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뇌도, 쩐도 없다"…K-반도체, 역대급 호황 속 '경고음'
'두뇌 유출국' OECD 38개국 중 35위…반도체 인재 5만명 '부족'
美日中, 예산 붓고 정부 최대주주로 '쩐의 전쟁'…韓 걸음마 수준
- 최동현 기자
(서울=뉴스1) 최동현 기자
"대한민국이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두뇌 유출국이기 때문이다""여태껏 보지 못했던 유례없는 자금 투자가 필요한 상황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최근 넉 달간 쏟아낸 말들이다. 세계 1위 고대역폭메모리(HBM) 제조사 SK하이닉스(000660)를 이끄는 총수는 인공지능(AI) 황금기의 한복판에서 왜 '위기론'을 꺼낸 걸까. AI산업의 급성장으로 'K-반도체'는 역대급 호황을 누리고 있지만, 정작 미래 경쟁력을 좌우하는 '인재'와 '자본'의 부족으로 산업이 서든데스(돌연사)의 위기에 놓였다는 경고다.
2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가 지난달 21일 단행한 사장단 인사에서 가장 주목받은 인물은 박홍근 하버드대 교수였다. '노벨상에 가장 근접한 과학자'라는 수식어가 붙은 석학이 삼성전자의 미래 선행기술의 산실(産室)인 SAIT(옛 삼성종합기술원) 원장을 맡기로 했다는 소식에 언론은 물론 과학계도 주목했다. 기업 경험이 없는 순수 학계 출신에 사장직을 맡긴 삼성전자로서도 파격 실험이다.
돌이켜보면 올해 삼성전자의 영입인재로 주목받은 면면은 대부분 '해외파'다. 대만 TSMC 출신으로 삼성전자 미주법인 파운드리 총괄 부사장으로 영입된 마가렛 한(3월), 사이닝 보너스만 30억 원을 주고 영입한 펩시 출신 마우로 포르치니 소비자경험(DX)부문 최고 디자인 책임자 사장(4월) 등이 대표적이다.
실무급에서도 해외 인재 영입 경쟁이 치열하다. SK하이닉스는 올해 5월 미국 캘리포니아 산타클래라에서산타클래라에서 열린 '2025 SK글로벌포럼'에 곽노정 대표이사 사장, 김주선 AI 인프라 사장(CMO), 안현 개발총괄 사장(CDO) 등 C레벨 경영진이 총출동해 현지 인재 확보전에 나섰다. 삼성전자 역시 올 상반기 대만에서 메모리 반도체 경력 2년 이상 엔지니어를 스카우트했다.
반도체 업계의 '해외 의존' 현상은 국내 인재 풀의 태부족과 맞닿아 있다. 미국 스탠퍼드대 인간중심AI연구소(HAI)가 발간한 'AI 인덱스 보고서 2025'에 따르면 한국은 AI 인재가 인구 1만 명당 36명(-0.36)이 빠져나가는 '순유출국'으로 분류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국 중 35위로 사실상 꼴찌 수준이다. 한국의 AI 인재 집중도는 2023년 0.79%로 3위였지만 1년 후인 지난해에는 10위(1.06%)로 밀려났다.
인재 유출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가 최근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AI 분야 학부 졸업생 10명 중 4명(38.6%)이 해외 대학원에 진학했다. 한국은행이 지난달 보고서에선 미국에 근무하는 이공계 박사 인력 규모가 2010년 9000명에서 2021년 1만 8000명으로 두 배 늘었으며, 국내 근무 인력의 42.9%가 향후 3년 내 해외 이직을 고려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에 따르면 국내 반도체 산업에 필요한 인력은 2021년 17만 7000명에서 2031년 30만 4000명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하지만 매년 공급되는 신규 인력은 5000명 수준이다. 이런 추세가 지속될 경우 2031년에 부족한 인력은 5만 4000명(18%)에 달할 전망이다. 필요 인력 5명 중 1명에 '공백'이 발생하는 셈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반도체 업계의 최대 현안도 '인력난'이다. 삼정회계법인이 지난 4월 발간한 '2025 글로벌 반도체 산업 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향후 3년간 반도체 산업의 최대 이슈로 '인적자원 리스크'가 40%를 기록해 관세 문제(40%)와 공동 1위에 올랐다. 당시 업종을 막론하고 최대 이슈로 떠올랐던 미국발 관세 리스크와 동등한 수준의 위기감이 팽배하단 뜻이다.
