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위 주세요" 한마디에 척척…수술실 들어온 휴머노이드 로봇
삼성서울병원, 담낭절제술 시연 통해 미래 수술실 청사진 제시
의료진 움직임 학습해 수술 보조 수행…2029년 임상시험 목표
- 천선휴 기자
(서울=뉴스1) 천선휴 기자 = "가위 주세요."
집도의의 말이 끝나자마자 로봇 팔이 움직였다. 트레이 위 수술 도구들 사이에서 가위를 집어 올린 로봇은 곧바로 의사 앞으로 가져갔다.
잠시 뒤에는 반대 장면이 펼쳐졌다.
"툴 가져가."
이번에는 사용을 마친 수술 도구를 받아 정리했다.
불과 몇 초 사이 벌어진 일이다. 수술실에서는 익숙한 풍경이지만 이날 집도의의 요청에 응답한 것은 간호사도 전공의도 아니었다. 사람과 함께 수술하는 휴머노이드 로봇이었다.
16일 서울 강남구 삼성생명 일원역 빌딩. 삼성서울병원이 공개한 휴머노이드 수술 보조 로봇 시연회 현장에서는 인간 의사와 휴머노이드 로봇 2대가 한 팀이 돼 담낭절제술을 재현했다.
수술대 위에는 사람 대신 염소 간이 놓여 있었다. 복강경 화면에는 담낭과 혈관 구조가 실시간으로 비쳤고 한 대의 로봇은 수술 도구를 전달하는 간호사 역할을 맡았다. 다른 한 대는 복강경을 잡고 시야를 유지하면서 조직을 당기는 보조 의사 역할을 수행했다.
집도의는 오직 음성으로 로봇을 지휘했다. "가까이." "조금 더 깊이."
명령이 떨어질 때마다 로봇은 복강경 위치를 조정하고 조직을 견인했다. 집도의는 실제 수술과 같은 방식으로 담낭을 박리하고 혈관을 클립으로 결찰한 뒤 절제했다.
이날 시연에 등장한 로봇은 수술실에서 의료진과 함께 일하는 휴머노이드 수술 보조 로봇을 목표로 개발 중인 '오케스트라'(ORchestra·Operating Room Collaborative Humanoid)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보건복지부 한국형 ARPA-H 사업의 지원을 받아 삼성서울병원을 중심으로 레인보우로보틱스, 에이딘로보틱스, 서울대, 성균관대, 국립암센터, 전북대병원 등이 참여하고 있다.
이날 시연은 완성된 제품을 선보이는 자리가 아니라 미래 수술실의 한 장면을 미리 구현해 보는 성격에 가까웠다. 그러나 현장에서 드러난 의미는 단순한 연구 성과 공개 이상이었다. 의료진이 지시하고 휴머노이드가 응답하는 협업 구조가 실제 수술 장면 속에서 구현되면서 연구진이 그리는 미래 수술실의 윤곽이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연구진은 이를 영화 '리얼 스틸'에 비유했다. 인간의 동작을 학습한 로봇이 그대로 복싱을 수행하는 것처럼 휴머노이드 역시 의료진의 움직임을 학습해 수술실 업무에 적용한다는 설명이다.
정용기 삼성서울병원 이비인후과 교수는 "휴머노이드 수술 보조 로봇은 사람의 손과 팔의 움직임을 로봇 좌표계로 변환해 수술실 안에서 구현한다"며 "이를 통해 의료진의 조작 입력을 작은 동작 단위로 표현하는 정밀한 수술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프로젝트의 핵심은 단순히 로봇 팔을 움직이는 데 있지 않다. 연구진은 수술실 자체를 하나의 '서지컬 데이터 팩토리'(Surgical Data Factory)로 바꾸고 있다.
정 교수는 "의사들이 수술하면서 몸으로 익힌 암묵지를 데이터로 바꾸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수술실 천장 카메라는 의료진의 움직임을 기록한다. 손과 손가락의 세밀한 움직임은 착용형 센서를 통해 수집된다. 복강경 영상은 수술 장면, 사용 기구, 술기 단계를 의미하는 '액션 트리플렛'(Action Triplet) 형태로 정리된다.
