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보고서의 질문'에 日 증시 부활…'예금→투자' 일본인이 달라졌다
[선진 증시를 가다]①이토보고서로 지배구조개편·주주환원 강화
신NISA가 쏘아 올린 공…잠자던 日 '예금 부자', 증시로 몰려
- 신건웅 기자
(도쿄=뉴스1) 신건웅 기자
"매출은 늘었지만, 주주에게 무엇을 돌려주고 있는가."
2014년 발표된 이른바 '이토 보고서'는 1989년 버블 붕괴 이후 장기 침체에 빠져 있던 일본 증시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기업의 몸집이나 매출 규모가 아니라, 주주 자본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있는지가 시장의 평가 기준이 돼야 한다는 문제의식이었다.
이 보고서는 일본 자본시장의 방향을 바꾸는 출발점이 됐다. 이후 일본은 기업 지배구조 개편과 주주환원 강화를 통해 개인 자금이 안심하고 들어올 수 있는 '시장 기반과 신뢰'를 쌓았다. 특히 파격적인 세제 혜택을 결합한 '신(新)소액투자비과세제도(NISA)' 실행으로 가계 자금이 예금에서 투자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저축의 나라'로 불리던 일본의 자금 흐름은 구조적으로 변화했고, 닛케이 평균주가는 34년 만에 버블기 고점을 넘어섰다.
일본 가계자산의 흐름은 눈에 띄게 달라지고 있다. 오랫동안 예금 중심이던 개인 자금이 주식과 펀드 등 금융투자 상품으로 이동하는 거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나타난 것이다.
18일 일본거래소(JPX)에 따르면 일본 증시에서 개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18.2%까지 높아졌고, 보유금액은 역사상 처음으로 210조 엔(약 2003조 원)을 넘어섰다. 개인 주주수는 약 8150만 명으로 전년 대비 약 700만 명 이상 늘었다. 특히 20·30대 신규 계좌 개설이 전체의 40% 이상을 차지했다.
지난 30년간 일본 가계자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던 현금·예금이 마침내 자본시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는 평가다.
노무라증권은 "일본 가계의 위험자산 비중은 다른 나라들에 비해 낮지만 점차 증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변화는 단기적인 주가 상승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지배구조 개혁과 세제 정책이 누적되며 거둔 효과다.
위다인 일본 정책연구대학원대학 교수는 "이토보고서는 자기자본이익률(ROE) 8%라는 구체적 기준을 제시하며, 기업 가치 평가의 기준을 근본적으로 바꿨다"며 "정책이 선언에 그치지 않고 실제 제도와 시장 관행으로 이어지면서 기업의 행동이 달라졌다"고 밝혔다.
실제 스튜어드십 코드(2014년)와 코퍼레이트 거버넌스 코드(2015년) 도입 이후 기관투자자의 의결권 행사가 강화됐고, 기업들은 배당 확대와 자사주 매입·소각 등 주주환원 정책을 본격화했다. 여기에 2022년 도쿄증권거래소의 시장 재편과 'PBR 1배 미만 기업'에 대한 개선 계획 공시 요구로 기업들의 지배구조 개선을 압박했다.
변화가 더딘 일본에서 개인 자금 증시 유입의 결정적 계기는 지난해부터 시행된 신NISA였다.
신NISA는 기존 제도의 한계를 완전히 허물어버렸다. 핵심은 '무기한'과 '한도 확대'이다. 한시적이었던 비과세 기간을 평생 무제한으로 바꿨고, 연간 투자 한도는 최대 120만 엔에서 최대 360만 엔으로 늘렸다. 투자자가 원할 때 언제든 비과세 혜택을 받으며 자산을 운용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셈이다.
위 교수는 "물가 상승 국면에서 '투자를 하지 않으면 자산 가치가 줄어든다'는 인식이 확산됐다"며 "신NISA는 이런 불안을 제도적으로 흡수하며 개인 자금의 증시 유입을 안정화했다"고 평가했다.
이시카와 도모히사 일본종합연구소(JRI)의 조사부장도 "적립형 투자가 중심이 되면서 자금이 일시에 쏠리지 않고, 장기·분산 투자 구조가 자리 잡았다"며 "이는 변동성을 낮추는 동시에 증시로의 자금 유입을 지속시키는 효과를 냈다"고 진단했다.
이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주식 투자가 일상적인 선택지로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은 일본 자본시장에 구조적 변화를 의미한다"고 덧붙였다.
다만 이러한 제도적 유인만으로는 한국 증시의 재평가에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코스피가 5000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지배구조 변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조언이다.
일본 현지 관계자는 "결국은 글로벌 혁신 기업이 나오고, 지배구조가 투명해야 투자자들이 관심을 가질 것"이라며 "신NISA와 같은 제도만으로는 증시 활성화에 한계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위 교수도 "코스피가 5000, 6000으로 재평가되려면 결국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줄여야 하고, 그 출발점이 지배구조라고 생각한다"며 "여러 가지 현실적인 타협안을 통해 경영권에 대한 과도한 불안정성을 낮춰주되, 그 대신 이사회 독립성·소액주주 권리·공시 의무 같은 지배구조는 더 강하게 요구하는 방향이 바람직하다"고 했다.
keon@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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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한국 증시는 경제 규모와 기업 경쟁력에 비해 늘 저평가돼 왔다. 개인은 투자보다 저축에 머물렀고, 증시는 투기와 불신의 대상이 됐다. 그사이 선진국은 달랐다. 일본은 '잃어버린 30년'속에서도 개인 투자를 제도권으로 끌어들였고 홍콩은 글로벌 자본의 허브로 경쟁력을 유지해왔다. 미국은 증시를 혁신 기업의 성장 통로이자 국민 자산 형성의 핵심 장치로 키웠다. 새 정부가 증시 활성화를 국정 과제로 내건 지금, 한국은 중대한 기로에 섰다. 혁신과 부의 선순환을 위해 자본시장은 어떻게 변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