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란' 같은 김향기…묵직하게 그려낸 제주 4·3 [시네마 프리뷰]

26일 개봉 '한란' 리뷰

'한란' 스틸

(서울=뉴스1) 고승아 기자

* 영화의 주요 내용을 포함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한란은 제주 한라산에서 자생하는 특별한 난초로, 거친 환경 속에서도 꽃을 피워내는 모습이 강인함과 생존, 희망을 상징한다고 한다. 배우 김향기는 이러한 '한란'을 상징하듯, 4·3 안에서 엄마이자 한 여성으로서 꿋꿋한 삶의 태도를 그려낸다.

오는 26일 개봉하는 '한란'은 1948년 제주 4·3 당시를 배경으로, 살아남기 위해 산과 바다를 건넌 모녀의 강인한 생존 여정을 담은 영화다. '그녀의 취미생활'(2003)으로 장편 데뷔한 하명미 감독의 작품이다.

영화는 아진(김향기 분)이 1948년 제주, 토벌대를 피해 한라산으로 피신하는 모습에서 시작한다. 토벌대를 피해 피신한 남편 이철(서영주 분)을 찾기 위해 아진은 여섯 살 딸 해생(김민채 분)과 시어머니를 두고 생이별하게 된다. 아이와 노인은 괜찮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해생 역시 토벌대의 무차별한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홀로 살아남는다. 군인들이 마을을 점령하며 불태우기 시작하자, 해생은 엄마를 찾기 위해 혼자 한라산으로 향한다. 걱정을 안고 산에 오르던 아진은 군인들이 마을을 전부 불태웠다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고, '애기 심방'인 친구 봉순(강채영 분)과 이웃들의 만류에도 결국 딸을 찾기 위해 하산을 결심한다. 같은 시간 아진과 해생을 찾기 위해 산에서 내려온 이철은 무장대의 반대에 부딪힌다. 이후 아진은 무장대를 만나 이철의 생사에 대해 듣게 되고, 아진은 슬퍼할 겨를 없이 해생을 찾기 위해 한라산을 누비며 고군분투한다. 해생 역시 자그마한 몸으로 산을 오르며 단단한 용기를 보여준다.

'한란' 스틸
'한란' 스틸
'한란' 스틸

제주 4·3은 1948년부터 1957년까지 7년 7개월 동안 수많은 제주 도민이 희생당한 비극적 역사다. '한란'은 이러한 역사적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그려내기보다는 역사 속에서 생존 여정을 고스란히 담아내 깊은 공감대를 끌어낸다. 또한 토벌대와 무장대가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지만, 그 안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에 집중하며 아픈 역사에 대한 다층적인 시선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러면서도 영화는 민간인에 대한 희생에 집중하며 그 시선을 이어나간다.

한라산과 끝없는 동굴, 망망대해까지 헤매는 아진과 해생 모녀의 처절한 생존 여정은 담담하면서도 묵직하게 그려진다. 무모하지만 딸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아진, 충격에 말을 잃지만 꿋꿋한 해생의 모습이 어우러지며 절로 이들을 응원하게 된다. 특히 영화 말미 아진이 이 비극이 잊히지 않길 바라며 해생에게 처절하게 당부하는 장면은 울림을 안긴다.

무엇보다 아역 배우로 데뷔한 김향기의 엄마 연기가 돋보인다. 해사한 얼굴의 김향기는 강인하고 깊은 엄마 아진의 모습으로 완벽하게 변신했다. 제주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것은 물론, 딸을 향한 깊은 모성애를 눈빛과 말투로 드러내며 스크린을 사로잡는다. 여기에 해생으로 분한 아역 김민채도 활약한다. 두려움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용기를 단단한 눈빛만으로 표현하며 몰입도를 높인다.

'한란'은 말미에 극영화에서 다큐멘터리로 넘어온다. 2025년에도 이를 잊지 말자는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것이다. 묵직함을 이어오던 영화의 결이 다소 날 것으로 급격히 바뀌는 모양새가 아쉽지만, 영화가 주고자 하는 메시지 자체는 깊은 여운을 남긴다. 상영 시간 118분. 12세 이상 관람가.

seunga@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