언제 고갈될지 모를 '투자 체력'도 시한폭탄이다.
일본 미쓰이글로벌전략연구소가 최근 발간한 '첨단 반도체 주도권 경쟁'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글로벌 첨단 반도체 생산 점유율은 2023년 12%로 미국과 함께 공동 2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2년 뒤인 2027년에는 미국의 점유율이 17%까지 확대되는 반면, 한국은 13%에 머물러 순위가 3위로 내려갈 것으로 전망됐다. 일본은 틈새를 타고 점유율을 0%에서 4%로 높여 순위권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됐다.
보고서는 이러한 지형 변화를 '국가 지원 격차'에서 찾는다. 미국은 2022년 제정한 반도체법에 따라 5년간 첨단 반도체 제조시설 건설·확장에 390억 달러의 보조금, 연구개발(R&D)에 110억 달러, 25%의 세액공제를 지원한다. 중국은 '중국제조 2025'(Made in China 2025)에 따라 총 3400억 위안을 자국 반도체 생태계 육성에 쏟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투자 금액은 각각 70조 원을 넘는다.
급기야 경쟁국은 정부가 반도체 기업의 최대주주에 오르며 '든든한 뒷배'를 자처하는 형국이다. 미국 상무부는 인텔 지분 9.9%를 인수해 최대주주로 등극했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자국 반도체 파운드리 연합 라피더스에 2조 9000억 엔(약 27조 원)의 공적 자금 투입한 데 이어, 현물 취득 방식으로 지분을 획득할 예정이다. 대만 TSMC의 최대주주는 대만 국가발전위원회(NDC)다.
반면 한국은 반도체 산업 지원책이 현금성 지원보단 세액공제 등 간접 지원에 그치는 실정이다. 최태원 회장이 총대를 메고 '직접 지원'을 요구하고 나선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지난달 20일 기업성장포럼에서 AI 경쟁이 규모와 속도의 게임으로 재편되고 있다면서 "여태껏 보지 못했던 유례없는 투자 자금들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요청했다.
투자 규모는 이미 민간 기업의 체력을 넘어선 수준이다. SK하이닉스는 용인 반도체 일반산단 클러스터에 조성하는 반도체 팹(fab·생산시설) 4기에만 최대 600조 원, 삼성전자는 최근 건설을 시작한 평택사업장 2단지 5라인(P5)과 용인 반도체 국가산단 클러스터 내 팹 6기에만 총 420조 원을 투자할 예정이다. 용적률 상향으로 SK하이닉스의 투자 계획이 기존 120조 원에서 5배 증가한 만큼, 삼성전자의 투자 규모도 크게 뛸 수 있다.
구글 '텐서처리장치'(TPU)의 부상으로 HBM 수요가 더 폭증할 것이란 관측도 반도체 업계로선 마냥 반길 수만은 없는 '숙제'다. TPU는 그래픽처리장치(GPU)와 용도·목적이 달라 AI 가속기 수요를 확대하는 '추가 수요'가 될 전망이다. K-반도체 입장에선 새로운 시장이 열린 셈이지만, HBM 시장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발 빠른 대규모 투자와 생산능력 확대가 필수다.
문제는 민간기업 자력만으로는 천문학적 투자를 감당하기 벅차다는 점이다. 글로벌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최근 보고서에서 "2028년까지 전 세계 데이터센터 건설에 2조 9000억 달러(약 4300조 원)가 필요할 것"이라며 이 투자금을 기업 보유 현금만으로 조달할 경우 최대 1조 5000억 달러의 공백(Gap)이 발생해 결국 외부 조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다행히 한국도 보조금 등 국가의 직접 재정 지원을 담은 '반도체 특별법'이 연내 국회 처리를 앞두고 있어 첫걸음은 뗐다. 하지만 법안에는 '재정 지원 근거'만 담길 뿐 구체적인 보조금 수준까진 명시하지 않고, 세제 혜택 등 간접 지원이 주를 이룰 것이란 전망이 많다. 업계 관계자는 "(대기업 특혜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앞서다 보니 적극적인 재정적·행정적 지원이 더디고 어렵다"며 "골든타임이 다가오고 있다"고 경고했다.
dongchoi89@news1.kr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