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AI 파도 위에서 K-콘텐츠의 항해술을 묻는다

김영근 세명대 미디어콘텐츠창작학과 교수 = K-콘텐츠는 이제 명실상부한 글로벌 문화 현상으로 자리매김했다. 지난 10여년간 이룬 눈부신 성과는 정부의 시의적절한 지원과 창작자들의 끊임없는 노력이 어우러진 결과물이다. 그러나 현재의 성공에 안주하기에는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너무나도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생성형 인공지능(Generative AI) 기술은 콘텐츠의 기획, 제작, 유통, 소비의 모든 단계를 근본적으로 재편하고 있다. 이는 지난 100년간 이어져 온 미디어 산업의 문법을 새로 쓰는 '문명사적 전환'에 가깝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은 이미 천문학적인 자본을 투입해 AI 기반 콘텐츠 제작 생태계를 선점하고 있다. 오픈(Open)AI의 'Sora'가 보여준 영상 생성 기술의 충격, 어도비(Adobe)의 'Firefly'가 제시하는 창작의 미래는 자고 나니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것을 현실로 보여줬다. 이러한 상황에서 K-콘텐츠가 현재의 글로벌 리더십을 유지하고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는 AI 시대에 최적화된 새로운 정책적 나침반이 절실히 필요하다.
필자가 현업에 있을 때만 해도 콘텐츠 제작은 숙련된 장인들의 노동집약적 산물이었다. 특히 애니메이션 분야는 프레임 단위로 쏟아붓는 인력과 시간이 곧 경쟁력이자 한계였다. 하지만 AI는 이 모든 전제를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 이제 AI는 단순한 효율화 도구를 넘어 기획부터 작화, 편집에 이르기까지 창작의 지형 자체를 바꾸는 '지각변동'을 일으키고 있다.
AI 기술은 콘텐츠 제작의 물리적, 시간적 제약을 허물고 있다. 생산 방식의 패러다임이 '노동 집약'에서 '기술·창의력 집약'으로 전환하고 있다. 과거 수백 명의 아티스트가 몇 년에 걸쳐 완성하던 애니메이션이나 특수효과를 이제는 소수의 인력이 AI의 도움을 받아 단기간에 구현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다.
세계가 열광하는 K-웹툰, K-웹소설이라는 무궁무진한 이야기의 원천에 AI라는 기술의 날개를 달아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와 효율로 글로벌 시장을 공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단순히 '가성비'의 문제가 아니다. 원작의 독창적인 세계관을 AI 기술로 더욱 풍부하게 구현하며 완전히 새로운 영상 미학을 창조할 가능성이 열렸다는 뜻이다.
문제는 우리의 정책적 상상력이 이 기술의 속도를 따라잡고 있느냐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현재의 지원 정책은 여전히 과거의 관성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우리는 여전히 탐스러운 '열매'(콘텐츠)를 맺는 것에만 집중한 나머지 그 열매를 맺게 하는 '토양'(기술 생태계)을 다지는 일에는 소홀하지 않은가를 짚어 봐야 한다.
콘텐츠 지원사업에서 AI 기술을 단순히 가점 항목으로 취급하거나, 완성된 작품의 수출 실적만을 기준으로 정책의 성공을 재단하는 방식으로는 다가오는 AI 시대의 주도권을 쥘 수 없다. 해외의 거대 기술 기업들이 AI 설루션으로 시장을 장악해 갈 때 우리는 그들의 기술에 종속된 채 비싼 사용료를 내며 콘텐츠를 만들어야 하는 '기술 소작농'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이제 정책의 패러다임을 과감히 전환해야 한다. 몇 가지 방향을 제언하고자 한다.
첫째, '콘텐츠 지원'과 함께 'AI 기술 생태계 육성'이 균형을 이뤄야 한다. 즉 콘텐츠 제작의 기반이 되는 AI 설루션 개발 기업에 대한 R&D 지원을 대폭 확대해야 한다. 이는 대한민국 콘텐츠 산업 전체의 생산성을 높이고, 우리만의 독창적인 영상미를 구현할 기술 주권을 확보하는 길이다.
둘째, 'AI 기반 제작'을 선택이 아닌 필수로 인식해야 한다. 'AI 기반 제작'을 별도의 주요 지원 트랙으로 격상하고, 예산과 규모를 확대해야 한다. 특히 새로운 기술을 실험하고 제작 파이프라인을 구축하는 '기술 실증' 프로젝트를 과감히 지원해 창작자들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마음껏 도전할 수 있는 판을 깔아줘야 한다.
셋째, '제품 수출'을 넘어 '시스템 수출'을 지원해야 한다. 완성된 콘텐츠 한 편을 수출하는 것을 넘어 AI 기술 기반의 제작 플랫폼이나 서비스가 해외 시장에 직접 진출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를 위해 초기 기술 검증(PoC) 비용이나 글로벌 플랫폼 개발비 지원 같은 '기술 현지화'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 이는 K-콘텐츠가 일회성 상품이 아닌, 지속 가능한 서비스로 세계 시장에 뿌리내리게 하는 전략이다.
기술(Tech)과 창의력(Creativity)이 서로를 이끌고 밀어주는 선순환 생태계가 구축될 때 대한민국은 AI 시대의 글로벌 콘텐츠 시장을 선도하는 진정한 '문화 강국'이자 '기술 강국’으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
AI라는 파도를 피할 수 없다면, 그 파도에 올라타 가장 먼저 대양으로 나아가는 자가 미래의 승자가 될 것이다. K-콘텐츠가 콘텐츠산업 강국을 꿈꾸는 이재명 정부에서 세계를 향해 위대한 항해를 시작해야 한다. 지난 20년간 쌓아온 스토리텔링의 힘 위에 AI라는 기술의 돛을 올리면 가능한 일이다. 정책 당국의 대담하고 미래지향적인 결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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