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칼럼] 둑을 쌓을 것인가, 반도체의 길을 열 것인가
- 이정현 기자

(세종=뉴스1) 이정현 기자 = 춘추시대, 우(禹)나라는 홍수를 막기 위해 물길을 거스르지 않았다. 둑을 높여 물을 막는 대신 강의 흐름을 읽고 새로운 길을 열었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국가의 미래를 좌우하는 일은 다르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느 지역이 이기느냐가 아니라, 국가 전체의 흐름을 어떻게 설계하느냐다.
최근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를 둘러싼 논란도 같은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물이 부족하다, 전력이 부족하다, 특정 지역에 특혜를 주는 것 아니냐는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단순한 지역 대결이나 정치적 프레임으로 소비하는 순간, 우리가 놓치는 것은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의 미래다.
정부가 제시한 청사진은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다. 광주 군공항 이전 부지 약 250만 평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첨단 팹(Fab) 4기를 유치하는 구상이다. 이를 위해서는 6.3GW의 전력과 하루 65만톤의 산업용수가 필요하다. 6.3GW는 대형 원전 4~5기 규모의 발전용량에 해당하며, 하루 65만톤은 200만 명 안팎이 사용하는 생활용수와 맞먹는 양이다. 정부가 이 사업을 단순한 산업단지가 아니라 국가 메가프로젝트로 규정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AI 시대의 반도체는 더 이상 공장만 지으면 되는 산업이 아니다. 막대한 전력과 산업용수, 초고압 송전망, 안정적인 전력계통, 재생에너지, 연구개발 인프라까지 모두 갖춰져야 비로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결국 반도체 경쟁은 '칩의 전쟁'이 아니라 '전기와 물의 전쟁'이다.
정부도 최근 전력·용수 대책 마련에 속도를 내고 있다. 호남권에는 345kV 송전망과 변전소를 확충하고, 기존 다목적댐과 발전용수, 장거리 도수관 등을 활용해 용수를 공급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또 지역에서 생산한 전기를 지역 산업이 우선 사용하는 '지산지소'와 지역별 전기요금제 도입도 논의되고 있다. 결국 반도체 경쟁력은 공장 부지만이 아니라 국가 전력망과 사회간접자본(SOC)을 얼마나 치밀하게 구축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 기준이라면 호남만 검증 대상이 될 이유도 없다. 수도권의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역시 약 15GW의 전력과 하루 150만톤의 용수 확보라는 훨씬 큰 과제를 안고 있다. 어느 지역이든 첨단산업단지는 국가 차원의 전력망과 용수 인프라 투자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 특정 지역만 문제 삼고 다른 지역에는 같은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공정하지 않다.
물론 호남권 사업도 철저한 검증은 필요하다. 전력과 용수 공급 계획은 현실적인지, 환경영향평가는 충분한지, 군공항 이전과 군사시설 규제 해제, 주민 수용성 확보는 가능한지 끝까지 확인해야 한다. 하지만 검증은 사업을 막기 위한 명분이 아니라 성공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과정이어야 한다. 객관적인 검증과 신속한 추진은 충분히 양립할 수 있다.
세계는 이미 반도체를 국가 생존 전략으로 보고 있다. 미국은 CHIPS 정책과 함께 전력망과 기반시설 투자를 병행하고 있고, 대만은 반복되는 가뭄 속에서도 국가 차원의 용수 관리와 인프라 확충으로 생산 차질을 최소화했다. 경쟁국들은 미래를 준비하는데 우리는 지역 논쟁에 발목이 잡혀 있을 여유가 없다.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역시 같은 맥락에서 접근해야 한다. 특혜냐 아니냐를 따질 것이 아니라 국가 산업지도를 어떻게 새로 그릴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수도권과 지방이 경쟁하는 구조가 아니라 서로 역할을 나누고 국가 전체의 공급망을 강화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반도체 산업은 앞으로 수십 년 동안 대한민국의 성장과 안보를 떠받칠 핵심 산업이다. 그 백년대계를 지역 갈등 속에 방치해서는 안 된다. 정부는 정치적 논란에 흔들리지 말고 전력과 용수, 송전망, 환경, 인재 양성까지 치밀하게 준비해 사업을 차질 없이 추진해야 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지역을 나누는 논리가 아니라 미래를 함께 설계하는 국가의 전략이다.
euni1219@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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