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션처럼 발리는 K-선크림"…美 빗장 풀렸지만 '그대로는' 못 판다
백탁 줄이고 UVA·UVB 동시 차단…美 20여년 만에 신규 필터 허용
조선미녀·메디큐브 "다른 성분은 여전히 규제"…美 전용 처방 불가피
- 정윤영 기자
(서울=뉴스1) 정윤영 기자 = 가볍고 촉촉한 사용감으로 '로션처럼 발린다'는 평가를 받아온 K-뷰티 선크림이 미국 시장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한국 선크림의 발림성과 자외선 차단 성능을 뒷받침해 온 성분 중 하나인 베모트리지놀(BEMT)을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새 자외선 차단제 유효성분으로 허용하면서다.
베모트리지놀은 피부 노화에 영향을 주는 자외선A(UVA)와 피부 화상을 일으키는 자외선B(UVB)를 모두 흡수하는 유기 자외선 차단 성분이다. 징크옥사이드와 티타늄디옥사이드 등 무기 자외선 차단 성분과 달리 피부가 하얗게 트는 '백탁'을 줄이면서 가볍고 부드러운 제형을 구현하는 데 유리하다.
햇빛에 장시간 노출돼도 차단 성능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광안정성과 체내 흡수율이 낮다는 점도 특징이다. 베모트리지놀을 포함한 차세대 자외선 차단 필터는 높은 자외선 차단 성능과 산뜻한 사용감을 함께 구현할 수 있어 K-뷰티 선크림이 해외에서 호평받는 핵심 기술로 평가받아 왔다.
다만 국내 주요 브랜드들은 이번 조치가 곧바로 한국 선크림의 미국 수출 확대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국내 제품에는 베모트리지놀과 함께 미국에서 허용되지 않은 다른 차세대 자외선 차단 성분이 사용되는 경우가 많아 기존 제품을 동일한 처방으로 미국에 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23일 뷰티업계에 따르면 FDA는 지난달 베모트리지놀을 일반의약품(OTC) 자외선차단제 유효성분으로 추가하는 최종 행정명령을 내렸다. 미국에서 새로운 자외선 차단 성분이 허용된 것은 1990년대 후반 이후 20여년 만이다.
FDA는 베모트리지놀을 최대 6%까지 사용할 경우 성인과 생후 6개월 이상 어린이에게 일반적으로 안전하고 효과적인 성분(GRASE)으로 판단했다. 최종 행정명령은 다음 달 9일부터 발효된다.
미국은 한국과 달리 자외선차단제를 화장품이 아닌 OTC 의약품으로 관리한다. 사용할 수 있는 자외선 차단 성분과 함량이 제한돼 있고 제품별 효능시험, 제조·품질관리(GMP), 의약품 등록, 라벨링 기준도 충족해야 한다.
이 같은 차이 때문에 K-뷰티 브랜드는 같은 브랜드의 선크림이라도 미국에서는 허용된 성분만 사용해 별도 제품을 내놓아야 했다. 제한된 성분으로 한국 제품 특유의 가벼운 사용감과 높은 자외선 차단 성능을 동시에 구현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최근 미국 소비자 전문지 컨슈머리포트가 조선미녀와 이니스프리, 라운드랩의 한국용·미국용 선크림을 비교 시험한 결과에서도 3개 브랜드 모두 한국용 제품의 자외선 차단 성능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에서는 베모트리지놀을 비롯한 여러 차세대 필터를 조합할 수 있지만 미국용 제품은 기존 FDA 허용 성분 안에서 처방해야 했던 차이가 반영된 결과로 풀이된다.
베모트리지놀 허용으로 미국용 제품의 발림성과 차단 성능을 개선할 여지는 커졌다. 그러나 국내 선크림에 함께 사용사용되는 디에틸아미노하이드록시벤조일헥실벤조에이트(DHHB)와 에틸헥실트리아존(EHT) 등은 여전히 미국에서 사용할 수 없다. 베모트리지놀이라는 성분 하나의 빗장은 풀렸지만, 한국 제품의 전체 처방이 열린 것은 아닌 셈이다.
구다이글로벌의 조선미녀는 베모트리지놀을 사용한 선크림을 국내외에서 판매하고 있지만 미국에서는 FDA OTC 규정에 맞춰 별도로 개발한 제품을 내놓고 있다.
미국 세포라 등에 입점한 '데이 듀 선스크린 SPF50'은 아보벤존과 호모살레이트, 옥티살레이트, 옥토크릴렌 등 기존 FDA 허용 성분으로 처방했다. '틴티드 미네랄 데이스크린 SPF30'은 징크옥사이드를 사용했다. 두 제품 모두 베모트리지놀은 포함하지 않았다.
반면 한국 등에서 판매하는 조선미녀 '맑은쌀 선크림 아쿠아 프레시'에는 베모트리지놀을 포함해 5종의 자외선 차단 필터가 들어간다. 이 가운데 이번에 미국에서 새로 허용된 성분은 베모트리지놀뿐이다. 나머지 성분은 미국 허용 목록에 포함되지 않아 기존 제품을 처방 변경 없이 판매할 수 없다.
구다이글로벌 관계자는 "베모트리지놀 성분 하나가 허용됐다고 해서 한국용 선크림을 바로 미국에 수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며 "한국 선크림에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다른 차세대 자외선 차단 성분의 상당수는 여전히 미국에서 허용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베모트리지놀을 활용하면 기존 미국용 제품보다 유분감과 끈적임을 줄인 처방을 개발하기 쉬워질 것으로 보고 있지만 구체적인 개발 일정과 출시 시점, 입점 채널은 정해지지 않았다.
에이피알도 베모트리지놀을 적용한 메디큐브 선케어 제품을 보유하고 있지만 미국에서는 판매하지 않고 있다. 미국용 자외선차단제를 개발하려면 성분과 함량뿐 아니라 효능시험, 제조시설, 품질관리와 라벨링 등 OTC 규정을 종합적으로 충족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에이피알 관계자는 "베모트리지놀 허용은 미국 시장에서 선택할 수 있는 자외선 차단 성분의 폭을 넓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면서도 "기존 국내 판매 제품을 동일한 처방으로 미국에서 판매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이어 "현재로서는 메디큐브의 미국 선케어 제품 출시에 미치는 직접적인 영향은 제한적"이라며 "규제 변화와 소비자 수요를 살펴보며 향후 제품 개발 방향을 검토할 예정"이라고 했다.
브랜드들의 출시 계획은 아직 구체화하지 않았지만 제조자개발생산(ODM) 업계는 미국용 처방 확보에 나섰다. 코스메카코리아의 미국 자회사 잉글우드랩은 이달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뷰티 전시회에서 베모트리지놀을 적용한 선케어 처방을 공개했다.
업계에서는 한국 제품을 그대로 수출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 아니라, 새 성분을 활용해 미국 OTC 기준안에서 K-선크림 특유의 사용감을 얼마나 빠르게 구현하느냐가 새로운 경쟁 포인트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yoonge@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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