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빼는 약인 줄 알았는데 암 예방까지?…'기적의 비만약' GLP-1의 진화 [저널톡]

ASCO서 유방암 발생 위험 감소·암 전이 억제 연구 발표
심혈관·신장질환 등은 효과 입증…암 분야 적응증 확대 기대

ⓒ 뉴스1 윤주희 디자이너

(서울=뉴스1) 천선휴 기자 = 비만 치료제로 전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킨 GLP-1 계열 약물이 암 분야에서도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심혈관질환과 신장질환에서 효과를 입증한 데 이어 최근에는 유방암 예방과 암 진행 억제 가능성을 보여주는 연구 결과까지 잇따라 발표되면서 활용 범위가 어디까지 확대될지 주목된다.

GLP-1 수용체 작용제는 당초 제2형 당뇨병 치료제로 개발됐다. 이후 위고비(세마글루타이드), 마운자로(티르제파타이드) 등이 비만 치료제로 사용되면서 전 세계적으로 처방이 급증했다.

실제로 GLP-1은 최근 5년간 의학계에서 가장 빠르게 영역을 넓힌 약물 중 하나로 꼽힌다. 체중 감량 효과를 넘어 심근경색과 뇌졸중 위험 감소, 신장 기능 보호 효과 등이 대규모 임상시험을 통해 확인되면서 단순한 비만 치료제가 아닌 대사질환 전반을 관리하는 약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 같은 흐름 속에서 최근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미국임상종양학회 연례학술대회(ASCO 2026)에서는 GLP-1의 항암 효과 가능성을 시사하는 연구들이 잇따라 발표됐다.

가장 주목받은 연구는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페렐만 의과대학 엘리자베스 맥도날드 박사 연구팀이 발표한 유방암 예방 연구다. 연구팀은 45~80세 과체중 여성 11만1000여 명을 분석한 결과, 이 중 GLP-1 계열 약물을 처방받은 약 1만5000명은 그렇지 않은 여성들보다 유방암 발생 위험이 35.1% 낮았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연령과 인종, 체질량지수(BMI), 당뇨병 여부 등을 보정한 이후에도 비슷한 결과가 유지됐다고 설명했다. 특히 유방암 고위험군으로 분류되는 비만 여성들만을 대상으로 한 분석에서도 위험 감소 신호가 확인됐다.

연구팀은 이러한 결과가 단순한 체중 감소 때문만은 아닐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GLP-1 약물이 체중 감량을 유도하는 과정에서 만성 염증을 줄이고 대사 상태를 개선하는 것은 물론 암 성장과 관련된 여러 신호 전달 경로에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암 진행을 늦출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미국 클리블랜드클리닉 연구진은 폐암·유방암·대장암·간암 등 비만 관련 암 환자 1만2112명을 분석한 결과 GLP-1 사용군의 원격 전이 또는 4기 진행 위험이 38~50% 낮았다고 보고했다.

암종별로는 비소세포폐암에서 50%, 유방암에서 43%, 간암에서 38%, 대장암에서 31%의 위험 감소 효과가 관찰됐다. 연구진은 종양 내 GLP-1 수용체 발현이 높은 환자일수록 생존율도 높았으며 특히 유방암에서는 사망 위험이 45% 낮게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이준엽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 내분비내과 교수는 "최근 발표되는 연구들을 보면 GLP-1 수용체 작용제는 단순한 혈당강하제나 비만 치료제를 넘어 다양한 만성질환에 영향을 미치는 약제로 진화하고 있다"며 "의료계에서는 GLP-1을 단순히 체중을 줄이는 약이 아니라 '질병 수정 치료제(Disease-Modifying Therapy)'로 바라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어 "비만이 심혈관질환과 만성콩팥병, 지방간, 일부 암의 공통 위험인자인 만큼 체중 감소와 함께 염증 조절, 대사 개선, 혈관 보호 효과를 통해 여러 질환의 발생 자체를 줄일 가능성이 있다"며 "특히 최근에는 유방암, 대장암, 간암, 폐암 등 비만 관련 암에서 발생 위험 감소와 암 진행 억제 가능성을 보여주는 연구들이 잇따라 발표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전문가들은 아직 GLP-1 약물을 암 예방이나 암 치료 목적으로 사용하기에는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고 보고 있다. 현재 발표된 연구들은 대부분 실제 진료 데이터를 활용한 관찰 연구로, 체중 감소 효과와 약물의 직접적인 항암 효과를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현재 단계에서는 인과관계를 입증한 무작위 임상시험 결과가 아닌 만큼 암 예방이나 치료 목적으로 사용을 권고하기에는 이르다"며 "암 분야는 아직 연구 초기 단계로 추가적인 임상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GLP-1의 적응증 확대가 항상 성공한 것은 아니다. 암 분야와 함께 가장 큰 기대를 모았던 영역 중 하나가 치매였지만 지난해 11월 공개된 노보노디스크의 대규모 임상시험에서는 세마글루타이드가 알츠하이머병 진행을 유의하게 늦추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치매 치료제로서의 가능성에 제동이 걸린 것이다.

반면 심혈관질환과 신장질환 분야에서는 이미 상당한 수준의 근거가 축적됐다. 대규모 임상시험을 통해 심근경색과 뇌졸중, 심혈관 사망 위험 감소 효과가 확인됐으며 만성콩팥병 환자에서는 신기능 악화를 늦추는 효과도 입증됐다. 최근에는 대사이상지방간염(MASH) 치료 영역에서도 활용 가능성이 확대되고 있다.

이 교수는 "심혈관·신장·대사질환 영역은 이미 근거 수준이 높은 임상시험 결과가 축적돼 현재 가장 기대되는 분야"라며 "최근에는 지방간염에서 염증과 간섬유화를 개선하는 결과까지 확보하면서 비만을 기반으로 발생하는 전신 질환을 동시에 관리할 수 있는 치료제로 평가받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향후 암 분야에서도 현재의 관찰 연구 결과가 임상시험을 통해 확인된다면 GLP-1은 암 예방 전략에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sssunhue@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