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자유 위해…'이국 땅이 부여한 임무' 수행한 라트비아 용사들

[6·25 한국전쟁 75주년] ②참전자 수는 적지만 자유 수호의 정신은 컸다

6·25전쟁에 참전한 라트비아인들. 왼쪽부터 아이바르스 카를리스 살레니엑스, 야니스 크루민스, 레오니드스 오졸린스, 구나르스 스톱니엑스.(라트비아 전쟁박물관 제공)

(서울=뉴스1) 허고운 기자

"제 가슴엔 훈장 여럿과 전투보병휘장이 달려 있었지만 마음껏 기뻐할 수만은 없습니다. 한국의 전장에서 휘날린 수많은 국기 중 라트비아 국기는 없었으니까요."

전 세계 자유 진영 국가들이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피를 흘렸던 6·25전쟁이 발발한 지 75주년이 됐다. 공식 참전국 22개국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라트비아인 14명도 미군 소속으로 참전했고, 이들 중 4명이 한국 땅에서 전사했다.

6·25전쟁에 참전한 것으로 확인된 라트비아인의 수는 결코 많지 않다. 이들 역시 강대국의 지배를 피해 망명한 사람들이었다. 더 이상 조국을 지킬 수 없는 상황에서 낯선 나라의 군대에서 '자유'라는 이상을 위해 또 다른 타국의 전장을 누빈 영웅들의 이야기는 6·25전쟁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게 한다.

수류탄 위로 몸 던진 살레니엑스…기관총 놓지 않은 크루민스

6·25전쟁에 참전한 라트비아인 중 가장 극적인 활약을 펼친 동시에 큰 희생정신을 보여 준 이는 아이바르스 카를리스 살레니엑스다. 그는 1931년 라트비아에서 태어나 1950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1952년 3월 미군에 자원 입대해 한국으로 파병됐다.

1952년 10월 18일, 살레니엑스가 근무하던 미 제45보병사단 제279보병연대 제3대대 L중대는 강원도 양구 '펀치볼'을 지키고 있었다. 자정이 막 지난 순간 북한군의 포격이 시작됐고, 보병 부대의 돌격으로 아군의 방어선이 뚫리고 말았다.

살레니엑스는 이 전투에서 적 2명을 사살하고 7명에게 부상을 입히는 전공을 거뒀다. 그러나 적군이 던진 수류탄이 살레니엑스와 동료들 앞에 떨어졌고, 그는 자신의 몸으로 수류탄을 덮어 전우 3명의 목숨을 구하고 장렬히 전사했다.

미군은 살레니엑스의 용기와 헌신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당시 미군에서 두 번째로 높은 훈격의 '수훈십자장' 추서로 기렸다. 장례식은 라트비아 국가 '신이시여, 라트비아를 축복하소서'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미국 국립묘지에서 진행됐다.

1953년 3월 한국행 배에 오른 미 육군 제7사단 제17보병연대 소속 야니스 크루민스 일등병.(라트비아 전쟁박물관 제공)

1931년 군인 집안에서 태어난 야니스 크루민스는 1951년 새로운 조국이 될 미국에 정착했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1952년 라트비아 시민 신분으로 미군에 징집됐고, 육군 제7사단 제17보병연대에 배속돼 1953년 4월부터 경기도 연천군 주변 '폭찹힐' 인근 최전방 요충지 방어 임무에 투입됐다.

같은 해 6월 14일 크루민스는 적의 동태를 살피러 정찰에 나섰다. 크루민스가 적의 동태가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무전기로 올리는 순간, 적군이 밀고 들어왔다. 이후 현장에 도착한 점령대가 발견한 것은 총구가 적진을 향한 기관총을 손에 쥔 채 숨을 거둔 크루민스의 시신이었다.

크루민스는 퍼플하트 훈장을 받았고, 그의 소속 부대 역시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았다. 크루민스를 기리는 명판에는 "그는 라트비아 시민으로서 피난처가 돼준 이국땅이 부여한 의무를 수행하다 전사했다"라는 추모사가 적혀 있다.

1927년 라트비아에서 태어난 루돌프스 리에파는 1944년 라트비아군에 징집돼 군 복무를 했다. 나치 독일과 소련의 점령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리에파는 1950년엔 미군으로 징집돼 이듬해 봄 6·25전쟁에 참전했다. 그는 육군 제1기갑사단 제7기병연대 제1대대 B중대 소속으로 싸우다 1951년 10월 5일 전사했다.

브루노 글라제르스는 1928년 라트비아에서 태어났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난민 수용소에 거주하다 1949년 5월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육군 제25보병사단 제14보병연대 소속으로 1952년 2월 26일 북한 지역에서 교전 중 숨졌다.

