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건희 나와라" 속보이는 국회의원들
지난 22일 오후 2시. 서울 서초동 삼성본사 로비는 모여든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한켠에서는 삼성중공업 직원들이 무더기로 몰려있었고, 수십명의 기자들도 누군가를 기다리며 분주히 오갔다.
10분 뒤, 3명의 국회의원들이 보좌진들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국회 허베이스피리트 유류피해대책 특별위원회 소속 새누리당 김태흠·성완종 의원과 민주당 박수현 의원이었다. 이 의원들이 삼성을 방문한 이유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에게 '직접' 항의서한을 전달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삼성중공업이 태안지역 주민을 위한 보상에 소극적이니, 삼성그룹에서 책임있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면서.
박대영 삼성중공업 사장과 임직원 수십명은 땡볕에 검은 자켓까지 갖춰 입고 1시간 전부터 국회의원들을 영접하느라 기다렸건만, 의원들은 '사장실로 올라가시자'는 박 사장의 청을 뿌리치고 한사코 이건희 회장을 만나겠다고 버텼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폐렴 증세로 병원에 일주일째 입원해있다는 사실은 이미 보도를 통해 널리 알려진 터라, 의원들의 이런 행동이 의아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 회장은 병원에 입원하고 계시다"는 설명에 특위 의원들은 이 회장 비서실장이나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장이라도 만나야 한다며 어깃장을 놨다.
박대영 사장이 '서한을 받아 전달하겠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삼성중공업과는 더이상 할 말이 없으니 그룹이 나서라'는 게 의원들의 주문이었다. 실제 국회에서 열린 태안유류피해 특별위원회에선 삼성중공업 측에 발언 기회를 거의 주지 않았다.
로비에서 실랑이는 30여분간 이어졌다. 이 실랑이는 방송카메라와 사진기자들의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다. 병원에 누워있는 이 회장 면담을 줄기차게 요구하던 의원들은 급기야 이 회장이 입원해 있는 서울삼성병원으로 향했다. 박대영 삼성중공업 사장도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일부 취재기자들도 따라붙었다.
특위 의원들이 병원앞에 도착하니 이번에는 삼성의료원 CEO를 비롯해 행정부원장 등 임직원들이 이들을 맞으려고 도열하고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병원에 도착한 의원들은 입구에서 머뭇거렸다. 한 보좌관의 "사진기자들이 아직 안 왔습니다. 조금 더 있다가 들어가시죠"라는 말소리가 들렸다. 기대했던 것보다 실랑이 현장을 담아줄 사진기자가 별로 없어서였을까. 병원에서, 의원들은 예상 외로 짧은 실랑이만 벌이다가 "이 회장이 퇴원하면 다시 방문하겠다"며 발길을 돌렸다.
의원들의 동선을 따라 한참 움직여야 했던 기자 입장에선 한마디로 '어이상실'이었다. 병원에 입원해있는 줄 뻔히 알면서 이 회장을 만나야겠다고 우겨대는 모습도 이해가 안됐고, 아픈 사람에게 따지겠다고 병원으로 달려가는 행동도 '상식 밖'으로 보였다. 카메라가 별로 없자, 그저 '시늉'만 하다가 발길을 돌리는 상황은 코미디에 가까웠다.
국회에서 특위를 구성한 목적은 태안유류 유출로 인한 피해주민 보상을 논의하기 위해서다. 삼성중공업은 특위에서 이미 2000억원이 넘는 발전기금 출연을 약속했고, 매년 100억원씩 10년간 1000억원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특위 의원들은 발전기금을 더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있다.
발전기금을 더 내놓지 않는다고 피해보상을 함께 논의해야 할 삼성중공업을 제쳐놓고 삼성그룹으로 달려간 것이다. 의원들의 요구대로, 삼성이 그룹 차원에서 피해보상에 나선다면 이는 그룹의 계열사 부당지원에 해당될 수 있다. 현행법상 '배임'에 해당된다. 법을 만드는 입법기관인 국회에 몸담고 있는 의원들이 국내 대기업에게 '불법행위'를 종용하는 모양새다.
유류피해를 입은 주민들은 수년째 실질적인 보상이 이뤄지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특위 의원들은 피해보상액을 어떤 기준으로 산정할 것인지, 어떻게 활용할지 하루빨리 논의해서 마무리지어야 할 의무가 있다. 피해주민을 위한 구체적인 논의는 '뒷전'으로 미룬 채, 특위를 자신들의 선전도구로 이용한다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태안지역 주민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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