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가족관계증명서 '스크래핑' 차단 일단 유예…은행권 급한 불 껐다

대출 심사 필수 서류 확인에 스크래핑 활용…법원 "법령에 위배"
공공 마이데이터·API 구축에 시간 걸려…"편협하다" 불만도

사진은 17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청사 전경. 2018.6.17 ⓒ 뉴스1 박세연 기자

(서울=뉴스1) 윤수희 기자 = 대법원이 가족관계등록시스템에서 가족관계증명서 등을 자동으로 가져오는 '스크래핑'을 차단하기로 했다가 금융권의 반발이 커지자 시행을 한시적으로 유예했다. 비대면 대출 등에 광범위하게 활용돼 온 스크래핑이 갑자기 막힐 경우 금융소비자 불편과 업무 혼선이 불가피하다는 우려를 받아들인 것이다.

문제는 유예기간 이후다. 개인정보보호위원회(개보위)는 일정한 안전 요건을 갖춘 사업자에 스크래핑을 허용한다는 입장이지만, 대법원은 가족관계등록시스템에서의 스크래핑 자체가 현행 법체계에 맞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금융당국이 법원의 원칙과 금융권의 현실적인 필요성을 동시에 충족할 대안을 마련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14일 금융권에 따르면 법원행정처는 당초 오는 20일부터 시행할 예정이던 가족관계등록시스템의 스크래핑 제한 조치를 한시적으로 유예하기로 했다. 오는 31일까지 유예를 신청한 기관이 대상이다. 인터넷전문은행을 포함한 은행들도 신청서를 제출할 계획이다.

스크래핑은 인터넷 화면에 표시되는 정보를 프로그램을 통해 자동으로 추출해 활용하는 방식이다. 은행들은 비대면 대출 심사 과정에서 고객의 동의를 받아 가족관계등록시스템에 접속해 가족관계증명서 등 필요한 정보를 가져오는 데 스크래핑을 활용해 왔다.

고객이 직접 증명서를 발급받아 은행에 제출할 필요 없이 동의 절차만으로 필요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어 비대면 금융거래의 핵심 수단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갑작스럽게 스크래핑이 차단될 경우 은행 업무뿐 아니라 대출을 받으려는 금융소비자의 불편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 이유다.

이번 논란은 개보위가 추진하는 공공 분야 개인정보 전송 체계 개편 과정에서 불거졌다.

개보위는 그동안 별다른 통제 없이 활용돼 온 스크래핑 방식이 이용자의 인증정보까지 사업자에게 전달될 수 있는 등 개인정보 유출 위험이 있다고 보고 있다. 이에 공공기관이 전송할 개인정보의 범위와 안전관리 방안 등을 사전에 협의한 사업자에 한해서만 스크래핑을 허용하기로 했다.

즉 개보위의 방침은 스크래핑을 당장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안전 요건을 갖춘 사업자에 한해 제한적으로 허용하는 것이다. 장기적으로는 사업자가 이용자의 인증정보를 직접 다루지 않고 필요한 정보만 주고받을 수 있는 응용프로그램 인터페이스(API)나 공공 마이데이터 방식으로 전환한다는 계획이다.

반면 대법원의 입장은 한층 강경하다. 가족관계등록시스템에서 발급되는 증명서에 대해서는 스크래핑을 원칙적으로 허용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법원은 우선 가족관계등록시스템의 개인정보가 개인정보보호법상 본인전송요구권 적용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있다. 또 관련 법령상 대리인의 인터넷 증명서 발급이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사업자가 이용자를 대신해 시스템에 접속해 정보를 가져가는 스크래핑 방식은 현행 법체계에 맞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보안 문제도 이유로 들었다. 법원은 "스크래핑은 정보 유출과 오남용의 위험이 상존하며, 한 번 스크래핑돼 수집된 데이터를 정보주체가 통제하기도 곤란하다"며 "스크래핑 시도가 빈번할 경우 과도한 트래픽 부하를 일으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결국 개보위와 법원 모두 기존 스크래핑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점에는 공감하지만 해법에서는 차이를 보이는 셈이다. 개보위는 안전장치를 갖춘 사업자에는 당분간 스크래핑을 허용하겠다는 입장인 반면, 법원은 가족관계등록시스템에 대해서는 스크래핑 자체를 허용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금융권은 법원의 한시적 유예 조치로 일단 급한 불은 껐다는 분위기다. 다만 비대면 대출 등에 이미 광범위하게 활용되고 있는 스크래핑을 단기간에 API나 공공 마이데이터 등 다른 방식으로 전환하기 어려운 만큼 충분한 준비기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법원이 스크래핑의 위험성만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다는 불만도 나온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스크래핑이 아니라고 해서 정보 유출 가능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대체 수단이 반드시 더 안전하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며 "소비자가 가장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구축해 놓은 서비스를 다시 후퇴시키는 결과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관건은 유예기간 동안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할 수 있느냐다. 최근 금융위원회가 개최한 '스크래핑 차단 관련 금융권 점검회의'에 대법원이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면서 금융권의 우려도 커지고 있다.

대법원이 스크래핑 금지 원칙을 고수하는 상황에서 단순히 유예기간을 늘리는 것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금융당국이 법원과 협의를 통해 API나 공공 마이데이터 등 대체수단을 마련하고, 실제 금융현장에서 이를 적용하기까지 필요한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향후 핵심 과제가 될 전망이다.

ysh@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