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기본합의서' 어떻게 채택됐나…30여년 만에 공개된 사료집

[남북대화 사료집 공개]…총 3172쪽 분량
90년대 초 8차례 남북 회담 대화록 등 담겨

1990년 9월 5일 서울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진행된 제1차 남북고위급회담. 남측 대표로는 강영훈 국무총리, 정원식 교육부 장관, 이홍구 통일원장관, 장세동 안기부 차장이, 북측 대표로는 연형묵 내각총리, 김달현 부총리, 허담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김용순 당 대남담당 비서 등이 배석했다.

(서울=뉴스1) 김예슬 기자 = 정부는 2일 그동안 비공개로 묶여 있던 1990년대 초반 남북회담 문서를 공개했다. 이 문서에는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체결 과정이 담겨 있다.

통일부가 이날 공개한 3172쪽 분량의 '남북대화 사료집' 13권에는 1990년 9월부터 1992년 2월까지 총 8차례에 걸쳐 진행된 남북고위급회담 대화록 등이 실렸다. 다만 개인정보 등 일부 내용이 빈칸 처리돼 실제 공개율은 95%다.

구체적으로는 △남북고위급회담(8차례) △고위급회담 준비 실무 대표 접촉(2차례) △유엔 가입 문제 관련 실무 대표 접촉(3차례) 등의 진행 과정과 회의록이 실렸다.

이번에 공개된 내용은 총리가 수석대표로 참여해 20여 년 동안 진행된 남북회담 역사에서 '가장 최고위급 회담'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또한 남북 관계 전반을 규율하는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하는 과정도 담겼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北 "유엔 단일의석 가입 및 불가침선언 채택해야"…1~3차까지 평행선

남북고위급회담은 1년 6개월 동안 판문점 남쪽 평화의집과 북쪽 통일각에서 번갈아 열린 8차례의 예비 회담을 통해 성사됐다. 북한의 연형묵 내각총리, 김달현 부총리, 허담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김용순 당 대남담당 비서 등이 1990년 9월 4일 판문점을 통해 서울에 왔다. 같은 달 7일까지 서울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열린 1차 남북고위급회담에 남측 대표로는 강영훈 국무총리, 정원식 교육부 장관, 이홍구 통일원 장관, 장세동 안기부 차장이 배석했다.

다만 1차 회담에서 남측은 상호 체제 인정, 교류·협력과 정치·군사적 신뢰구축 병행을 주장했고, 북측은 하나의 조선 정책을 내세우며 정치·군사 문제를 우선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해 양측의 입장 차이만 확인한 채 성과 없이 종료됐다.

한 달여 뒤인 1990년 10월 16일부터 19일까지는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2차 남북고위급회담이 이뤄졌다. 1차 회담과 비슷하게 남측은 화해·협력 공동선언안을, 북측은 불가침선언안 채택을 고집하다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끝났다.

3차 남북고위급회담이 열리기 전 유엔 가입 문제와 관련해 실무 대표 간 접촉도 2달 사이 3차례 이뤄졌다. 북한은 남북 단일의석 공동 가입을 주장하며 남한의 단독 가입을 저지하려 했으나, 세 차례 모두 합의 없이 종료됐다. 사료집 회의록편 3권에는 "우리 입장은 나라의 분열이 영구 고착되는 것을 막고, 통일을 실현하려는 염원으로부터 하나의 국가로 유엔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북한 측 발언이 상세히 실렸다.

1990년 12월 11일부터 14일까지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3차 남북고위급회담도 불가침선언 채택 문제로 평행선을 달리다 성과 없이 끝났다. 사료집 회의록편 4권을 보면 북한 측은 "불가침선언을 채택하면 북남 사이 군축을 하게 되고, 군축하면 미군이 남조선에서 철수돼야 하는 논리가 뒤따른다"고 주장했다. 불가침선언 채택이 주한미군 철수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듬해인 1991년 10월 22일부터 25일까지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개최된 4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는 합의서를 단일문건으로 할 것과 합의서의 명칭, 내용 및 체계 등에 합의하며 타결의 돌파구를 마련했다.

1991년 12월 13일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5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화해 및 불가침, 교류 협력 등에 관한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했다.(통일부 제공).
15개월 대화 끝에 5차 남북고위급회담서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그 결과로 1991년 12월 10일부터 13일까지 서울에서 워커힐호텔에서 열린 5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화해 및 불가침, 교류 협력 등에 관한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이라는 결과를 이룩했다.

1차 남북고위급회담을 시작한 이후 15개월 만에 채택된 합의서로, 남북 관계 이정표 역할을 해 온 역사적 합의문이다. 서문은 남북 관계를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로 규정했고, 해상 불가침 구역을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해 온 구역'으로 합의했다.

남북기본합의서는 1992년 2월 평양에서 열린 제6차 고위급회담에서 합의서 문건을 정식 교환하고, 그해 9월 제8차 고위급회담에서 최종적으로 3개 부속합의서를 채택함으로써 효력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또 남북은 7차 고위급회담 시 합의를 바탕으로 노부모 100명, 예술인 70명, 기자·지원 인원 70명 등으로 구성된 방문단 및 예술단 교환을 논의했으나, 북측이 송환을 요구한 비전향장기수 이인모 씨 문제 등으로 결렬됐다.

남북대화 사료집에는 고위급회담의 상세한 내용과 함께 북측 대표가 '조선'이 아닌 '북한'이라는 호칭을 스스로 사용하거나, 흡수 통일에 대한 강한 우려를 내비치는 등 북측 인사들의 특이한 발언들도 소개됐다. 사료집 회의록편 5권에는 김광진 인민무력부 부부장이 5차 고위급회담 2일 차 회의에서 "북한 코너에는 진짜 북한 상품만 놔야 한다"고 언급한 것이 실리기도 했다.

공개된 남북회담 문서 원본은 △통일부 남북관계관리단 △국립통일교육원 △통일부 북한자료센터 △국회도서관 내 '남북회담문서 열람실' △목포 통일플러스센터 △국회부산도서관에서 열람할 수 있다. 또 누구나 남북관계관리단 홈페이지에서 온라인 열람을 신청할 수 있다.

통일부는 "앞으로도 국민의 알권리를 충족시키고 대북정책의 투명성을 제고하기 위해 남북회담 문서 공개를 지속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yeseul@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