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 조재현 "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네" (인터뷰)
- 김지예 인턴기자
(서울=뉴스1스포츠) 김지예 인턴기자 = 최근 서울 동숭동 수현재씨어터에서 만난 조재현은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는 "뇌가 뜨거워졌다가 탁 풀리니 그만 감기에 반응한 것 같다"고 했다.
"지금까지 해온 드라마와 다르게 '정도전'은 긴장을 많이 했던 작품이었습니다. 어려운 대사에 대한 압박도 있었지만 외길 인생만 걷는 정도전이라는 인물 자체가 저를 긴장하게 만들었죠. 마지막 회에서 정도전이 정몽주에게 '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네'라고 했잖아요? 그건 정도전의 대사이기 전에 제 대사였어요. 정말 많이 참고 최선을 다했거든요."
그가 먼저 대사의 어려움을 토로했듯이 정도전은 유독 문어체 대사가 많았다. 감정적인 대사가 많았던 다른 인물들과 달리 대업에 집중한 정도전은 여러모로 부담이 많은 역할이었지만 조재현에게 '정도전'은 처음부터 운명이었다.
"시놉시스가 100페이지가 넘을 정도로 굉장히 두꺼웠어요. 책 읽는 걸 싫어해서 삼분의 일만 보면 대성공이라는 생각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새벽 5시까지 정독했어요. 오히려 잠이 안 오고 정신이 맑아지더라고요.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 답답했어요. 그래서 무조건 제가 정도전을 표현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다음날 바로 감독을 만나 출연을 확정했죠."
그렇게 정도전이 됐지만 정도전의 삶을 사는 것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정도전'은 시작과 동시에 캐스팅 논란이 불거졌다.
"제대로 된 정도전을 보여주겠다고 큰 소리는 쳐놨는데 어떡해요. 전 트리플 A형이라 힘든 내색은 하지 않았어도 많이 힘들었어요. 모든 기사의 덧글을 쭉 보다 보니 저를 '수구꼴통' 연기자라고 보는 사람들이 꽤 있더라고요. 그 사람들은 '수구꼴통'인 내가 정도전을 맡은 건 적합하지 않다고 했어요."
캐스팅 논란의 핵심은 '보수'적인 조재현이 '진보'적인 정도전을 연기한다는 것이었다.
"저를 왜 이명박 전 대통령과 연관짓는거죠? 아무래도 제가 경기도 문화의 전당 이사장, 경기 영상위원회 위원장, DMZ 국제 다큐멘터리 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아 그런 오해가 생긴 것 같아요. 하지만 제가 했던 일들을 보면 오히려 그들과 반대되는 것이 많아 억울하면서도 화가 나기도 했어요. 저는 정신과 문화는 정권 따라 쉽게 뒤집는 보도블럭 공사처럼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봐요."
다행히 회를 거듭할수록 조재현의 연기 내공이 빛을 발해 캐스팅 논란은 차츰 사그러들었으나 이번에는 정도전의 분량 논란이 발생했다. 드라마 제목이 '정도전'임에도 불구하고 극 중반까지 정도전의 비중이 미미했다. 이 점은 조재현도 충분히 의식하고 있던 부분이라고 했다.
"정도전으로 출연한 저도 드라마가 정도전 중심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의아했지만 전 원래 캐릭터를 감독, 작가와 함께 상의하지 않는 편입니다. 긴 호흡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에게 배우 개인의 캐릭터 분석을 요청하는 것은 과한 듯해 일단 기다렸죠. 25회까지는 전반전을 포기하고 후반부에서 승부를 보려 했어요. 그런데 40회에 접어들었는데도 예상과 다르니 홧병이 났어요. 무늬만 정도전이면 안 되잖아요. 결국 42회쯤 작가에게 장문의 문자를 보냈어요."
