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 지연·비용 증가' 대미 투자 '이중고'…전략 수정 불가피

현지 인력 파견 차질…공사 지연되면 비용 부담 늘어나
대규모 투자 나선 기업들 '난감'…비자 해법 시급

한국 주요 기업들이 미국 출장을 연기하거나 이미 출장을 나가 있는 직원들의 조기 귀국 조처에 나섰다. 아직 업무가 남아 있는 출장 직원에게는 호텔에 머물며 업무를 마무리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미국 조지아주 현대자동차·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HL-GA 배터리컴퍼니) 건설 현장에서 대규모 불법체류자 단속이 벌어지자 국내 주요 기업들이 잇따라 비상 대응에 나섰다. ⓒ News1 김지영 디자이너

(서울=뉴스1) 박기범 기자 = 한국 기업들의 대미 투자가 '이중고'(二重苦)에 빠졌다. 미국 당국의 단속 강화로 현지 공장 건설에 투입되는 한국 인력의 파견이 사실상 어려워지면서 공사 지연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이에 따른 비용 증가는 물론 시장 수요에 민첩하게 대응하기 어렵고 납품 차질에 따른 신뢰도 하락과 같은 무형의 손실까지 걱정해야 하는 처지다.

8일 업계에 따르면 이번 미국 조지아주 HI-GA배터리회사에 대한 대규모 단속으로 국내 기업들의 대미 투자 위축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기술자 없이 어떻게 공장 짓나…HI-GA 연내 준공 힘들 듯

HI-GA는 현대자동차(005380)그룹과 LG에너지솔루션(373220)이 6조 원을 투입한 공장으로 연내 준공 후 내년 초부터 생산에 돌입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번 단속으로 LG에너지솔루션 직원 47명과 협력업체 직원 250여 명 등 300여 명이 체포되면서 일정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이 경우 전기차 배터리 공급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경희 LS증권 연구원은 "2026년 초 양산을 목표로 했지만, 공사 차질은 불가피하다"며 "2026년부터 예정된 현대차그룹향 미국 판매량이 하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준공이 늦어지더라도 아직 공장이 가동되지 않은 상황이어서 당장 현대차그룹의 전기차 생산에 미치는 영향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김동일 현대차그룹 전략기획실장(부사장)은 이날 "준공이 늦어지지 않고 추가 비용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이번 사태가 HI-GA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LG에너지솔루션과 현대차는 HI-GA에 43억 달러(약 6조 원)를 투자했고, 20억 달러를 추가 투입할 계획이다. 이 외에도 LG에너지솔루션은 애리조나주에 32억 달러 단독 공장을, 오하이오주에서는 혼다와 30억 달러 합작공장을 건설 중이다.

삼성SDI(006400)는 인디애나주에 스텔란티스·GM과 합작 공장을 세우고 있으며, 두 공장 합산 투자액은 74억 달러에 달한다. SK온은 테네시·켄터키주에 114억 달러를 투입해 포드 합작 공장을 추진하고 있고, 현대차와 조지아주에 50억 달러 규모 합작공장도 건설 중이다.

삼성전자(005930)는 텍사스에 370억 달러 파운드리 공장을, SK하이닉스(000660)는 인디애나에 38억7000만 달러 규모 HBM 패키징 공장을 짓고 있다. 한화오션(042660) 역시 필라델피아 조선소에 50억 달러 추가 투자를 결정했다.

미국 이민세관단속국 ICE(U.S. Immigration and Customs Enforcement)가 조지아주 내 현대자동차그룹과 LG에너지솔루션 합작 배터리 공장 건설 현장의 한국인 직원 300여 명을 기습 단속·구금하는 영상을 공개했다. (ICE 홈페이지. 재판매 및 DB금지) 2025.9.6/뉴스1
"생산시설에 노하우·대외비 기술 다 녹아 있어"…현지 건설사 발주 불가능

미국의 이번 단속은 생산시설 투자에 그치지 말고 건설 과정에서도 '미국인'을 고용하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하지만 생산시설에 대외비가 다수 포함돼 있는데다 미국 현지에서 전문성을 갖춘 인력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업계는 이 같은 대규모 투자가 정상적으로 진행되려면 한국 인력의 현장 투입이 필수라고 강조한다. 첨단 장비와 보안이 요구되는 핵심 산업 특성상 계열사 건설업체나 오랜 협력사를 통한 공정이 불가피하며, 돌발 상황에 즉각 대응할 수 있는 전문 인력 파견도 중요하다.

이번 단속에서 확인됐듯이 현장 근로자들이 무비자인 전자여행허가(ESTA)를 이용한 것도 이 때문이다. 출장 간 사람들은 대부분 회의 참석이나 계약 등을 위한 비자인 B1비자만 해도 발급받는데 최소 한 달 이상 소요돼 이용하기 힘든 실정이다. 단속을 피하기 위해선 전문직(H-1B)이나 주재원(L1·E2) 비자를 이용해야 하는데 조건이 복잡해 건설 인력이 사용하기 더욱 어렵다

일각에선 이번 조치가 '현지 근로자 채용 압박'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그러나 기술 유출 위험, 숙련도 부족, 높은 인건비 등으로 인해 한국 기업의 부담이 가중될 수밖에 없다. 장기적으로는 미국 내 투자 위축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업계에서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비자 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날 "전문가를 불러들여 우리 국민을 훈련해서 미국인들이 직접 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며 비자문제 논의 가능성을 시사했다.

장상식 국제무역통상연구원장은 이같은 트럼프 반응을 두고 "미국 내 투자, 현지 고용 확대, 미국인 직업훈련 확대를 패키지로 묶어 한국 전용 비자를 신설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또 우리 기업들이 대규모 투자에 나선 만큼 현지 고용·세수 기여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면서 한국 전용 비자의 필요성을 설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산업계에서는 '전문직 전용 비자(E-4)' 신설을 해법으로 제시한다. 미국은 캐나다·멕시코·싱가포르 등 FTA 체결국과 이같은 특별비자 제도를 운용하고 있지만, FTA 체결국인 한국과는 이 제도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pkb1@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