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RI, '과제 따기' 연구 벗어난다…2030년 국가 임무형 R&D 90%로

박세웅 원장 기자간담회…AI 등 5대 분야에 연구역량 집중
"ETRI, 최고의 연구자·기술·기업 모이는 플랫폼으로"

박세웅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원장.

(서울=뉴스1) 나연준 기자 =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 국가가 필요로 하는 연구에 집중하는 '국가 임무형 연구기관'으로 전환한다. 현재 22% 수준인 임무형 연구 비중을 2030년까지 90%로 끌어올리고 인공지능(AI)·피지컬 AI 등 5대 분야에 연구역량을 집중한다.

박세웅 ETRI 원장은 30일 취임 후 첫 기자간담회를 열고 이 같은 내용의 연구·경영 혁신 구상을 밝혔다.

박 원장은 "AI를 중심으로 기술 패러다임이 빠르게 바뀌고 PBS 폐지 등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연구환경에도 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며 "지금은 ETRI가 새로운 연구체계를 만들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ETRI는 PBS(연구과제중심제도) 폐지를 국가대표 정보통신기술(ICT) 연구기관으로 재도약할 기회로 삼겠다는 구상이다. 기존 경쟁적 수탁과제 중심의 연구사업 구조를 기관 고유 임무와 국가 전략임무를 중심으로 한 '임무형 R&D 체계'로 전환한다.

현재 22% 수준인 임무형 연구 비중을 2030년까지 90% 수준으로 확대한다. 경쟁형 수탁 연구는 중요·필수 정부 수탁사업 등을 중심으로 대폭 조정한다. 출연금 인건비 비중도 단계적으로 높여 연구자가 과제 확보 경쟁 대신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한다.

박 원장은 "그동안 출연연 연구자들이 과제를 따기 위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써야 했다면 앞으로는 '어떤 과제를 따올 것인가'가 아니라 '국가가 ETRI에 맡긴 임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설한 전략연구기획단을 중심으로 연구부서 간 칸막이를 낮추고 국가 임무 중심의 대형 연구과제도 발굴한다. 국가 전략기술뿐 아니라 사회 난제와 지역 균형성장, 글로벌 협력, 출연연 융합 등으로 연구 기획 범위를 넓힌다.

연구 분야는 선택과 집중에 나선다. ETRI는 △AI △피지컬 AI △입체통신 △공간결합 △AI 디지털전환(ADX) 등 5대 분야를 중심으로 전략집중형 R&D 체계를 구축한다.

AI 분야에서는 멀티모달 파운데이션 모델과 AI 코사이언티스트(Co-Scientist), AI와 무선접속망(RAN)·6G를 결합한 'AI 고속도로', 로봇 파운데이션 모델(RFM)을 활용한 피지컬 AI 로봇지능 등을 핵심 연구 분야로 육성한다.

AI 연구를 뒷받침할 컴퓨팅 인프라도 확대한다. 원내 그래픽처리장치(GPU) 프라이빗 클라우드를 확충하고 출연연 간 GPU 공동 활용 기반을 마련한다. 국가 초고성능 컴퓨팅 전문센터 지정도 추진한다.

박 원장은 "모든 것을 조금씩 잘하는 연구기관보다는 국가가 반드시 필요로 하는 분야에서 'ETRI가 아니면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는 독보적인 코어 기술, 이른바 '필살기'를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연구자가 연구에 몰입할 수 있도록 조직 운영 방식도 손본다. 조직과 분야의 경계를 넘어 연구하는 '경계 없는 플레이어'를 육성하고 선정된 연구자는 연구 시간의 80%를 자율·몰입 연구에 사용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불필요한 행정과 형식적인 연구 활동을 덜어내는 '디톡스'(Detox)와 연구자에게 활력을 주는 지원책을 발굴하는 '비타민'(Vitamin) 정책도 추진한다. 특허와 학술 활동 역시 단순 건수보다 질적 성과를 중심으로 평가한다.

2030년까지 국내 탑티어 논문 가운데 ETRI 연구 성과가 차지하는 비중을 20% 수준까지 높인다는 목표도 세웠다. 고부가가치 지식재산권(IP)을 집중 육성하고 기술 스케일업과 창업 일체형 R&D 등을 통해 연구 결과의 사업화도 강화한다.

대학·기업·다른 출연연과의 개방형 연구도 확대한다. AI·통신 분야 외부 전문가를 특임고문으로 활용하고 우수 대학교수의 안식년 방문연구, 학생 연구자 참여와 해외 연구기관 파견 공동연구 등을 추진한다. 글로벌 빅테크와 선행 공동연구도 확대할 계획이다.

박 원장은 "AI와 피지컬 AI 시대의 연구는 어느 한 연구기관이 모든 것을 독자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며 "ETRI가 모든 것을 소유하는 연구기관이 아니라 최고의 연구자와 기술, 기업이 모이는 플랫폼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TDX, DRAM, CDMA와 같은 국가적 성과를 만들어낸 ETRI의 DNA를 AI 시대에 다시 깨워야 한다"며 "단기적인 성과나 과제 수주에 매몰되지 않고 10년, 20년 뒤 대한민국이 필요로 할 기술을 먼저 준비하는 연구원이 되겠다"고 강조했다.

yjra@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