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이틀 새 8조원대 AI 투자…이재용 '투자 시계' 빨라진다

美 AI 인프라 기업 '헬릭스'에 10억달러·AI 기판 6.8조원 역대급 투자
공조 분야 미래 먹거리 조준…AI 시대 주도권 확보 초대형 투자도 염두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서초사옥 ⓒ 뉴스1 DB

(서울=뉴스1) 박기호 기자 = 삼성이 이틀 동안 8조 원을 웃도는 투자 계획을 잇달아 내놓으며 인공지능(AI) 산업의 주도권 확보에 속도를 내고 있다. 미국 AI 인프라 플랫폼에 투자해 데이터센터 생태계로 사업 영역을 넓히는 동시에 AI 서버용 반도체 기판 생산능력을 대폭 확대하기로 했다.

헬릭스 디지털 인프라스트럭처(헬릭스) 투자가 데이터센터와 전력·냉각 등 AI 인프라 생태계에 진입하기 위한 전략적 투자라면 삼성전기의 증설은 글로벌 고객사의 중장기 물량에 대응하는 생산 투자다. 성격은 다르지만 AI 산업의 성장 과실을 반도체와 부품, 인프라 전반에서 확보하려는 삼성의 투자 방향을 보여준다는 평가다.

재계에서는 잇따른 투자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강조해 온 본원적 경쟁력 회복과 미래 성장동력 확보 기조의 연장선에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삼성은 AI를 중심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재편하는 한편 공조와 바이오 등 미래 먹거리 발굴에도 속도를 낼 전망이다.

헬릭스에 10억 달러 투자…AI 인프라 생태계로 확장

29일 삼성에 따르면 삼성전자(005930)를 비롯한 삼성의 6개 관계사는 미국 AI 인프라 기업 헬릭스에 총 10억 달러(약 1조 3612억 원)를 투자한다.

삼성전자가 5억 달러를 부담하고 삼성물산(028260)·삼성SDS(018260)·삼성SDI(006400)·삼성생명보험(032830)·삼성화재해상보험(000810) 등 5개 관계사가 나머지 5억 달러를 투자한다.

헬릭스는 글로벌 사모펀드 운용사 KKR이 엔비디아, 쿠웨이트투자청(KIA), 미국 전력회사 비스트라 등과 함께 지난 6월 출범시킨 AI 인프라 플랫폼이다. 삼성의 투자로 헬릭스가 확보한 자본은 기존 100억 달러 이상에서 110억 달러 이상으로 늘어나게 됐다.

헬릭스는 하이퍼스케일 데이터센터 개발·운영뿐 아니라 기저발전과 수요에 따라 출력을 조절하는 탄력 전원, 송배전 설비, 광통신망 등 AI 서비스에 필요한 기반 시설을 통합 개발·제공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AI 서비스가 확산할수록 대규모 연산을 처리할 데이터센터와 이를 안정적으로 가동할 전력 확보의 중요성이 커진다. 데이터센터는 부지만 확보한다고 지을 수 있는 시설이 아니다. 발전원과 송전망, 냉각 설비, 광통신망 등을 동시에 확보해야 실제 가동할 수 있다.

특히 생성형 AI 학습과 추론에 사용되는 고성능 그래픽처리장치(GPU)는 일반 서버보다 훨씬 많은 전력을 소비하고 대량의 열을 발생시킨다. 미국에서는 전력망 접속과 냉각 용량, 데이터센터용 부지 부족이 AI 인프라 확충을 늦추는 주요 병목으로 꼽힌다.

헬릭스는 엔비디아의 AI 컴퓨팅·데이터센터 설계 역량과 비스트라의 전력 공급 능력, KKR의 자본 및 프로젝트 개발 역량을 결합해 데이터센터 구축 과정의 복잡성을 줄인다는 구상이다.

삼성은 이번 투자를 통해 AI 반도체 공급을 넘어 데이터센터와 전력·냉각·클라우드 등 AI 인프라 생태계 전반으로 사업 기회를 넓힐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고대역폭메모리(HBM)와 서버용 D램, 기업용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등 AI 데이터센터용 반도체를 공급할 수 있다. DX부문은 대형 공조·냉각 설비를 포함한 데이터센터용 냉각 솔루션 분야에서 사업 기회를 모색할 수 있다.

삼성물산은 데이터센터와 발전 인프라의 설계·조달·시공(EPC) 역량을 갖추고 있다. 삼성SDS는 데이터센터 설계·구축·운영과 GPU 클라우드 서비스(GPUaaS)를 제공하고 있으며 삼성SDI는 무정전전원장치(UPS)와 배터리 백업 유닛(BBU)에 들어가는 배터리 및 에너지저장장치 사업과 연결할 수 있다.

삼성생명과 삼성화재의 참여는 산업 계열사와 성격이 다르다. 보험료를 장기간 운용하는 금융계열사 입장에서는 데이터센터와 발전·송전망처럼 장기 현금흐름을 기대할 수 있는 인프라 자산에 투자하는 의미가 있다.

이번 투자는 KKR과 삼성 간 AI 인프라 협력이 확대되는 흐름으로도 풀이된다. KKR은 지난 4월 삼성SDS가 발행한 8억2000만 달러 규모의 전환사채를 인수하고 AI 인프라·플랫폼·서비스 사업과 해외 진출 등에서 협력하기로 했다.