현재 삼성서울병원을 비롯한 4개 기관은 표준화된 방식으로 데이터를 축적하고 있다. 수술 참여자의 동의를 받은 뒤 익명화 과정을 거쳐 AI 학습에 활용한다. 이렇게 모인 데이터는 단순히 "가위를 집어라" 수준이 아니다. 연구진은 이미 복강경 영상을 보여주면 AI가 다음 수술 단계와 필요한 기구를 예측하는 알고리즘을 개발해 논문으로 발표했다. 장기적으로는 집도의가 말하기 전에 필요한 도구를 미리 준비하거나, 수술 흐름을 이해해 자연스럽게 보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다만 아직 갈 길은 남아 있다. 정 교수는 "현재는 A라는 수술 장면을 보여주면 AI가 다음 행동을 상당히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지만 A 의사와 B 의사의 미세한 술기 차이까지 반영하는 수준은 아니다"라며 "궁극적으로는 수술실 전체 맥락을 이해하는 파운데이션 모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날 기자들의 질문은 자연스럽게 글로벌 경쟁으로 이어졌다. 특히 지난해 일론 머스크가 "AI가 3년 안에 외과의사를 대체할 것"이라고 언급한 배경에 관심이 쏠렸다. 정 교수는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해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로보틱스'(Science Robotics)에는 AI가 돼지 담낭절제술을 수행한 SRT-H(Surgical Robot Transformer-Hierarchy) 연구가 발표됐다. 다만 살아 있는 동물이 아니라 적출된 장기를 대상으로 진행된 실험이었다.
또 올해 7월에는 미국 UC샌디에이고 연구진이 국제학술지 네이처(Nature)에 휴머노이드 로봇이 원격조작을 통해 돼지 모델 수술을 수행한 결과를 발표했다.
정 교수는 "일론 머스크의 발언은 선언적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맞다"며 "3년 안에 외과의사가 사라진다는 뜻은 아니지만 결국 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네이처에 발표된 연구도 휴머노이드는 원격 조종됐고 수술 보조는 사람이 수행했다"며 "텔레오퍼레이션 로봇과 휴머노이드 2대가 함께 수술팀을 구성한 형태는 우리가 처음"이라고 강조했다.
한국의 위치에 대해서도 자신감을 보였다. 오남기 삼성서울병원 이식외과 교수는 "실제 의료진과 여러 대의 로봇이 팀을 이뤄 협업하는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며 "정교한 술기를 가진 의료진과 로봇·AI 기술이 결합하면 한국이 충분히 선도할 수 있는 분야"라고 말했다.
연구진은 1단계 사업비 약 14억 원을 지원받아 기술 검증을 수행 중이다. 올해 말 예정된 경쟁 평가를 통과하면 약 120억 원 규모의 추가 연구비를 확보하게 된다. 전체 사업 규모는 정부 지원 연구개발비 기준 약 138억 원 수준이다.
정 교수는 "로봇 개발뿐 아니라 임상시험, 안전성 검증, 법·제도 연구, 사용성 평가, 시연 비용까지 모두 포함된 금액"이라며 "국가가 모든 비용을 부담하는 구조가 아니라 각 기관의 자체 투자도 함께 들어간다"고 설명했다.
상용화 이후 경제성에 대한 질문도 이어졌다. 휴머노이드가 실제 병원에 들어왔을 때 과연 사람보다 저렴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다.
연구진은 오히려 인력난이 심화하는 의료현장에서 경제성이 충분할 것으로 보고 있다. 정 교수는 "24시간 자리를 유지하려면 실제로는 한 명이 아니라 5명 이상의 인력이 필요하다"며 "휴머노이드가 간호사 한 명 수준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면 투자비를 회수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그는 "전제는 로봇이 실제로 사람 역할을 대체할 만큼 성능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연구진이 제시한 첫 번째 목표 시점은 2029년이다. 이들은 내시경 유지, 시야 확보 같은 상대적으로 위험도가 낮은 역할부터 실제 환자 대상 임상시험에 진입한다는 계획이다. 이후 조직 견인과 수술 보조로 범위를 넓혀간다. 절개와 봉합 같은 고난도 술기는 더 긴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럼에도 연구진은 방향만큼은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수술실에서 인간을 몰아내는 로봇이 아니라, 사람과 협업하는 새로운 팀원을 만드는 것이다.
정 교수는 "사람이 수술하기 어려운 환경, 반복적이고 고된 노동을 동반하는 영역에서 휴머노이드 수술 보조 로봇이 사람을 도울 수 있다면 환자에게 더 유리한 수술 환경을 조성할 수 있다"면서 "제한된 의료인력으로 수술을 더욱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숙련된 수술 보조 인력을 확보하기 어려운 야간·응급 및 필수 의료 현장의 인력 공백을 보완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sssunhue@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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