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처럼 백지수표 요구했나…한미 관세협상 3500억불 투자펀드 '교착'
대미 투자협력 펀드 주도권 쥐려는 美…韓 정부 "이견 커"
농축산물 시장 개방 우려도…산업장관 "논의 없어" 일축
- 이정현 기자, 김승준 기자
(세종=뉴스1) 이정현 김승준 기자 = 한미 양국이 지난 7월 말 타결한 한미 관세협상의 후속 조치를 논의하기 위한 실무협의가 교착상태에 빠진 모습이다. 미국 측이 당시 합의한 3500억 달러 규모의 대(對)미 투자협력 펀드에 대한 구체적인 투자계획과 이익 배분 방식 등을 문서로 제시할 것을 요구하면서다.
또한 실무협상 테이블에는 당초 관세협상 범위에서 제외됐던 농축산물 시장 개방 등 비관세 장벽 완화 문제도 구체적으로 논의되는 것으로 알려져 우려를 낳고 있다.
9일 통상당국에 따르면 지난 7일 미국 워싱턴 D.C로 향한 한국 통상 실무대표단은 미국 무역대표부(USTR), 미 상무부 등과 관세협상 후속 실무협의를 진행 중이다.
통상당국 관계자는 "현지에서 실무협의를 진행 중"이라며 "(관세 협상 타결 후)그동안 유선, 화상회의, 현지 공관 등을 통해 진행해 온 실무협의의 연장선"이라고 설명했다.
이번 실무협상단의 방미 일정은 지난 7월 30일 타결된 한미 관세협상의 후속 조치 이행을 위한 일환이다. 당시 한국은 미국에 상호관세율 인하를 조건으로 3500억 달러(약 486조 원) 규모의 대미 투자와 1000억 달러 상당의 미국산 에너지 구매 등을 약속한 바 있다.
이에 미국은 한국에 부과 중인 자동차 품목관세 25%를 15%로, 국가별로 책정된 상호관세도 24%에서 15%로 낮추는 데 합의했다. 하지만 당시 합의가 구두에 그친 채 명문화하지 못하면서 우리나라는 여전히 수출 주력 품목인 자동차에 대해 25%의 고율 관세를 적용받고 있는 상황이다.
반면 일본은 지난 4일 미국과의 무역합의를 끌어내면서 오는 16일부터 15%의 자동차 관세를 적용받기로 확정했다.
미국 시장을 두고 한국과 경쟁 중인 일본이 15%의 낮은 관세 혜택을 선점함에 따라, 우리나라의 25% 자동차 관세 장기화는 전반적인 수출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이에 따라 미국과의 합의 명문화가 시급하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미국 측은 실무협의에서 한국이 제시한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협력 펀드와 관련해 운용 방식, 결정 구조, 이익 배분 방안 등의 구체적인 계획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이 제안한 투자 패키지는 조선 분야에 1500억 달러, 반도체 등 전략 산업에 2000억 달러를 각각 투자하는 방식이다. 투자는 직접 투자(equity)와 대출(loans), 보증(credit guarantees) 등으로 구성된다.
한국은 직접 투자는 전체의 5% 수준으로 제한하고, 나머지 대부분은 투자 프로젝트를 간접 지원하는 보증으로 채워 실질적 부담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제시하며 미국을 설득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은 한국이 보다 높은 비율로 자국이 지정한 분야에 직접 지분 투자를 하기를 강하게 요구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은 3500억 달러 중 1500억 달러는 조선업 '전용' 투자금으로 분류하고 있지만, 미국은 이마저도 거부하며 전액에 대한 재량권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투자 대상 선정을 둘러싼 이견도 상당하다. 미국은 자국이 투자 대상 선정에 주도권을 행사하겠다는 입장이지만, 한국은 프로젝트 사업성을 따져 투자를 결정하고 국내 기업도 참여시키길 원하고 있다.
투자 이익 귀속 문제 역시 장점이다. 미국은 투자 이익의 90%를 자국이 보유하겠다는 입장인 반면, 한국은 '이익의 90%를 미국에 재투자한다'는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다.
