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와 오사카에 세운 '외교의 집'…한일관계 발전 기반 놓은 동포들
[한일 국교정상화 60년] ③일본 내 한국 공관 9곳 마련 결정적 기여
"미래세대, 한일 협력 힘 쏟았으면"…"사이좋은 관계 이어져야"
- 노민호 기자
(오사카=뉴스1) 노민호 기자 = 일본 열도 곳곳에 자리한 대한민국 외교 공관은 모두 10곳이다. 그 가운데 9곳은 조국을 잊지 않았던 재일동포들의 피땀과 헌신으로 세워진 곳이다. 오사카 미도스지 한복판에 우뚝 선 주오사카 대한민국 총영사관도 그중 하나다.
미도스지는 오사카의 '광화문'으로 볼 수 있는 오래된 번화가이자 중심부다. 그곳에, 한국의 국력이 미약했을 때부터 태극기가 당당히 펄럭일 수 있었던 것은 1세대 재일동포들의 소박한 열망 덕이다. 대가도 조건도 없이 일본의 '금싸라기 땅' 위에 대한민국 공관을 세웠다. 한일이 동등한 관계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외교적 인프라가 절실하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지난 20일 주오사카 대한민국 총영사관에선 '총영사관 건설기성회' 유족과 동포단체 관계자를 초청해 공관 기증에 대한 감사장을 전달하는 행사가 열렸다.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을 맞아 재일동포 1세대들의 헌신을 기리기 위해 이번 행사가 마련됐다. 정부도 이들의 기여가 한일관계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줬음을 잘 인식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건설기성회의 회장을 맡았던 고 한록춘 씨는 생전에 재일동포 사회의 '대부'(大父)로 불렸다. 1921년 강원도에서 태어난 한록춘은 13세 나이에 홀로 일본으로 건너와 '조센징'에 대한 차별 대우 속에 식당 허드렛일, 잡부, 노점 종업원 등 가리지 않고 일했다.
재일동포 사회에서 그의 첫 별명은 한번 물면 절대로 놓지 않는 '독종'이었다고 한다. 악착같은 삶을 산 한록춘은 1945년 일본이 패망할 무렵, 오사카에서 우동 노점상을 시작한다. 이후 오사카 미나미 지역에서 식당을 열고 제대로 된 사업가로서의 인생을 시작했다.
카바레 사업까지 진출했는데, 이게 잘 됐다. 1953년엔 일본 최대 카바레라 불리던 '후지카바레'를 설립하며 부를 손에 거머쥔다. 그러나 성공 뒤의 그림자도 커졌다. 그의 성장과 영향력을 견제하는 세력들의 압박도 강해졌다고 한다.
전후 일본의 혼란 속 살아남아야 했던 한록춘은 자신을 지키기 위해 1957년 일본의 최대 야쿠자 조직인 야마구치구미에 가입한다. 그곳은 '조센징'인 그를 차별 없이 받아 줬다. 그렇게 야마구치구미의 하부 조직인 후지카이의 두목이 됐다.
그렇게 그는 '밤의 시장'이라는 두 번째 별명을 얻었다. 그렇지만 부가 쌓이자 조국이 다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1966년 야쿠자 일에서 손을 뗀 그는 '후지관광'을 차렸다. 당시 그의 자산이 이미 수천억 원에 달했다고 한다.
한록춘은 1963년 어느 날 주오사카 대한민국 총영사관의 사정을 듣게 된다. 1949년 5월 설립된 주일대표부 오사카 사무소가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이미 5차례나 이전을 거듭했고, 어렵게 찾은 새 자리로 들어가기 위해 보증금 2700만 엔이 필요한데 정부가 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한록춘을 비롯해 서갑호, 안재호 등 다섯 동포가 이 돈을 모아 줬다.
이후 재일동포들은 아예 부지를 사 공관을 짓자는 데 뜻을 모은다. 그렇게 1971년 9월 주오사카 총영사관 건설기성회가 발족했고, 한록춘이 회장을 맡았다. 좋은 부지를 찾았으나 일본인 토지주가 "한국인에게는 땅을 팔지 않겠다"라고 하자 일본인 부인을 내세워 땅을 매입하고 한국 정부에 소유권을 이전했다.
영사관 건립을 위한 재일동포들의 모금운동은 장장 3년 6개월간 이어졌다. 건설 도중 1차 '오일쇼크'로 비용이 3배 가까이 뛰면서다. 그럼에도 동포들은 8억 엔에 가까운 비용을 기부해 '기적'을 이뤄냈다.
