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가정책, '혁신신약' 가치 외면…"K-바이오 글로벌 경쟁력 위축 우려"

낮은 약가, 글로벌 가격 영향…수출 경쟁력 저하 초래
"비용통제서 산업전략·혁신보상 구조로 재설계 필요"

한 제약바이오 기업 연구원이 물질분석 연구를 하고 있다./뉴스1

(서울=뉴스1) 황진중 기자 = 국내에서 개발된 신약들이 임상적 성과와 기술적 진보를 보이고 있음에도 약가제도가 신약의 혁신 가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채 '저가 의약품' 범주에 묶어두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국내에서 낮게 책정된 약가가 해외 참조가격제에 반영돼 수출 경쟁력을 약화하고 있다는 우려다. 일부 기업이 국내 신약 출시를 미루거나 건너뛰는 '코리안 패싱' 사례 역시 축적되고 있다.

약가 구조, 국산 신약 가치 반영 못 해

16일 정부가 복제약(제네릭) 가격 인하와 등재 순서 차등 적용 등 약가 체계 전반의 개편을 추진하면서 제약바이오 업계에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다.

복제약 약가 산정률이 기존 오리지널 대비 53% 수준에서 40%대로 낮춰질 전망이다. 등재 순서에 따라 적용하는 '계단식 약가' 기준 또한 20개에서 10개 이하로 축소하는 방안이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복제약 약가를 낮추는 대신, 신약에 대한 보상 체계를 강화해 연구개발(R&D) 투자를 유도하겠다는 입장이다.

2012년 대대적인 약가 일괄 인하 이후 이 같은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 당시 정부가 특허 만료 오리지널 약가를 20% 낮추고, 복제약은 53.55%로 고정하면서 전체 의약품 가격이 평균 14~18% 감소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여파로 중소제약사 상당수의 실적이 적자로 전환되고 R&D 예산 삭감과 임상 중단, 구조조정, 필수의약품 생산 중단 등 부작용이 줄을 이은 것으로 알려진다. 한국보건경제정책학회 조사에 따르면 당시 복제약 중심 제약사의 매출은 26~51%까지 급감했다. 이익이 줄자 신약 파이프라인은 후퇴했고, 글로벌 수출 경쟁력 역시 약화했다는 평가다.

제약바이오 업계 관계자들은 "단기적인 약가 절감에만 초점을 맞춘 정책은 산업 기반을 붕괴시키고 있다"면서 "현 제도는 신약의 혁신 가치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오히려 R&D 위축과 고용 불안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업계는 약가제도가 혁신신약의 가치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일부 혁신신약은 우대 약가 적용 자체를 받지 못했고, 우대를 받더라도 최대 3~5년의 한시적 기간 이후에는 일반 복제약과 동일한 수준으로 가격이 낮아질 수 있다. 신약개발에 수천억 원을 투입하더라도 장기적인 수익 회수가 어렵다는 구조적 한계가 존재하는 셈이다.

한 시민이 서울 시내에 있는 약국에 들어가고 있다./뉴스1 안은나 기자
약가 우대 '사각지대'…국산 신약 역차별

대웅제약의 34호 국산 신약 '펙수클루'와 제일약품의 37호 국산 신약 '자큐보'는 P-CAB 계열 시장을 개척한 대표 사례다. 그러나 두 제품 모두 약가 우대를 받지 못했다. 이들 신약의 약가는 기존 유사 약제의 평균 가격을 기준으로 산정된다. 기술적 성과 대비 지나치게 낮은 수준이 책정됐다는 평가다. 펙수클루는 약 939원, 자큐보는 910원으로, 첫 P-CAB 계열 신약 '케이캡' 약가의 약 70% 수준이다.

과거에는 국산 신약의 혁신성을 일정 부분 인정해 약가 산정 시 우대하는 제도가 있었으나, 2018년~2019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이후 국산 약가 우대 조항이 대부분 삭제되면서 사실상 사라졌다.

이후 지난해 3월 혁신형 제약기업이 개발한 신약에 대해 약가 우대를 적용하는 제도가 신설됐지만, 그전에 등재된 신약은 대상에서 제외됐다. 펙수클루와 자큐보가 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유다.

