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업계, 셧다운 공포에도 북미·아프리카산 원유 도입 '딜레마'

전쟁 장기화 불확실성…수급 다변화 결단 쉽지 않아
'비축유'도 임시방편…'석유 최고가제' 강행에 수익성 '직격탄'

3일(현지시간)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겠다고 위협하는 가운데, 아랍에미리트 푸자이라 해안에 유조선들이 늘어서 있다. 2026.3.3 ⓒ로이터=뉴스1

(서울=뉴스1) 원태성 기자 = 국내 정유업계가 중동 전쟁으로 인한 원유 수급 불확실성과 비용 부담, 정책 변수까지 겹치며 이른바 '수급 재편 딜레마'에 직면했다.

단기적으로는 정부 비축유 방출이 가장 현실적인 대응책으로 거론된다. 하지만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비축유로 버티기 어렵기 때문에 미국과 아프리카 등 대체 공급처를 찾아야만 하는 상황이다.

문제는 수익성이다. 대체 공급선의 경우 단기 계약이어서 기존 중동산 원유에 비해 도입 단가가 비싸다. 운송 거리가 길어져 운송비 또한 올라간다. 전쟁 조기 종식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어 급하게 원유 도입 계약을 체결하는 것도 부담이다.

북미·아프리카산 원유, 운송 기간만 2배…설비도 재조정해야

11일 정유업계에 따르면 국내 주요 정유사들은 이번 중동 사태 여파에 따라 당장 4월 도착분 원유뿐만 아니라 상반기 전체를 관통하는 재고 확보 방안을 두고 장고에 들어갔다. 현재 정유사들은 4~5주 정도의 원료 재고를 확보해 가동률을 유지하고 있지만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풀리지 않을 경우 4월 이후의 수급은 장담할 수 없는 실정이다.

문제는 수급 플랜을 다시 짜야 하는 시기지만 외부 변수가 너무나 불확실하다는 점이다. 단기적으로는 공장 가동에 큰 문제가 없지만 해협 봉쇄가 장기화할 경우 원료 확보 차질 가능성이 제기된다. 한국의 중동산 원유 수입 의존도는 약 70%에 달해 중동 정세 변화에 민감한 구조다.

문제는 대체 공급선을 확보하는 과정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북미나 아프리카 등에서 원유를 들여오는 방안이 거론되지만 운송 기간과 가격, 정제 설비 적합성 등 여러 변수가 동시에 작용한다.

중동산 원유의 수송 기간은 통상 2~3주 수준이지만 북미나 아프리카산 원유는 최소 1개월 반에서 길게는 2개월가량이 걸린다. 수송 기간이 길어질 경우 일정 기간 원료 공백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가격 부담도 적지 않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스폿 물량을 확보할 경우 장기 계약 대비 20% 이상 높은 가격을 지불해야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원유 운임 지표인 발틱원유유조선지수도 최근 큰 폭으로 상승하면서 운송 비용 부담까지 커지고 있다.

정제 설비와 원유 성격 간 차이도 변수다. 국내 정유 설비는 중질유 중심으로 설계된 반면 북미나 아프리카산 원유는 상대적으로 경질유 비중이 높다. 원유 종류가 달라질 경우 정제 효율이 떨어질 수 있어 설비 운영 조정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신규 공급 계약을 단기간에 체결하기 어렵다는 점도 부담이다. 한 정유업계 관계자는 "호르무즈 해협이 막히면 해당 지역에서 원유 선적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다"며 "남미나 아프리카 등 다른 지역에서 물량을 확보하는 방법이 있지만 대부분 기존 계약 물량이어서 추가 확보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유사들도 결정을 내리기보다는 상황을 지켜보는 단계"라며 "공급 계약은 단기간에 체결하기 어려워 신중하게 접근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이 9일 오전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중동상황대응본부 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이날 회의에서는 정유업계, 유관기관과 함께 국내 석유가격 안정화 방안을 논의했다. 2026.3.9 ⓒ 뉴스1 황기선 기자
'비축유' 카드 임시방편…'석유 최고가제' 강행에 정유사 수익성 '직격탄'

정유업계는 정부의 비축유 방출을 유일한 탈출구로 보고 있다. 현재 국내에는 정부와 민간을 합쳐 약 2억 배럴, 순수입량 기준 약 200일간 사용할 수 있는 물량이 비축돼 있다. 다만 이 역시 사태가 상반기를 넘어 장기화할 경우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 무한정 풀 수 있는 자원이 아니라는 한계가 있다.

더욱 큰 악재는 정부의 시장 개입이다. 정부는 고공행진 하는 기름값을 잡기 위해 이번 주 중 30년 만에 '석유 최고가격 지정제'를 전격 시행할 예정이다. 국제 유가는 폭등하고 수급을 위해 평소보다 20% 이상 비싼 '스폿(Spot)' 물량과 치솟은 해상 운임(BDTI 55% 상승)을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서 정유사가 시장에 내놓는 공급가에 상한선을 두겠다는 것이다.

이는 정유사 입장에서 원가는 급등하는데 판매가는 막히는 '역마진' 구조를 강요받는 셈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수급을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비싼 원유를 들여와도 정부 규제 탓에 팔수록 손해를 보는 구조가 될 것"이라며 "원유를 확보해도 문제, 확보하지 못하면 셧다운인 상황에서 가격 규제라는 족쇄까지 채워지니 그야말로 설상가상"이라고 호소했다.

khan@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