지난 4일 무역 합의를 타결한 일본의 경우, 대미 투자에서 발생하는 이익은 투자금이 모두 회수되기 전까지는 양국이 수익을 절반씩 나누지만, 투자금이 회수되면 미국이 수익의 90%를 취하는 방식으로 합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용범 대통령 정책실장은 전날 한국방송기자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한미) 관세협상은 지난 7월 30일 타결됐고, 지금 남아있는 것은 세부 이행 방안"이라며 "3500억 달러 펀드를 어떻게 운용할 것인지에 대한 MOU(양해각서) 문안을 놓고 한미 간 협상을 수십 번을 했다"고 밝혔다.
'미국과 먼저 무역 합의를 한 일본의 사례를 참고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김 실장은 "일본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당연히 저희가 알고 있었고 우리보다 일본이 먼저 (5500억달러 대미 투자에) 합의했기에 문안도 저희가 알고 있었다"며 "우리에게 제시된 문안과 (일본에 제시된 문안은)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 문안을 보면 우리나라 국민 중에 누가 그 문안 그대로 서명해야 한다고 생각하겠나. 우리는 절대 그런 문안으로 서명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일본 내부에서도 미국과의 무역 합의를 위해 지나치게 양보했다는 비판 여론이 일고 있다. 일본 언론 보도에 따르면, 5500억 달러(약 760조 원)에 달하는 일본의 대미 투자 관련 양해각서에 아카자와 경제재생상과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이 서명한 내용이 공개되면서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해당 MOU에 따르면 일본의 5500억 달러 대미 투자는 미국이 주도권을 갖고 이행하며, 투자처는 트럼프 대통령 임기가 끝나는 2029년 1월 19일까지 별도로 설치된 투자위원회를 통해 트럼프 대통령이 추천받은 곳 중에서 선택할 수 있게 했다. 투자위원회는 상무장관이 주도하고 일본의 참여 없이 미국 측 인사로만 구성된다.
또한 일본이 약속한 투자를 충분히 이행하지 않을 경우엔 관세를 인상할 수 있도록 한 조항도 들어갔다. 이는 미국 대통령이 대통령령을 통해 일방적으로 수정을 가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 트럼프 대통령에게 '백지수표'를 제공한 셈이라는 비판이 일본 내에서 나오고 있다.
미국은 대미 투자협력 펀드 외에도 이번 실무협상 과정에서 쌀·소고기 등 농축산물 시장 개방을 다시 압박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통상당국 관계자는 이에 대해 "농축산물 시장 개방에 대한 논의는 오간 바 없다"며 "(관세협상 타결 당시)기합의한 검역 개선과 관련한 의견을 주고받았을 뿐이다"고 해명했다.
김정관 산업통산자원부 장관도 지난 8일 열린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전체회의에서 관련 질의를 받고 "쌀·소고기 개방은 없다는 게 현재 양국 간에 Agree(동의)한 상황"이라며 "쌀·소고기 등 농산물과 관련한 내용의 이면합의도 없었다"고 밝혔다.
이 같은 정부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농축산물 시장 개방 이슈는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은 관세 협상 타결 당시, 미국에 '과채류 수입 위생 관련 양국 협력 강화'를 약속한 바 있으며, 이를 두고 미국 측은 1993년 자국이 신청한 사과의 수입 검역 절차가 20년 넘게 8단계 중 2단계인 '수입 위험분석 절차 착수'에 머물러 있다는 점을 들어, 한국의 신속한 조치를 요구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미국산 과채류 수입 검역 절차가 완화될 경우, 국내 반입이 촉진돼 사실상 시장 개방 효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이에 대해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지난달 기자간담회에서 "(검역) 시간을 인위적으로 당기는 것도 불가능하다"며 "(협상 내용은) 검역절차 간소화가 아닌 검역절차 개선을 얘기하는 것으로, AI(인공지능)와 같은 과학적 방법 등을 활용해 양국 간 소통을 강화하는 것으로 이해해달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일본과 달리 조선업 협력 등 한국만의 전략적 강점을 바탕으로 실무협상에서 주도권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수동적으로 '피해를 해소해야 한다'는 입장보다는 미국과 정면 돌파를 통해 오히려 공생하면서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을 제시하며 적극 설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허 교수는 "결국 기업은 자율적으로 이윤을 좇는데, 지금 미국이 하는 투자 유도나 이민정책은 엇박자를 내고 있다"며 "국내 기업이 미국으로 가려 해도 제조 인프라에 대한 회의감, 인력양성에 필요한 숙련인력, 최근 비자 사태 등 전혀 매력적일 수 없다. 이런 부분을 개선해야 투자가 가능하다는 조건을 우선 제시해 볼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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