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범의 사려 깊은 선택 "영화, 파리 그리고 민낯"(인터뷰①)
- 장아름 기자
(서울=뉴스1스포츠) 장아름 기자 = 배우 류승범(36)은 인터뷰 내내 그가 매우 사려 깊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남겼다. 그의 뚜렷한 소신과 주관에서 비롯된 직설 화법은 사뭇 결이 달랐다. 입가에 미소를 만연하게 띄운 채 부드럽고 조용하게 이야기하지만 이내 듣는 이들로 하여금 새삼 사유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많은 이들은 대개 그런 그를 두고 '자유로운 영혼'이라 하지만 애써 그런 삶을 의식해서 지향하는 것이 아닌, 제 삶을 가장 잘 즐길 줄 아는 방법을 찾은 이처럼 비쳐졌다.
그는 영화 '나의 절친 악당들'(감독 임상수)에서 맡았던 캐릭터 지누와도 접점이 많았다. 지누는 이 시대 청춘을 대표하는 삼포세대의 표상이자 좁은 고시원에 사는 공무원 인턴이지만 암울한 현실의 그늘은 눈 씻고 찾아볼 수조차 없을 만큼 유쾌하고 밝은 인물이기도 하다. 돈가방 때문에 처음 만난 나미(고준희 분)와 밤을 보낸 후 "한번 더"라는 그의 말에도 흔쾌히 웃으며 응하고, 변함없이 존댓말을 쓰는 것을 유지하는 배려 넘치는 남성이기도 했다.
'나의 절친 악당들' 캐릭터 간의 화학 작용이 흥미로웠던 이유는 류승범이 지누 캐릭터를 절제된 연기로 표현했던 덕이다. 그는 지누를 연기하는 과정을 두고 "연기를 참는 걸 배웠다"고 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이는 달리기 선수에게 달리지 말라는 것과 같았다. 임상수 감독 역시 내제된 에너지를 눌러야 하는 그의 고충을 알고 다독였을 만큼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류승범은 한 발 물러서 있던 캐릭터를 연기했던 자신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다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힘을 완전히 뺀 캐릭터였지만 능청스러운 미소 뒤에는 의미심장한 직설 화법이 묻어났다. 감독에게 먼저 나미와의 존댓말 대화를 제안한 것도, 수염을 깎지 않은 채 마초적인 인상을 주는 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 상징적인 부호들이 류승범이 평소 중시했던 가치관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임상수 감독은 그저 단순하고도 유쾌하게 만들고 싶었다고 했지만, 그와 류승범이 만들어 놓은 세계 속 캐릭터를 한순간 소비하고 마냥 지나칠 수밖에 없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3년간의 파리 거주 후 처음 만난 작품인 '나의 절친 악당들'은 특별했다. 계획적으로 떠난 여정은 아니었으나 뜻하지 않은 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환경을 통해 유익한 깨달음을 얻게 됐고 그 이후 처음 만나게 된 배역에 이를 녹여내려 했다. 영화 홍보 일정이 지난 후 다시 파리로 돌아가 제 페이스를 찾아갈 계획이라지만 국내에서의 차기작 출연 가능성도 열어뒀다. 그의 말처럼 여행을 통해 삶의 또 하나의 과정을 거치고 있는 만큼, 신중하게 결정할 다음 작품과 여행 이야기가 자못 궁금해진다.
Q. 임상수 감독의 시나리오, 첫 느낌은 어땠나.
A. 임상수 감독님은 감독인 동시에 작가이기도 하신 것 같다. 캐릭터들이 정말 살아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활기차면서도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더라. 정말 한 마디로 느낌이 좋은 시나리오였다.
Q. 출연 결정을 파리에서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여타 다른 작품 제의도 많았을 것 같은데 '나의 절친 악당들'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까.
A. 이런 생각을 해봤다. 영화라는 게 내가 죽어도 남는 것이더라. 기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영화 선택이 더 신중해지게 됐는데 그러던 차에 '나의 절친 악당들'이라는 청춘 영화 제의가 들어오게 됐다. 지금의 모습을 기록해두면 나름의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지누라는 캐릭터를 통해 배울 것도 많을 것 같다고 느꼈다. 이 영화를 만나러 가자고 생각했다.
