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선 언제부터 양복을 입게 됐을까
- 박창욱 기자

(서울=뉴스1) 박창욱 기자 = 우리나라에선 언제부터 양복을 입게 됐을까. 고종이 1895년 ‘육군복장규칙’을 공표한 시점을 그 시초로 본다. 이후 1900년 공표된 ‘문관복장규칙’으로 관리의 복장이 서양식으로 완전히 바뀌면서 양복 보급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벼슬아치들의 공식 복장은 '사모 관대'였다. 사모를 쓰고 단령포에 띠를 두르는 사모관대 복식은 일반 백성들은 혼례날에만 허락됐다. 벼슬아치의 양복 복장은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장이 소장한 독립운동가 동농(東農) 김가진(1846~1922) 선생의 사진에도 잘 나타나 있다. 군국기무처회의원 등을 지낸 김 선생이 입은 대한제국 대례복은 화려한 장식이 된 턱시도에 깃털이 달린 이각모로 이뤄져 있다.
양복은 근대기를 거쳐 120여년 시간이 흐르면서 현재 일상화된 정장(正裝)으로 정착했다. 우리나라의 100년이 넘은 양복사와 섬유도시 대구 지역의 양복점 및 양복기술자인 '테일러'(tailor)를 주제로 한 전시가 열린다.
국립민속박물관(관장 천진기)은 대구경북섬유산업연합회(회장 이의열)과 함께 오는 2일부터 2017년 3월12일까지 대구 동구 팔공로 DTC섬유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공동기획전 ‘100년의 테일러, 그리고 대구’전을 개최한다. 이 전시에는 대한제국의 ‘대례복(大禮服)’, 일제강점기의 ‘연미복’, 1960년대 생산된 국산 양복지 ’골덴텍스(goldentex)‘ 등 양복의 도입에서부터 정착까지의 변화 과정을 보여주는 전시자료 150여 점이 선보인다.
전시의 제1부 '양복의 도입’에서는 양복 도입의 계기가 된 ‘육군복장규칙’(1895) 및 ‘문관복장규칙’(1900)의 의미와 이로 인해 새롭게 바뀐 정부 관료의 문무복(文武服)을 소개하고 있다. 조선시대 관리들의 집무복인 단령(團領)에서 서양식 복식으로의 변화를 보여주는 ‘민영휘 초상화’ ‘이용익 초상화’ 등과 함께 ‘대한제국 대례복’ 등의 자료를 대한제국 법령집 ‘법규유편’(法規類編)의 실제 도판과 비교‧관찰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제2부-테일러의 등장과 성장’에서는 양복점과 새롭게 등장한 직업인 양복 기술자 테일러(tailor)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서양식 의복의 수요 증가에 따라 함께 늘어난 양복점에는 조선인 직공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들이 훗날 테일러로 독립하여 우리나라 양복산업의 발전을 이끌게 된다.
각종 문헌과 신문 등 다양한 자료를 통해 당시 테일러의 활동 및 양복 산업의 성장과 변화 방향을 가늠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양복점인 ‘종로양복점’(1916년 개업)의 외관을 재현하고 제작된 양복들을 함께 전시함으로써 테일러라는 직업과 양복의 역사를 소개한다.
아울러 ‘제3부-대구의 테일러’에는 대구 양복점 거리의 테일러들의 이야기를 통해 광복 이후 대구 지역 양복의 역사를 조망할 수 있도록 하였다. 대구 양복의 중흥기를 이끌었던 테일러들의 인터뷰와 함께 ‘재봉틀’ ‘재단가위’ ‘재단자’ 등 실제 사용했던 도구를 기반으로 작업장을 재현했다.
또 ‘골덴텍스’ ‘킹텍스(kingtex)’ 등 광복 이후 생산된 국산 양복지 및 관련 자료와 ‘주문약정서’ ‘양복상품권’ 등 다양한 영업 방식을 보여주는 자료들을 전시하여 대구지역 맞춤 양복 제작업의 발자취를 짚어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대구는 최초로 국산 양복지가 생산된 곳이자 큰 불이 난 서문시장을 통한 활발한 유통을 바탕으로 우리나라의 양복 대중화에 큰 역할을 한 지역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은 "이번 전시는 특히 학술조사 사업의 결과물인 조사보고서 '100년의 테일러'(2015년 발간)를 기반으로 하고 있어 국립박물관이 지역박물관과 자료를 공유하고 협업을 통해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공동사업의 좋은 예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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