1952년 여름, 전쟁 중 야전 막사에서 식사 중인 미 해병 제1사단 제5연대 제1대대 A중대 소속 레오니드스 오졸린스 일등병. 오른쪽 사진은 오졸린스 일등병(두 번째 줄 왼쪽에서 두 번째)이 동료들과 자유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다.(라트비아 전쟁박물관 제공)
적 포탄 맞고도 전선 복귀한 투혼…'해병대의 작은 외인부대'도 맹활약

6·25전쟁에서 생존한 라트비아 용사들 또한 각자의 전장에서 인상 깊은 활약을 펼쳤다.

1925년 라트비아에서 태어난 레오니드스 오졸린스는 1950년 미국에 망명해 해병대에 자원 입대했다. 그는 해병대 제1사단 5연대 제1대대 A중대 소속으로 6·25전쟁에 참전해 '제인스타운' 방어선에서 상시 정찰 임무를 수행하며 중공군의 줄기찬 공격에 맞섰다. 은성장과 퍼플하트장을 받은 그는 군 복무를 마친 후 인디애나주에 정착했고, 인디애나주 주지사는 공산주의 침략에 맞서 싸운 그의 공로에 대한 보답으로 '훌륭한 미국 시민으로서의 업적을 인정한다'라는 증서를 선사했다.

1927년 라트비아에서 태어난 구나르스 스톱니엑스는 라트비아 독립전쟁의 영웅이자 무공훈자 수훈자의 아들이다. 스톱니엑스는 1951년 미 육군 제2사단 제23보병연대 제3대대 L중대에 배속돼 수 차례 공격 작전에 가담했다. 그는 전투 중 포탄에 맞아 일본의 군병원으로 후송됐음에도, 회복 후 다시 전장에 복귀해 정찰 임무를 수행했다.

1930년 라트비아에서 태어나 1950년 미국으로 건너간 비스발디스 만굴리스는 이듬해 징집돼 해병대에 배치됐다. 만굴리스는 어린 시절 한때 독일 난민수용소에 살았는데, 이때 만난 친구 라이모니스 스프로기스와 운명적으로 재회해 함께 6·25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두 사람이 함께 소속됐던 해병대 제1사단 정찰중대에는 리투아니아, 폴란드, 우크라이나, 중국, 이집트, 스페인 등 다양한 국적의 병사들이 있어 '해병대의 작은 외인부대'라 불렸다고 한다.

왼쪽부터 지구르드스 리엘류리스, 파울리스 베르진스, 에드빈스 우피티스.(라트비아 전쟁박물관 제공)

지구르드스 리엘류리스는 미국에서 공병 훈련을 받은 후 참전했다. 제73공병대대 소속으로 보급로와 교량 건설, 지뢰 매설 작업 등을 지원했다. 그는 1953년 봄 중공군이 전선을 치고 들어온 급박한 순간에는 한 달간 보병으로서 전선에 나서기도 했다.

파울리스 베르진스와 에드빈스 우피티스 또한 라트비아 출신 미군 병사로 참전했다. 우피티스는 1953년 중공군의 박격포탄에 중상을 입고 후송됐는데, 기록에 따르면 그는 "부상당한 팔에 감각이 없어 다시 쓸 수 없을까 두려웠다"라고 당시를 회고하기도 했다.

현재까지 확인된 14명의 라트비아계 미군 참전용사 중 전사자 4명의 이름은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미군 전사자명비에 새겨져 있다. 전쟁기념사업회와 라트비아 전쟁기념관은 또 다른 '숨은 영웅'을 찾는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다음은 6·25전쟁에 참전한 라트비아 용사들의 이름이다.

아이바르스 카를리스 살레니엑스(Aivars Karlis Salenieks)

야니스 크루민스 (Janis Krumins)

루돌프스 리에파 (Rudolfs Liepa)

브루노 글라제르스 (Bruno Glazers)

레오니드스 오졸린스 (Leonids Ozolins)

구나르스 스톱니엑스 (Gunars Stopnieks)

비스발디스 만굴리스 (Visvaldis Mangulis)

라이모니스 스프로기스 (Laimonis Sprogis)

구나르스 잔베르그스 (Gunars Zandbergs)

파울리스 베르진스 (Paulis Berzins)

에르네스트스 아손스 (Ernests Asons)

지구르드스 리엘류리스 (Zigudrs Lieljuris)

에드빈스 우피티스 (Edvins Upitis)

그리고 영상 자료를 통해 참전이 확인되나, 이름 등 공식적인 기록을 발굴 중인 1명의 용사가 더 있다.

hgo@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