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라서 소외되지 않게"…희귀질환자에 기적을 선물한 공무원
환자 삶 바꾼 '적극 행정'으로 녹조근정훈장 받은 김지영 질병청 과장
'진단 방랑' 줄이고 특수식 지원까지…"국민이 원하는 정책 해야"
- 천선휴 기자
(오송=뉴스1) 천선휴 기자 = 대한민국에서 '희귀질환자'로 살아간다는 건 외롭고 막막한 일이다. 시장성이 낮다는 이유로 치료제 개발은 더디고 일상에서 먹어야 하는 필수 식단조절용 식품조차 구하기 어려워 각자도생하기 일쑤다. 이 같은 어려움 속에서 환우 가족들의 손을 잡고 "소수일지라도 국가가 나를 돌보고 있다"는 확신을 준 공직자가 있다. 지난 6월까지 질병관리청 희귀질환관리과를 이끈 김지영 과장이다.
김 과장은 창의적이고 적극적인 업무 추진으로 환우 가족들의 경제적·심리적 부담을 실질적으로 경감한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7일 '제6회 적극행정 유공포상' 녹조근정훈장을 수여받은 데 이어 13일 질병청 '특별성과포상금 수여식'에서 대상을 거머쥐었다. 정부혁신 우수사례 인사혁신처장상 등 주요 상을 싹쓸이하기도 했다.
특히 소수 약자를 위한 김 과장의 헌신적인 적극행정 사례는 정부 내에서도 큰 울림을 줬다. 한성숙 국무총리도 김 과장의 사례를 보고 "이렇게 훌륭한 공무원의 모범 사례는 더 널리 알려야 한다"고 평가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 안팎의 주목을 받고 있지만, 집에 돌아가면 김 과장은 그저 평범한 '고3 엄마'다. 주변의 요란한 축하와 달리 정작 집에서는 별도의 파티 없이 조용히 지나갔다. 김 과장은 "아들이 고3이다 보니 그렇게 됐다"며 "엄마 입장에선 솔직히 나보다는 아들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이 더 크더라"라며 웃어보였다. 김 과장의 이런 '엄마의 마음'은 희귀질환 환우와 가족들의 고통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정책을 밀어붙이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됐다.
현재 질병청이 지정해 관리하는 국가 관리대상 희귀질환은 총 1389종에 달한다. 2024년 1314개에서 지난해에만 75개 질환이 새로 추가됐다. 김 과장이 부임한 이후 가장 가슴 아프게 들여다본 것은 환자들이 제대로 된 진단을 받지 못해 여러 병원을 전전하는 이른바 ‘진단 방랑’ 문제였다.
"우리나라 희귀질환 환자들이 정확한 병명을 진단받기까지 평균 7.4년이라는 시간이 걸립니다. 치료를 시작하기도 전에 고비용의 검사비와 정보 부족으로 '진단 방랑'을 겪으며 가족 전체가 피폐해지죠. 그래서 의심 환자들을 위한 진단 지원 건수를 2024년 410건에서 올해 1150건까지 대폭 확대했습니다. 생계와 치료를 포기하지 않도록 의료비 지원 대상 질환을 넓히고 전 연령 기준을 소득 기준 140% 미만으로 전면 완화했죠."
가장 대표적인 현장 중심의 성과는 당원병 환아들을 위한 특수 옥수수전분인 '글리코세이드' 지원 사업이다. 당원병은 혈당 조절이 되지 않아 저혈당 쇼크 위험이 상존하는 질환이다. 밤사이 쇼크를 막기 위해 부모들은 새벽마다 아이를 두세 차례 깨워 일반 전분을 먹여야만 한다. 7~8시간 동안 혈당을 유지해 주는 '글리코세이드'라는 해외 제품이 있었지만 국내 유통 및 안전관리체계가 없어 지원이 묶여 있었다. 김 과장은 "아기를 낳아봐서 신생아들 밤낮 바뀌기 전까지 계속 깨워서 먹이는 게 얼마나 힘든 지 안다"며 "상식적으로 안 되는 게 이상한 거라 생각하고 해결하기로 맘먹었다"고 말했다.
"당원병 부모들은 아이가 클 때까지 수학년 동안 매일 밤잠을 설쳐야 해요. 잠을 못 자니 아이는 키도 안 클 거고 학업도 문제가 되죠. 근데 7~8시간 혈당이 유지되는 특수 전분이 해외에 있는데도 국내에선 스포츠 의료용품으로 분류돼 제도권 안에서 지원을 못 해주고 있었어요. 이건 무조건 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 과장은 법률 자문을 구하고 관련 의료 학회 및 식약처와 협의해 '적극행정위원회'를 통해 정면으로 문제를 풀어냈다. 전문의 처방을 통해 특수 옥수수전분을 지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자, 한 부모가 블로그에 남긴 '새벽에 통잠을 잘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났다'는 글 아래로 감사의 댓글이 쏟아졌다. 김 과장은 "20년 넘게 공무원 생활을 했지만 상대방으로부터 이런 피드백이 오기가 쉽지 않거든요. 정말 사명감이 생기는 원동력이 됐다"고 강조했다.