총영사관에서 열린 기념행사에는 한록춘 씨의 3녀 사위인 유인호 씨가 참석했다. 그는 "장인어른은 일본에서 한국의 존재감을 높이는 것, 오로지 그것만 많이 생각하신 분"이라고 말했다.
유 씨는 "그렇지만 장인께선 한일이 잘 지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셨다. 국교정상화 60주년을 맞는 지금 살아계신다면 한일이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을 것 같다"라고 덧붙였다.
주일 한국대사관은 일본 도쿄 미나토구 미나미아자부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 역시 재일동포들의 조국 사랑과 피땀이 스며든 공간이다.
고 서갑호 방림방적 회장(건설기성회 고문)은 1915년 경남 울주군에서 태어나 14세 때 단신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정화조 청소와 폐지 수집, 껌팔이로 생계를 유지하다 오사카 기시와다에 있는 수건 공장의 수습생으로 취직한다. 그곳에서 배운 방적 기술이 인생을 바꿨다.
방적 기술과 사업 수완을 어느 정도 터득한 서갑호는 1948년 '사카모토 방적'이라는 자신의 회사를 세운다. 작은 공장으로 출발했지만, 일대의 방적 수요를 모두 흡수하며 성장한다. 1954년엔 '오사카 방적'을 설립하고 3년 뒤엔, 경영난에 허덕이던 '히타치 방적회사'를 인수하며 방적 업계에 큰손이 됐다. 한때 오사카에서 소득세를 가장 많이 내는 사업가가 그였다. 그에게 '방적왕'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다.
일본에서 영향력이 큰 인물이 되자 그 역시 조국으로 눈을 돌렸다. 1963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요청을 받은 그는 '태창방직'을 인수해 영등포 단지에 '방림방적'을 세운다. 재외동포 최초의 '모국 투자'이자 한국에 최초로 외국 자본이 유입된 사례이기도 하다.
오늘의 한일관계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일은 주일대사관 부지와 건물을 기부한 것이다. 그 역시 외교력을 키워야 한일관계가 동등해질 수 있다는 일념으로 재일동포 사회에서 리더 역할을 자처했다.
전후 연합군의 통치를 받던 일본은 한국의 대표부 진출과 공관 사용에 크게 관여하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이 국권을 회복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일본은 한국대표부가 무상으로 사용하던 공관에 대해 막대한 비용을 청구했지만 정부가 이를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우리 공관 직원의 호소를 들은 서갑호는 그를 데리고 부촌인 미나미아자부 1번지를 찾아간다. 7934㎡(약 2400평)의 대지에 유럽식 2층 건물, 덴마크 공사관 관저였다.
땅과 부지를 본인의 명의로 매입한 서갑호는 이곳을 1962년까지 정부에 무상으로 빌려준 뒤 기부한다. 1962년 11월 1일 주일 대한민국대표부 청사가 국유화됐다. 서갑호가 기증한 부지의 가치는 오늘날 1조 원을 훌쩍 넘는다.
1965년 6월 22일,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이곳은 대표부에서 대사관으로 승격됐다. 그리고 60년 넘게 한일관계의 주요 거점으로 자리하고 있다.
서갑호의 3녀 서경남 씨는 "아버진 조국에 대한 애정이 큰 분"이라며 "화려하게 나서지 않고 뒤에서 묵묵히 본인의 일을 하셨던 분"이라고 부친을 회고했다.
그는 "아버지께서 생존해 계셨다면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을 굉장히 기뻐하셨을 것"이라며 "아버지는 한일관계 발전을 위해 대가 없이 그저 열심히 하셨다. 젊은 미래세대도 협력하는 데 힘을 쏟아주셨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서갑호나 한록춘은 복잡하고 고난했던 한일관계의 초반에 '강한 조국'을 위해 기여한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단순히 동포사회의 리더를 넘어 한국이라는 '나라'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행동으로 옮겼다.
이들의 피와 땀이 한 건물에서 60년째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한일관계의 큰 의미가 있는 초석을 둔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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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가깝고도 먼 한국과 일본이 올해 국교정상화 60주년을 맞았다. 과거사로 반목하면서도, 변화무쌍한 국제 정세에는 함께 대응해 왔다. 한일관계의 과거, 오늘, 미래를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을 통해 짚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