펙수클루는 기존 위식도역류성질환 치료제 평균 약가보다 약 10% 낮은 수준에서 가격이 결정되며 글로벌 시장에서도 경쟁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중국에서는 우리나라의 참조가격제 영향으로 펙수클루가 약 900원대에 머무는 반면, '보신티'와 케이캡은 2000원대 약가를 받고 있다.

제약바이오 업계 관계자는 "펙수클루, 자큐보처럼 분명한 기술 혁신을 이뤘음에도 약가 우대를 받지 못한 국산 신약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건 현 제도의 한계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고 말했다.

이어 "국산 신약이 해외에서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으려면 국내에서부터 합리적인 평가와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면서 "혁신신약의 약가를 기존 약제와 동일 선상에서 묶어두는 방식이 지속된다면, 결국 산업 전체의 성장동력 약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한 환자가 서울에 있는 상급종합병원 복도를 걸어가고 있다./뉴스1 구윤성 기자
반복되는 약가 인하, '코리안 패싱' 초래

지속적인 약가 인하는 글로벌 제약사의 국내 출시 우선순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국제약협회(PhRMA)에 따르면 최근 10년(2012~2021년) 동안 전 세계에서 개발·허가된 460개 신약 가운데 우리나라에 도입된 치료제는 33%에 그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41%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해외에서 출시된 뒤 한국에 도입되기까지는 평균 2년이 소요된다. 출시 첫해 내 국내에 들어오는 비율은 5%에 불과하다. 이는 OECD 평균 약 18%와 비교해 3배 이상 낮은 수치다.

우리나라 기업 역시 '코리안 패싱'을 선택한 것 아니냐고 의심을 받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기업 A는 미국과 유럽에 신약을 출시한 후 약 6년간 국내에 이를 출시하지 않았다. 업계는 국내 약가가 지나치게 낮게 책정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인 것으로 파악한다. 해당 약물은 미국에서 5만~6만 원대, 유럽은 7000~9000원대에 판매된다. 국내에서는 약 3000원 안팎이 될 것으로 전해진다.

우리나라의 낮은 약가 수준은 글로벌 참조가격제 속에서 해외 약가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가 중국, 사우디아라비아, 캐나다 등 주요 국가의 참조가격국으로 지정되면서 국내에서 낮게 책정된 가격이 해외에서도 그대로 반영되는 구조가 굳어지고 있다.

업계는 국내 개발 신약이 해외에서도 낮은 가격을 받을 가능성이 커져 수출 경쟁력이 떨어지고, 이는 다시 국내 판매 가격 압박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초래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흐름이 지속될 경우 혁신 신약의 국내 출시가 더욱 늦어지고, 국내 환자가 치료 혜택을 가장 늦게 누리는 상황까지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 전경.(한국제약바이오협회 제공)/뉴스1
약가제도 재설계 필요…"혁신신약 보상체계 강화해야"

업계는 현 제도가 지속될 경우 국내 제약산업의 기반이 붕괴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중견·중소 제약사는 매출 감소를 감당하기 어려워 생존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다. 지속적인 약가 인하는 생산·품질관리·R&D 전반의 위축으로 이어지고, 산업의 중간층이 무너지면 공급 안정성과 신약 개발 모두에 타격을 줄 수 있다. 치료 선택지가 줄고, 의료비 부담이 증가하는 역효과로 이어질 수 있다.

업계는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신약개발에 대한 보상 체계 강화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신약개발에는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는 만큼, 혁신 가치를 적절히 보상하지 못하면 R&D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지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제약바이오 업계 관계자는 "약가제도는 비용 통제를 넘어서 국가 산업 전략과 혁신 철학을 반영해야 한다"면서 "국산 신약이 글로벌 시장에서 정당한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혁신을 의료비 절감 대상이 아닌 국가적 자산으로 보고 보상하는 방향으로 제도가 재설계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정부의 결정에 한국제약바이오협회는 '산업 발전을 위한 약가제도 개편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적극 대응을 준비하고 있다.

비대위는 "추가 약가 인하는 R&D 투자와 제조 기반을 약화하고, 고가 수입 약 의존도를 높여 보건안보를 흔들 수 있다"면서 "재정 절감 중심이 아닌, 산업 생태계와 혁신 보상 구조를 함께 고려한 합리적 조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jin@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