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잘 버는 기업에서, 큰 꿈과 큰 책임을 지는 기업으로[이근면의 품격 몽상]
이근면 초대 인사혁신처장(현 사람들연구소 이사장)
품격국가를 완성하는 또 하나의 조건…기업의 품격
인공지능(AI) 시대의 과실인 삼전닉스 호황은 국가적, 국민적 이슈로 등장했다. 반기업적 정서가 높다는 일반적 인식과는 큰 격차가 있는 듯하고, 기업 입장에서도 순기능적 기업의 역할과 기능 생태계를 이해시키고 개선해 나갈 좋은 기회다. 더욱이 삼전 800만, 하이닉스 350만이 주주이니 가히 전 국민의 회사이고 국민이 주인이다.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업의 상황을 되돌아봐야 한다. 지난 편에 노동의 품격에서 노동의 권리가 커진 만큼 책임도 함께 커져야 하며, 기업과 노동이 서로를 적으로 보는 관계를 넘어 함께 세계와 경쟁해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기업에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기업의 첫 번째 책임은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다. 좋은 제품을 만들고, 세계시장을 개척하고, 이익을 내고, 투자하고, 고용하며 세금을 내야 한다. 품격 있는 기업의 첫째 조건은 세계시장에서 당당하게 돈을 잘 버는 것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현대자동차를 비롯해 조선·방산·배터리 기업들이 세계에서 벌어들이는 부는 한 기업에 머물지 않는다. 수많은 일자리와 협력기업, 지역경제와 국가 세수를 떠받치고 대한민국의 경제적 영토를 넓힌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기업의 책임도 커진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기업의 주인은 누구인가. 창업자인가, 경영자인가, 주주인가, 근로자인가.
자본을 투자한 주주의 권리는 당연히 존중받아야 한다. 위험을 감수한 기업가의 몫도 인정해야 한다. 근로자는 자신의 노동과 지식으로 기업의 가치를 만들었다. 협력업체와 소비자, 지역사회도 기업 생태계를 구성한다.
기업의 경영권과 소유권은 존중돼야 하지만 규모와 사회적 영향력이 커질수록 자신의 결정이 어디까지 파장을 일으키는지를 생각할 책임도 커진다.
대기업 하나의 결정이 수만 명의 임직원뿐 아니라 수천 개 협력기업, 한 지역의 경제, 노동시장과 주택시장, 나아가 국가의 산업 경쟁력까지 움직이는 시대다.
기업의 품격은 내 결정이 사회 전체에 미치는 영향을 볼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온다. '우리 회사가 벌었으니 우리끼리 나누자'로 끝날 수 있는가.
최근 반도체 호황을 배경으로 성과급을 둘러싼 논쟁은 기업의 품격을 생각하게 하는 중요한 사례다. 좋은 성과를 낸 기업이 그 성과를 임직원과 나누는 것은 당연하다. 뛰어난 연구개발과 생산성, 구성원의 헌신이 없었다면 초과이익도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성과와 보상이 연결되는 것은 시장경제의 기본이다.
합리적 보상이라 한들 문제는 그다음이다. 초대형 기업의 보상 체계가 사회 전체에 미치는 파장은 절대 작지 않다. 한 기업의 파격적인 성과급은 곧 다른 대기업 근로자의 비교 기준이 된다. 그것은 다시 다른 업종의 임금협상에 영향을 미치고 중소기업 근로자에게는 박탈감까지 안겨줄 수 있다. 성과급이 반복되면 '성과가 좋았을 때 받는 특별한 보상'에서 '당연히 받아야 할 몫'으로 인식될 위험도 있다. 호황이 꺾였을 때 이를 줄이는 순간 또 다른 노사갈등이 시작될 수 있다.
임직원 성과급도 필요하다. 주주에게 돌아갈 몫도 있어야 한다. 연구개발과 설비 투자, 새로운 사업과 청년 채용을 위한 재원도 남겨야 한다. 협력업체의 경쟁력을 키우는 데도 투자해야 한다.
오늘의 성공을 만든 사람에게 보상하면서 내일의 성공을 만들 사람과 기술에도 투자해야 한다. 기업의 품격은 '얼마나 많이 나눠줬는가'가 아니라 현재의 성과와 미래의 경쟁력을 얼마나 현명하게 배분했는가에서 평가돼야 한다.
그리고 대한민국 기업에 이제 우문일지라도 더 큰 질문을 던지고 싶다. 세계적인 기업을 만들었다면 그다음 꿈은 무엇인가. 일론 머스크가 보여주는 것은 자산 규모만이 아니다. 자동차를 넘어 우주로 가고, 화성까지 이야기한다. 제프 베이조스 역시 전자상거래를 넘어 우주산업에 자신의 자본과 시간을 투입해 왔다.