Q. '영화는 기록이다'라는 생각을 갖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A.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이었는데 어느날 영화를 문득 보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영화가 만들어지면 또 그 시대를 생각해보기도 하고 메시지를 전해주는 게 분명히 있더라. 그게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한 공유 같은 게 있더라. 그래서 진중하게 출연을 고민하고 결정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거다.
Q. 배우로서 작품에 대한 애정이 남다를 것 같은데 완성된 영화를 보니 어떤가.
A. 보고 나면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좋았다. 청춘이라는 게 순수하면서도 인생 특정 부분에 적응하지 못하는 단계이기도 한데 그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보면 어떨까 싶었다. 그래서 그냥 하루를 살더라도 즐겁게, 활기차게 살아보면 어떨까 싶다. 누군가가 제 인생에 대해 여러가지 말을 하면, 또 그걸 듣게 되면 헷갈리게 된다. 가는 길에 있어서 두려움을 접고 젊은이들답게 화끈하게 가보는 건 어떨까라는 생각도 해봤다. 영화에서도 기성세대와 젊은세대가 나뉘어져 있는데 젊은 친구들은 가진 게 없으니까 겁이 없고 기성 세대는 가진 게 많아서 두려움이 많다. 가진 게 많으면 두려워지는 건가 싶기도 하다.
Q. 지누라는 캐릭터는 틀이 없다. 연기하는 데 있어서 캐릭터가 잡혀 있으면 편안한데 틀이 없다 보니 연기하는 데 나름의 고충은 없었을까.
A. 내가 지누에게 강렬하게 받은 인상은 심플한 사람이다. 콤플렉스도 없고, 사람을 많이 배려한다. 자기 결정보다는 타인의 결정을 중요시하고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나. 자기가 우선이기 보다 매우 편안한 상태의 평화주의자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의 현실에서는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 쓸모없는 존재처럼 비춰지기도 한다. 그래도 그런 사람은 꼭 필요한 사람 아닌가. 세상은 리더만 원하는데, 사실 서포트가 없는 리더가 있나 싶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진심으로 지누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그런 느낌들을 살리려 노력했다.
Q. 그래서 결과적으로 힘을 뺀 지누 캐릭터가 나온 셈이네.
A.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하면서 스스로에게 다짐한 게 있다. 연기라는 건 때론 참는 것이라는 거다. 마치 차가운 칼날 같은 것이다. 진짜 이게 힘든 작업이다. 달리기 선수한테 달리지 말라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힘들었다. 캐릭터가 맞지 않았다면 힘들었을 테지만 그래도 캐릭터가 일정 부분 맞는 부분이 많아 스무스하게 할 수 있었다. 영화는 대중이 보이는 것에 박수를 보내지만, 이번 작업은 지누가 한 발 물러서 있던 캐릭터였던 만큼 숨겨진 작업이기 때문에 내 스스로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다. 감독님도 힘들지 않냐며 용기를 북돋아주셨다. 그걸 잘 알아주셨다는 것, 뒤에서 배려해주셨다는 점이 너무 감사했다.
Q. 고준희와의 작업은 어땠나.
A. 고준희는 정말 좋은 사람이다. 맑고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배우이기도 하다. 작품에 열정적으로 임하는 배우라 정말 많이 배웠다. 이번 영화를 통해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내가 닮고 싶은 점들을 지닌 배우다.
Q. 극 중 나미와의 대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존댓말을 쓰기도 하면서도 베드신 이후 나누는 대화인데도 서로에 대해 깊게 묻지 않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겉도는 대화 같은데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장면이더라.
A. 존댓말은 내가 감독님께 직접 한 번 제안해봤다. 진심으로 나미를 존중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지누의 이런 모습이 캐릭터를 설명하기에 더욱 수월한 방법이 아닐까 싶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쿨한 것이라고 봤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어느 정도 공간이 있으면 더 오래갈 수 있다고 봤다. 그 이유는 서로를 존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말을 그대로 경청할 줄 아는 태도다.
