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엔 원래 '온기'가 있었다"…루이지노 브루니가 꺼낸 시민경제

[신간] '시장은 원래 차갑지 않았다'…필리아와 아가페로 읽는 시장의 역사

[신간] '시장은 원래 차갑지 않았다'

(서울=뉴스1) 박정환 문화전문기자 = 시장은 정말 냉혹한 약육강식의 전쟁터일까? 효율과 이윤만을 쫓는 현대 경제학의 그늘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손'이 지배하는 익명의 거래 공간이 되기 전, 시장이 본래 우애와 상호 부조의 온기 위에서 태동했다는 놀라운 통찰을 담은 경제 사상사 '시장은 원래 차갑지 않았다'가 출간됐다.

'시장은 원래 차갑지 않았다'는 시장이 본래 냉혹한 거래의 장이 아니라 우애와 상호성의 온기 위에서 태동했다고 말하는 시민경제학 입문서다. 저자는 중세부터 현대까지 1000년의 역사를 더듬으며 애덤 스미스 이후 지워진 시장의 '인간적 얼굴'을 다시 불러낸다.

책은 시장을 단순한 이익 교환의 공간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서로를 믿고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시장이 자라났다고 본다. 계산과 효율만으로는 시장이 오래 유지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이 출발점이다.

브루니가 겨누는 핵심은 근대 주류 경제학이 지운 '관계'와 '감정'이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시장을 익명의 거래 공간으로 만들면서 풍요는 커졌지만, 그 안의 인간은 오히려 고립되고 공동체적 유대는 파편화됐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시장 안에서 불행을 느끼는 이유를 바로 이 '관계의 상실'에서 찾는다.

■ '필리아'와 '아가페'… 계약 이전에 '존재'가 있었다

책은 시장의 기원을 다시 묻는 데서 논의를 밀고 나간다. 애덤 스미스가 물물교환을 시장의 출발로 봤다면, 브루니는 현대 인류학 연구를 바탕으로 인류 최초의 교환이 증여, 곧 선물의 주고받기였다고 짚는다. 시장은 낯선 사람과도 교류하게 한 계약 제도를 거치며 서서히 진화한 결과라는 설명이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필리아'와 '아가페'를 중요한 개념으로 끌어온다. '필리아'는 동료 사이의 우정이고, '아가페'는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이다. 차가운 계약 이전에 서로를 존재로 인정하는 관계가 시장의 바탕이었다는 것이 이 책의 주장이다.

구성은 사상사와 경제사를 오가며 짜였다. 고대 공동체의 위계와 비극,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 그리스도교의 아가페, 프란치스코회 운동, 홉스와 스미스, 나폴리 시민경제 전통까지 큰 흐름이 이어진다. 시장을 둘러싼 사유가 어떻게 공동체와 개인, 신뢰와 계약, 덕과 보상 문제로 뻗어갔는지를 장별로 따라가게 만든다.

■ 나폴리 시민경제의 부활… "시장은 상호 부조의 장"

특히 18세기 나폴리의 시민경제 전통을 복원하는 대목이 책의 중심축으로 놓인다. 브루니는 안토니오 제노베시와 자친토 드라고네티를 통해 시장을 이기적 교환의 장이 아니라 상호부조와 공적 신뢰가 생산되는 공간으로 다시 읽는다. '우리는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제노베시의 문장이 이 문제의식을 압축한다.

책은 시장이 덕을 지울 뿐 아니라 덕을 기를 수도 있다고 본다. 상업은 시민 덕성을 계발하고 보상할 기회이며, 거래는 모두의 선에 기여하는 공적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장은 비인간화된 이익 추구의 장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상호성이 작동하는 시민사회의 일부로 재해석된다.

결국 브루니가 내놓는 대안은 단순한 시장 비판이 아니다. 스미스의 이익 원리, 필리아라는 시민적 우정, 보답을 바라지 않는 아가페가 함께 공존하는 다원적 균형의 시장을 상상하자는 제안이다. '시장은 원래 차갑지 않았다'는 경제학 책이면서 동시에 사람과 관계를 다시 묻는 인문학 책이다.

△ 시장은 원래 차갑지 않았다/ 루이지노 브루니 지음/ 이가람·강영선·손현주·이은주·이준범·천세학·최석균 옮김/ 북돋움coop/ 4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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