중요한 것은 성공 여부만이 아니다. 꿈의 크기다.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됐다고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다음 세대가 살아갈 세상을 상상하고, 그것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다시 위험을 감수한다.
우리는 왜 그런 두 번째 꿈을 더 많이 갖지 못하는가. 반도체에서 세계 1등을 했다면 그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 자동차로 성공했다면 미래 이동 수단은 누가 만들 것인가. AI, 로봇, 바이오, 에너지, 우주, 해양, 인간 수명 연장과 미래도시 가운데 대한민국 기업이 인류의 새로운 길을 하나쯤 만들어 볼 수는 없는가.
우리끼리 더 잘사는 기업을 넘어 다음 세대가 도전할 새로운 산업을 만들어 주는 기업, 대한민국을 넘어 인류가 필요로 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기업이 나와야 한다. 기업의 가장 큰 사회공헌은 미래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이야기할 때 흔히 기부나 ESG를 먼저 떠올린다. 환경을 보호하고 법을 지키며 약자를 돕는 일은 좋은 기업의 기본이다. 그러나 기업의 가장 큰 사회적 책임은 경쟁력을 유지하고 미래를 만드는 것 자체가 가장 큰 사회공헌이다.
100억 원을 기부하는 것도 훌륭하지만 새로운 산업을 만들어 20년, 30년 동안 좋은 일자리를 제공한다면 그 사회적 가치는 훨씬 크다. 따라서 기업을 각종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준정부기관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국가는 기업이 세계와 경쟁할 수 있도록 자유와 예측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야 하고 기업은 그 자유를 이용해 기술과 투자, 일자리와 새로운 산업으로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
물론 큰 꿈을 말하기 전에 기본적인 품격부터 갖춰야 한다. 협력업체의 기술을 빼앗고 납품단가를 일방적으로 압박하면서 미래를 말할 수 없다. 안타깝게도 비일비재한 게 사실이고, 무언가 내부 시스템 작동에 문제가 있다. 소비자에게 불리한 정보를 숨기고 사고가 났을 때 책임을 회피하면서 ESG를 외치는 것도 공허하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는 과거의 유물이 아니고 오늘날에도 세계를 향하는 정신으로 승화돼 나타나야 한다. 직원에게 희생을 요구하면서 경영진만 과도한 보상을 누리는 기업 역시 존경받기 어렵다.
약속을 지키는가. 협력사를 동반자로 대하는가. 소비자에게 정직한가. 잘못했을 때 책임지는가.
그리고 이제 하나를 더 물어야 한다. 성공한 뒤 무엇을 꿈꾸는가. 얼마나 벌었는가만 묻지 말고 얼마나 투자했는지를 보자. 얼마나 나눴는가만 보지 말고 얼마나 많은 미래를 남겼는지를 보자. 얼마나 큰 기업인가만 묻지 말고 얼마나 큰 꿈을 가진 기업인가를 묻자.
노동자에게 책임 있는 노동을 요구한다면 기업에도 책임 있는 성공을 요구해야 한다. 내 회사만 잘되고, 우리 구성원끼리 많이 나누고 끝나는 성공이 아니라 협력기업과 청년, 미래산업과 대한민국의 다음 세대까지 그 성공의 외연을 넓히는 기업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의 다음 기업은 세계에서 돈을 가장 잘 버는 기업을 넘어, 세계가 부러워하고 존경하며 그 기업이 꾸는 다음 꿈을 기다리는 기업이어야 한다.
큰 기업에서 위대한 기업으로. 돈을 버는 기업에서 미래를 만드는 기업으로. 그것이 우리가 꿈꾸는 기업의 품격이며, 품격국가 대한민국을 완성하는 또 하나의 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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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대한민국은 더 이상 가난한 나라는 아니지만, 성취에 걸맞은 존중과 신뢰를 충분히 누리고 있는지는 여전히 질문으로 남아 있다. '품격 몽상'은 기업·대학·정부 현장에서 체감한 이 간극에서 출발한다. 이 시선과 시각에서 말하는 품격은 결과가 아니라 권한을 쓰는 방식, 규칙을 대하는 태도, 갈등을 조정하는 국가의 언어다. G3 국가를 지향한다는 것은 경제 규모가 아니라 세계가 신뢰할 수 있는 운영의 품격을 갖추는 일이다. '품격 몽상'은 성장 이후 대한민국이 반드시 넘어야 할 국격의 문턱을 사유하는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