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친환경적인 가전의 필수 조건 '오래 쓰는 가전'

독일의 청소장비 브랜드 카처(Kärcher)의 직원 사스키아 슈나이더. 2025.9.5/뉴스1 ⓒ News1 박주평 기자

(서울=뉴스1) 박주평 기자 = 지난 5~9일(현지시간)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유럽 최대 가전 전시회 'IFA 2025'는 최신 기술의 경연장이었다. 인공지능(AI) 기반으로 모든 가전을 연결하고,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는 로봇청소기와 자동으로 화력을 조절하는 조리기구 등 놀라운 신제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뜻밖의 장면이었다. "가장 좋은 제품은 오래 쓰는 제품"이라며 웃던 독일의 청소장비 브랜드 카처(Kärcher) 직원의 모습이다. 더 많은 기능, 더 빠른 속도라는 미덕을 경쟁적으로 실천하는 IFA 현장에서 '오래 쓰는 가전'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 직원은 "제품의 수명을 길게 유지하면 더 많은 새 제품을 생산할 필요가 없다"며 "오래 쓰는 가전을 만드는 것은 지속가능성을 지향하는 우리 브랜드의 방향성과 일치한다"고 말했다. '오래 쓰는 가전'은 지속가능성이라는 화두를 압축한 표현으로 다가왔다.

신제품이 갈수록 더 짧은 주기로 출시되면서 전자 폐기물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고 있다. 유엔이 관계기관과 함께 발간한 '2024년 글로벌 전자폐기물 모니터링'에 따르면 지난 2010년 3400만t(톤)이었던 전자 폐기물 배출량은 2022년에는 6200만t에 달했다. 매년 평균 230만t씩 증가한 수치다.

수거·재활용되는 전자 폐기물도 2010년 800만t에서 2022년 1380만t으로 늘었지만, 폐기물 발생량은 재활용량보다 5배나 빠르게 증가했다. 이에 따라 2022년 발생한 전자 폐기물에 포함된 금속의 총가치 910억 달러 중 재활용 체계로 회수된 금속의 가치는 280억 달러에 그쳤다. 대부분의 자원은 소각되거나 매립됐다.

이런 현실에서 IFA에 참여한 기업들은 단순히 고장 나지 않는 것을 넘어 제품의 생애 주기 전체를 아우르는 확장된 내구성을 화두로 제시했다.

카처는 고압 세척기의 스프레이 랜스에 폐기된 에어백에서 추출한 '나일론 66'을 활용하고, 100% 재활용할 수 있는 폴리프로필렌 플라스틱을 청소기 소재로 사용한다.독일 냉장고 브랜드 리페르는 재활용할 수 있는 화산암 소재(블루록스, BluRoX)로 만든 냉동고 단열재를 선보였다. 이는 복합 소재로 뒤섞여 재활용이 어려웠던 기존 단열재의 한계를 극복한 혁신적인 시도다. 생산 단계부터 재활용을 고려하는 것은 '오래 쓰는 가전'의 시작점이다.

삼성전자는 전 세계 80여 개국에서 폐전자제품 수거·재활용 체계를 구축해 2009년부터 2024년까지 누적 690만톤의 폐기물을 수거했다. 또 지난해 기준 제품 플라스틱 부품의 31%에 재활용 소재를 적용했고, 2050년까지 모든 플라스틱 부품에 재활용 소재를 도입할 계획이다.

LG전자는 'UP 가전'(업 가전)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내구성을 제시했다. 기존 제품의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만으로 새로운 기능을 추가할 수 있어 제품의 가치를 오래도록 유지시킨다. 또 추가 부품을 구매해 하드웨어 기능까지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

오래 쓰는 가전은 환경 문제에 대한 기업들의 책임감과 해결책을 찾으려는 혁신의 결과다. 과거 금성전자(현 LG전자) 전자레인지가 고장 나지 않아 수십 년 동안 사용되거나, 3대에 걸쳐 쓴 삼성전자 냉장고가 박물관에 기증된 이야기는 내구성이 브랜드 가치와 직결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제 그 '내구성'의 의미는 기후 위기와 AI 기술을 만나 진화하고 있다

가전 기술의 최전선은 더 빠르고 똑똑한 제품을 만드는 데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마주한 미래는 제품의 가치를 얼마나 오래 지속시킬 수 있는지, 환경적 책임을 어떻게 다할지 묻고 있다. 한국 기업들이 그 해답을 제시하며 다음 세대에도 '오래 쓰는 가전'을 만들 수 있다면 지금과 같이 시장을 선도할 수 있지 않을까.

jupy@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