나. 그 바뀐 공간이 지금 사람의 행동과 생각을 다른 차원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창조와 혁신이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말한다.
나는 ECC가 들어서기 전의 이화여대 캠퍼스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화여대는 정문을 들어서자마자 언덕이 시작된다. 왼쪽 10시 방향으로 대강당이 있고, 오른쪽 3시 방향에 텅 빈 운동장이 덩그러니 있었다. 아주 가끔 찾는 외부인의 눈에도 쓰임새가 없는 운동장이었다. 가뜩이나 비좁은 캠퍼스 안에서 펑펑 놀고 있는 운동장을 보면서 학교 관계자들은 고민이 깊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공간 활용을 극대화할 수 있을까.
ECC는 2005년에 공사를 시작해서 2008년에 준공했다. 신인령 총장 재직 시절(2002~2006)이다. 아무리 좋은 설계안이 뽑혀도 최종 결정권자가 'No'하면 소용없는 일이다. 혁신적인 설계안을 좋은 설계안으로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선입견 없는 마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것은 건축주가 인문적 소양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최악의 건축물'로 평가받는 서울시청 청사가 그런 의사결정의 표본이다. 신인령 총장은 서울에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남긴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올해는 ECC가 태어난 지 12년이 된다. 훌륭한 건축물은 아름다운 그림을 보는 것처럼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만든다. ECC는 좋은 건축물을 평가하는 기준인 장소성, 시대성, 합목적성 3가지 요소를 모두 충족한다. ECC는 2008년 서울시건축대상을 받았고, 2010년 프랑스건축가협회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우리가 아는 것 이상으로 세계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도미니크 페로의 작품은 한국, 일본, 스페인 등 전 세계에 골고루 퍼져 있지만 아무래도 건축가의 모국인 프랑스에 가장 많다. 프랑스 파리에 가면 페로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을 만날 수 있다.
프랑스국립도서관(BnF)이다. 14년간 프랑스 대통령을 지낸 프랑수아 미테랑(1916~1996)은 문화 강국 프랑스를 알리기 위해 건축을 앞세운 '그랑 프로제'(Grand project)를 추진했다. 유리 피라미드, 라데팡스, BnF가 이 시기에 세상 빛을 봤다.
1461년에 문을 연 프랑스국립도서관은 도심 한가운데 있었다. 공간이 비좁고 시설이 낡아 자료 보존이 어렵고 이용자들의 불만이 많아지자 미테랑 대통령이 16구, 센강 옆으로 신축 이전하기로 했다.
도서관의 주인공은 책과 자료다. 1989년 페로의 설계안이 프랑스국립도서관 설계 공모전에서 당선작으로 뽑혔다. 미테랑 대통령은 서른여섯 살 건축가 페로의 설계안을 최종 낙점했다. 페로의 설계안은 책 네 권을 세워놓은 것 같은 건물 4개동(棟)과 그 가운데에 중정(中庭)을 두는 구조다. 건물 4개동은 지하로 연결된다. 멀리서 보여도 한눈에 도서관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BnF는 미테랑 대통령이 퇴임 1년 전인 1995년 준공되었다. 페로가 마흔세 살 때다. BnF에 들어서는 것은 곧 활자가 되어 책갈피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흡사하다. BNF는 '건축가 페로'를 세계에 알린 출세작이다.
세계지성의 보고(寶庫)인 프랑스국립도서관을 설계한 건축가가 꼭 10년 뒤에 여성인재의 산실(産室) 이화여대 ECC를 설계했다는 것은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운명적이다.
페로는 1978년 파리 보자르고등국립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했고, 1980년에는 고등사회과학대학원에서 역사학을 공부했다. 건축가로서 그가 사숙(私塾)한 인물은 바우하우스의 마지막 교장인 건축가 '루트비히 미스 반데어로에'였다.
우리는 미스 반데어로에를 '세계인문여행 이케아와 바우하우스'편에서 잠깐 만난 적이 있다. 페로는 1996년 '미스 반데어로에 재단'이 주는 '미스 반데어로에' 상을 받기도 했으며, 2010년 프랑스 아카데미 건축 부문 금상을 수상했다.
BnF에 들어가면 누구나 BnF 건립 역사를 보여주는 기록 사진들을 만나게 된다. 이 기록 사진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준공식 날 페로가 미테랑 대통령과 어깨를 맞대고 나란히 입장하는 사진이다. 그 뒤를 국립도서관장, 파리시장, 문화부장관 등이 뒤따른다.
ECC는 건축물이 아니다 !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은 건축가 류춘수가 설계한 것이다. 기능성과 건축미학에서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다는 평가를 받는 축구전용 경기장이다. 2002 한일월드컵 개막식날 김대중 대통령은 축사에서 설계자 류춘수의 이름을 거명하지 않았다. 선진 일류국가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 뒤에도 이런 상식 이하의 일은 반복되었다. 2010년 10월 서울 남산의 안중근의사 기념관 개관식에도 설계자인 임영환·김선현씨의 자리는 아예 마련되지 않았다. 권력 서열대로 자리가 배열되었다. 물론 개관식 행사에서도 두 건축가 이름은 호명(呼名)되지 않았다.
2016년 개관한 제주도립김창렬미술관은 현상공모로 건축가 홍재승이 설계안으로 지어졌다. 건축가 홍재승이 개관식 날 잘 차려입고 왔지만 아무도 그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소개도 하지 않았다. 이 개관식에 참석한 지인은 "동네 이장은 소개하는데 설계자는 끝내 소개하지 않는 걸 보고 완전 뚜껑이 열렸다"고 말했다. 이 미술관 홈페이지에도 설계자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페로는 BnF 공사와 관련, 2016년 조선일보 김미리 기자와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미테랑은 현장 감독 같았어요. 스무 번 넘게 공사장을 다녀갔지요. 감시가 아니라 관심이었어요. 격의 없이 우리 사무실에 들렀답니다. 부탁은 딱 하나. 임기 끝나기 전에 완공해달라는 거였죠.(웃음) 미테랑은 건축가의 대통령이자 문화 건설자였어요."
페로는 2015년 11월, 올랑드 대통령이 방한했을 때 대통령과 함께 ECC를 찾은 적도 있다. 올랑드는 대통령 시절 페로의 사무실을 직접 찾아와 '시테섬' 재정비를 구상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이화여대에 가면 ECC를 감상하러 온 외부인들을 많이 보게 된다. 외국인들도 많다. ECC는 이미 이화여대를 벗어나 서울을 대표하는 건축물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구겐하임 미술관이 등장한 이후 뉴욕의 표정이 바뀐 것처럼 이화여대 ECC는 서울의 표정을 바꿔놓았다. 서울의 건축은 ECC 전과 후로 나뉜다. ECC는 건축이 아니다. 철학이다.
author@naver.com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