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 우리가, 물건만 달라"…K-전력기기도 '슈퍼 을' 등극
최대 20% 관세까지 보전…전력기기 3사 모두 '역대 최고' 실적
북미 넘어 일본·중동까지…수출 다변화로 '구조적 성장' 진입 입증
- 원태성 기자
(서울=뉴스1) 원태성 기자 = 관세까지 내면서도 물건을 사 간다. 수주 잔고는 쌓이고, 가격 협상력은 오히려 더 세졌다. 글로벌 시장에서 보기 드문 '공급자 우위'가 굳어지면서 한국 전력기기 업체들의 위상도 완전히 달라졌다. 미국 수입업체들이 18~20%에 달하는 관세 부담을 가격에 포함하는 이례적 거래 구조까지 받아들이고 있다.
K-반도체에 이어 K-전력기기까지 이른바 '슈퍼 을(乙)'에 등극한 모양새다.
게다가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건설과 전력망 교체가 이어지며 전력기기 수요는 계속 늘고 있다. 여기에 북미를 넘어 일본·중동 등으로 수출 전선이 확대되며 전력기기 호황은 단기 사이클이 아닌 구조적 성장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8일 업계에 따르면 국내 전력기기 '빅3'인 HD현대일렉트릭(267260), 효성중공업(298040), LS일렉트릭은 최근 미국 수출 시 발생하는 고율 관세를 고객사가 직접 보전해 주는 이례적인 '공급자 우위 시장'의 수혜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미국으로 초고압 변압기를 수출할 경우 상호관세 15%에 철강 파생상품 관세 3~5%가 더해져 최대 20% 안팎의 관세가 붙는다. 하지만 이 부담을 발주처가 떠안는 계약이 일반화하고 있다. HD현대일렉트릭은 내년 미국 수출 물량부터 관세 전액을 판매가에 반영하기로 했고, 효성중공업과 LS일렉트릭도 유사한 구조로 거래하고 있다.
HD현대일렉트릭은 지난 6일 콘퍼런스콜에서 "관세 보전분이 실제 수익으로 환입되고 있으며, 향후 프로젝트에서도 이 같은 기조를 유지해 수익성을 극대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런 기형적 거래 구조는 글로벌 공급 부족 때문이다. AI 데이터센터 증설과 노후 전력 교체로 미국의 전력기기 수요가 폭증했다. 하지만 초고압 변압기는 수작업 공정 비중이 높고 숙련 인력 양성에 10년 가까이 걸려 단기간 증설이 불가능하다. 여기에 중국 업체를 배제하면서 K-전력기기는 '없어서 못 파는' 상황이다. 발주처 입장에서는 가격보다 납기와 안정적인 공급이 우선순위가 됐다.
실적은 이를 그대로 반영한다. 지난해 전력기기 3사는 모두 매출과 영업이익에서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HD현대일렉트릭은 매출 4조795억원, 영업이익 9953억원을 기록했고 효성중공업은 매출 5조9685억원, 영업이익 7470억원으로 최대 실적을 냈다. LS일렉트릭 역시 매출 4조원대, 영업이익 4000억원대의 안정적인 성장세를 이어갔다.
아울러 효성중공업(약 11조9000억원), HD현대일렉트릭(10조~11조원 추정), LS일렉트릭(약 5조원)의 수주잔고를 합치면 27조원이 넘는다. 최소 5년 치 일감을 이미 확보한 셈이다. 지난해 하반기 들어 미국 765킬로볼트(kV)급 초고압 송전망 신규 건설 계획이 확정되면서 관련 변압기 발주가 본격화된 점도 수주를 끌어올린 요인으로 작용했다.
전력기기 호황이 북미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와 한국전기산업진흥회가 서울에서 연 '일렉스 코리아 2026'에는 일본 간사이 전력, 중동 아랍 컨트랙터스 등 글로벌 주요 발주처들이 직접 방한해 국내 생산 현장을 점검했다. 일본은 전력망 현대화와 재생에너지 확대를 추진 중이고, 중동·아프리카 등 글로벌 사우스 지역 역시 전력 인프라 투자 수요가 빠르게 늘고 있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세계 전력 수요가 2025년 3.3%, 2026년 3.7% 증가해 역대 최고치를 경신할 것으로 전망한다. AI 데이터센터, 전동화, 에너지 전환이 동시에 진행되며 중장기 전력 수요 증가가 구조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전력기기 수출액도 최근 4년간 20% 가까이 늘었다.
증권가와 업계는 이번 호황이 단순한 경기 사이클을 넘어선 '구조적 성장'이라고 분석한다. AI 데이터센터용 전력 수요 급증과 노후 설비 교체 주기가 맞물리면서 2034년까지 고전압 변압기 시장 규모가 두 배 이상 성장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HD현대일렉트릭은 콘퍼런스콜에서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과 2030년까지 초고압과 배전을 연계한 대규모 물량 공급을 협의 중"이라며 "우량 고객을 선별 수주하는 '슬롯 예약' 전략을 통해 높은 이익률을 2026년 이후에도 이어갈 것"이라고 자신했다.
K-전력기기가 글로벌 공급망에서 위치를 확고히 하면서 전성시대는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업계 관계자는 "지금은 수주를 골라 받을 수 있는 상황"이라며 "AI, 전력망 교체, 에너지 전환이라는 세 축이 겹친 구조적 호황인 만큼 전성시대가 쉽게 꺾이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khan@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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