Q. 나미와 정숙(류현경 분)이 워낙 능동적인 여성 캐릭터이다 보니 겉모습이 마초적인 지누 캐릭터에 궁금증이 생긴다. 다듬어지지 않은 수염과 헤어스타일을 의도한 이유가 있나.
A. 영화에서 '이제 수염 좀 깎지?'라는 대사가 나온다. 나는 지누에게 길들여지지 않은 사회 속 캐릭터를 부여하고 싶었다. 내가 생각하는 중요한 철학을 담고 싶었던 셈이다. 요즘 시대가 자꾸 외모지상주의로 가는 게 아닌가 싶다. 잘생겼다, 예쁘다의 기준이 지나치게 한 쪽으로만 치우치고 있는 것 같다. 아름다움의 기준이 뭔지 잘은 모르겠다. 인간에게 아름다워지고 싶은 욕구는 당연하지만 그게 사람의 전부는 아니지 않나. 사람을 겉모습으로만 판단하는 세태가 아쉽다. 그래서 외모보다는 내면이 많이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민낯으로 등장했다. 영화 속이나 공식석상에서 노메이크업을 선택한 이유도 겉모습보다는 내면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싶어서였다.
Q. 엔딩도 독특했다. 장기하와 얼굴들과 '뭘 그렇게 놀래'를 부르는 게 인상적이었다. 해석은 관객들 각자의 몫이겠지만 감독과 배우들은 어떤 의도로 찍은 장면이었나. 여운이 많이 남는 엔딩이었는데 각 주인공들의 미래를 생각해봤을까.
A. 시나리오 안에서 '돈 쓰러가자'는 메시지가 강조되지 않았나. 최대한 활기차게 만들자는 것이 이 영화의 모토였다. 가끔씩 친절한 영화들은 관객들에게 여백을 안 준다. 마치 '이거다'라고 가르치듯 말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여백이 있다. 이게 임상수 감독의 배려이다. 나미와 정숙이 임신하지 않았다. 이들은 지금쯤 아이를 낳고 어딘가에서 재미있게 살고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끝까지 잡히지 않길 바란다. (웃음)
Q. 결과적으로 이번 영화는 류승범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작품과 역할을 자신에게 맞춰가는 배우들이 있는 반면, 자신을 작품과 역할에 맞춰가는 배우들도 있는 것 같다. 이번의 경우에는 후자에 속하는 것인가.
A. 확실히 작품을 선택하거나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변하고 있는 과정인 것 같다. 그런 것들이 영향이 있는 것 같은데 어떤 영향인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답이 있으면 '이렇다'고 딱 던질 텐데 그냥 새로운 과정 속에 지내고 있으니까 그냥 아직까지 몸을 맡기고 이렇게 마음을 열고 지내게 되는 것 같다. 고(故) 히스레저 같은 경우도 역할에 영향을 너무 많이 받지 않았나. 그런 일들이 실제로 배우들에게는 일어난다. 그런 건 어떻게 보면 삶과 배우라는 직업이 일정 부분 맞닿아 있는 것 같다. 배우를 직업적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Q. 지난 3년 간의 프랑스 생활도 많은 영향을 끼친 것 같은데.
A. 프랑스로 가게 된 건 계획적이었던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이 나와 잘 맞을까' 고민하다가 가게 됐다. 그곳의 사람들과 음식, 자연 등에 관심을 가지면서 다양한 경험을 했다. 물론 그곳이 나의 정착지는 아니다. 아직도 가고 싶은 곳이 정말 많다. 여행을 통해 느끼고 생각해 볼 것들이 많아지니까 유익한 것 같다. 그런 것들이 내 삶을 변화시킨다.
Q. 류승범의 다음 작품이 벌써 기다려진다.
A. 다음 작품의 가능성은 항상 열어두고 있다. 좋은 작품이 내게 '가자'고 하면 언제든지 할 계획이다. 너무 감사한 건 여긴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곳이다. 일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좋은 작품을 하고 싶으니까 신중하게 선택하다 보니 시간이 지연되는 것도 같다. 선택의 기준? 뚜렷한 기준 같은 건 없다.
aluem_chang@news1.kr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