선천성 대사이상 환자들이 치료제만큼이나 중요하게 먹어야 하는 '저단백 즉석밥' 공급 체계를 구축한 것 역시 그녀의 집념이 만든 성과다. 국내에서는 CJ제일제당만 생산해 품절이 잦았고, 제품을 구하지 못한 환자들은 온라인에서 개당 1700원짜리를 1만 원이 넘는 가격에 구매하거나 일본에서 직접 구매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안 되면 어쩔 수 없지만 해보긴 해보자고 해서 CJ측과 회의를 잡았죠. 일반 밥보다 단백질을 제거하고 다시 말리는 공정이 몇 배나 더 들어서 기업에서도 손해인데 감사하게도 사회공헌 차원에서 10만 개를 더 추가 생산해 주겠다고 하셨어요. 돈이 왔다 갔다 하는 민감한 문제는 환자 연합회에서 직접 맡아주셨고요."
이 과정을 거쳐 '희귀질환 헬프라인'을 통한 공급 체계가 마련되면서 환자들은 품절 걱정 없이 안정적으로 제품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됐다. 가격도 일정하게 유지되면서 연간 1인당 약 650만 원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게 됐다.
여기에 겉으로 보이지 않는 내적 질환이 많아 새 학기마다 선생님에게 아이의 상태를 눈물로 설명해야 했던 부모들의 피로를 덜어주고자 지난해 5월부터는 영유아 및 초등 교직원을 위한 '질환별 안내서'를 매달 2개씩 기획·제작해 배포해 오고 있다.
이러한 김 과장의 행보는 평소 "소수라서 소외되지 않는 정책을 펼쳐라"라고 강조해 온 대통령의 국정 철학이 현장에서 완벽하게 구현된 모범 사례로 평가받는다. 전 국민이 혜택을 보는 대형 사업은 아닐지라도 국가의 손길이 가장 시급한 극소수의 약자들을 위한 촘촘한 복지를 실현해 냈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은 과를 옮겼지만 김 과장은 희귀질환 정책의 미래를 위한 중장기적 인프라인 '레지스트리'(환자 정보 등록 체계) 구축 사업의 초석을 다지다 자리를 옮겼다. 그는 희귀질환 분야가 여전히 국가적으로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은 미지의 영역'임을 강조했다.
"희귀질환 치료제는 전체 환자의 5%밖에 안 돼요. 나머지 95% 분들은 약이 개발되기 전까지 평생 관리를 해야 하거든요. 장애인처럼 돌봄이나 재활이 더 필요할 수도 있는데 1400여 종에 달하는 질환별로 라이프 로그 같은 조사가 되어 있지 않으면 정책적으로 접근하기가 되게 쉽지 않아요."
그녀가 임기 막바지까지 국립보건연구원(NIH)의 연구 예산을 활용해 레지스트리 구축을 서두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올해 NIH와 협업해서 레지스트리를 빨리 구축하는 작업을 시작했어요. 적어도 10개, 20개 질환부터 먼저 우선순위를 둬서 데이터 인프라를 구축해 놓으려 합니다. 그래야 어느 환자가 어느 병원에 있는지 명확히 알 수 있고, 글로벌 제약사들이 임상시험을 하거나 신약을 개발할 때 어떤 약제를 투여했을 때 부작용이 뭐고 효과가 뭔지 샘플 데이터를 제공할 수 있거든요. 이 분야는 정말 무궁무진합니다. 규제 부처에 가면 단순 민원인이 되기 쉬운 제약·의료기기·특수식 업체들을 모아 '희귀질환 지원 정책 협의체'를 운영한 것도 합리적인 정책 유지를 위한 환경을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인터뷰 말미, 적극행정의 정의를 묻자 김 과장은 잠시 말을 고른 뒤 이렇게 답했다.
"대통령께서 말씀하신 '소수라도 소외되지 않는 정책'의 핵심도 결국 국민이 무엇을 원하는지 캐치하고 빠르게 행동하는 데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하고 싶은 정책을 하는 게 아니고 진짜로 대상자가 원하는 게 뭔지를 듣고 거기서 할 수 있는 것을 빨리 하는 것, 그게 적극행정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지난 1일 결핵정책과로 자리를 옮긴 김 과장은 "어떤 분야든 현장에서 필요한 정책은 반드시 있다"며 "환자들이 실제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듣고 해결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바꿔나가겠다"고 말했다.
sssunhue@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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