다만 삼성의 투자 방식과 확보 지분, 의결권 및 이사회 참여 여부는 공개되지 않았다. 삼성 관계사에 우선공급권이나 프로젝트 참여권이 부여됐는지도 확인되지 않았다. 투자 성과는 헬릭스가 추진하는 사업에서 삼성 관계사들이 실제로 얼마나 많은 공급계약과 프로젝트 참여 기회를 확보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전망이다.

삼성전기, AI 기판에 6조 7800억 원…단일 제품 역대 최대

삼성은 전날에도 AI 서버용 고부가 반도체 기판인 플립칩 볼그리드 어레이(FCBGA)의 생산능력을 확대하기 위한 대규모 투자를 결정했다.

삼성전기는 지난 28일 이사회를 열고 세종 패키지 기판 생산시설 증설에 4조 2700억 원, 베트남 생산법인 설비 확대에 2조 5100억 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총투자액은 6조 7800억 원으로 단일 제품 기준 삼성전기 역대 최대 규모다.

세종사업장 투자는 이달부터 2028년 5월까지 진행되며 신규 생산라인은 같은 해 9월부터 양산에 들어갈 예정이다. 베트남 생산법인의 설비투자는 2028년 4월까지 진행된다.

FCBGA는 AI 가속기와 GPU, 중앙처리장치(CPU) 등 고성능 반도체와 메인보드를 연결해 전기적 신호와 전력을 전달하는 고집적 반도체 기판이다. AI 반도체가 고성능화할수록 기판도 대면적·고다층 구조로 진화해야 해 기술적 난도가 높아지고 있다.

삼성전기는 세종사업장을 고부가·고난도 AI 서버용 기판의 핵심 생산거점으로 육성하고 베트남 생산법인을 글로벌 공급기지로 활용할 계획이다. AI 서버와 고성능컴퓨팅(HPC), 전장 등 고성장 시장에서 늘어나는 고부가 기판 수요에 대응한다는 방침이다.

특히 이번 증설은 글로벌 고객사와의 중장기 협력을 기반으로 추진된다. 고객사가 설비투자비 일부를 지원하고 중장기 물량을 보장하는 방식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기로서는 대규모 선행투자에 따른 재무 부담과 신규 라인의 가동률 위험을 낮출 수 있다는 셈이다.

고객사가 생산설비 투자 단계부터 자금을 지원하면서까지 물량 확보에 나선 것은 AI 서버용 고부가 기판의 공급 부족이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삼성전기는 이번 투자를 통해 글로벌 AI 반도체 고객사의 중장기 수요를 선점하고 FCBGA 사업을 새로운 성장축으로 육성할 계획이다.

AI 중심으로 투자축 이동…공조·바이오도 미래 성장축

삼성이 이틀 연속 대규모 투자 계획을 내놓은 것은 AI 산업의 가치사슬 전반을 선점하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삼성전자의 메모리와 파운드리·시스템LSI가 AI 반도체 경쟁력 확보에 나서는 가운데 삼성전기는 반도체 기판, 삼성SDS는 클라우드와 데이터센터 운영, 삼성물산은 데이터센터·발전 인프라 건설, 삼성SDI는 에너지저장장치 분야에서 AI 관련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재계에서는 이 같은 움직임이 이재용 회장이 강조해 온 경쟁력 회복 기조와 맞닿아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 회장은 올해 초 삼성 임원들을 대상으로 진행된 '삼성다움 복원을 위한 가치 교육'을 통해 "숫자가 좀 나아졌다고 자만할 때가 아니다. 지금이 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미·중 패권 경쟁과 기술 블록화, 공급망 재편으로 기업의 전략적 선택과 비용 부담이 동시에 커진 만큼 단기적인 실적 반등에 안주하지 말고 삼성 특유의 기술 경쟁력을 되찾아야 한다는 의미다.

삼성은 AI 기술을 제품과 서비스 전반에 접목하는 'AI 내재화' 전략과 함께 AI 산업의 물리적 기반을 구성하는 반도체·부품·데이터센터·전력·냉각 분야의 사업 역량도 강화하고 있다.

공조 사업은 삼성전자가 주목하는 미래 성장 분야 가운데 하나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말 유럽 최대 공조기기 업체인 독일 플랙트그룹 인수 절차를 마무리했다. 인수 금액은 지분 100% 기준 15억 유로(약 2조 4000억 원)다.

AI 데이터센터는 GPU 서버에서 발생하는 대량의 열을 안정적으로 처리해야 해 고성능 냉각 솔루션이 필수적이다. 냉각 설비가 데이터센터의 전력 소비와 운영비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는 만큼 냉각 효율은 데이터센터의 수익성을 좌우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삼성전자는 플랙트 인수를 기반으로 데이터센터 냉각과 산업용 공조 시장에서 사업을 확대할 계획이다. 플랙트 인수 이후에도 관련 기술과 사업 경쟁력을 보완하기 위한 추가 투자 및 인수·합병(M&A) 기회를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바이오 분야도 삼성의 중장기 성장축으로 꼽힌다. 삼성은 바이오 생산능력을 확대하는 동시에 신약과 바이오 기술을 확보할 수 있는 투자 및 M&A 기회를 지속해서 살피는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의 투자 행보는 앞으로도 AI와 바이오 등 미래 성장 분야를 중심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다만 투자 규모 자체보다 각 사업에서 실제 고객과 안정적인 수익 구조를 얼마나 확보하느냐가 성패를 가를 것으로 보인다. 특히 AI 인프라 투자가 전 세계적으로 급증하는 상황에서 대규모 선행투자가 공급과잉이나 수익성 저하로 이어지지 않도록 사업별 투자 효율을 입증해야 하는 과제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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