사실 조재현은 애초부터 작가에게 정도전의 비중을 높여달라고 할 의도는 없었다. 단지 정도전이 극의 흐름에 자리 잡고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길 바랐을 뿐이었다. 그 마음으로 조재현은 "이성계는 인간적으로 잘 그렸고 정몽주는 재탄생시켰으며 최영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입체적인데 정도전은 '?'"라는 문자를 보냈다. 이에 작가는 "정도전의 시점은 항상 유지했다"고 답장했고 그제서야 조재현은 곳곳에 숨어있었던 작가의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사건 중심으로 가다보면 정도전이 자연스럽게 떨어져 있을 수 밖에 없었다는 건 인정해요. 확실히 이성계, 정몽주, 최영은 방점을 찍어 한번씩 주인공이 됐고요. 그런데 돌이켜보니 그들은 골을 넣었지만 전체 게임을 운영하는 주체는 쭉 정도전이었어요. 그 정도전이 마지막 골을 넣게 해준 작가의 배려에 고마웠죠."
정작 본인이 분량에 욕심 부리지 않았다 해도 시청자들은 분량에 안타까워했다는 말에 그는 "정도전이 던지는 볼이 시속 130km의 지저분한 직구였다면 상대방들은 모두 시속 160km 메이저리그급 직구를 던졌어요. 그래서 정도전이 헛발길질만 하는 것처럼 보였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헛발질이 쌓여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낸 정도전이 결국 조선의 길을 열었잖아요. 그래도 100부작이었으면 좋았을 것 같긴 해요"라며 진한 아쉬움을 내비추기도 했다.
조재현의 말처럼 정도전은 마지막 한 방, 조선을 이뤄냈지만 이방원과 정치적 입장 충돌을 빚어 숙청 대상에 속하게 됐다. 야산에 버려진 시체는 찾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방원이 그를 간적으로 몰아세워 그간의 업적도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방원은 그의 장남은 남겨 놓아 가문의 대가 끊기지 않도록 했다. 이에 대해 조재현은 "이방원이 비록 자신과 다른 정치노선으로 인해 정도전을 죽였지만 큰아들만은 살려둬 그에 대한 존경심은 보여줬다"고 해석했다.
실록에 따르면 정도전은 죽기 직전 이방원에게 목숨을 구걸했다고 하나 극중 정도전은 "이 땅의 백성이 살아있는 한 민본의 대업은 계속 될 것"이라고 말한 뒤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조재현 역시 실록과 다른 결말에 마음을 더 실었다.
"정도전이 죽음을 구걸했을까요? 전 그런 것 같지 않아요. 정도전은 죽음을 미리 예상하고 있던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어요. 다만 죽을 때 죽더라도 이왕이면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대업을 완수하고 싶었겠죠. 정도전이 '나 정도전 그대들에게 명하노라 두려움을 떨쳐라. 냉소와 절망, 나태한 무기력을 혁파하고 저마다 가슴에 불가능한 꿈을 품어라. 그것이 바로 그대들의 대업, 진정한 대업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어요. 이렇게 좋은 참모는 아킬레스건을 건들고 상처를 때려줄 수도 있어야 해요. 죽음을 두려워말고 '어디 상처 한번 봅시다'해서 객관적으로 원인을 파악한 뒤 보고해야 나라가 발전하죠. 그 맥락에서 정도전은 참 좋은 참모였습니다."
결국 조재현은 부정부패로 가득했던 고려 말 백성이 중심이 되는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의 역할을 유려하게 소화, 정조전과 그의 이상정치를 재조명하는 데 기여했다. 이렇게 한동안 정도전으로 살면서 삶의 목표였던 '대업'은 인간 조재현에게 어떤 의미일까.
"정도전은 이상만 꿈꾸는 학자로 남은 게 아니고 진짜 실천했던 사람이에요. 저도 10년 전 세운 목표 중 대부분을 이뤄냈기 때문에 정도전과 실천력이라는 공통 분모를 갖고 있습니다. 그의 대업이 백성을 위한 나라를 세우는 것이었다면 제 대업은 세계 3대 영화제에서 대한민국 최초로 남우주연상을 받는 거예요. 이제 말했으니 이룰 일만 남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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