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풍노도의 '문민정부' YS 시대, '공과' 뚜렷했던 5년

집권 초 '하나회' 척결·금융실명제 등 힘입어 지지율 90% 육박
'IMF 외환위기' 초래+친인척·측근 비리로 빛바랜 임기 말 보내

[편집자주]

국회 직원들이 23일 오전 국회의사단 본관 앞에 설치된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 국가장 분향소에서 조문을 마친 뒤 이동하고 있다. 2015.11.23/뉴스1 © News1 박지혜 기자


22일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가운데 재임 중 공과(功過)가 가장 뚜렷한 대통령으로 꼽힌다.

임기 말 '외환위기' 초래와 측근·친인척 비리 등을 이유로 국민적 비난을 사기도 했지만, 재임 중 그가 도입한 금융실명제, 공직자 재산공개 등의 정책들은 우리 사회가 한 단계 성숙·발전해가도록 하는 기반이 됐다는 평가가 많다.

지난 1993년 2월 제14대 대한민국 대통령에 취임한 김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군사정변' 이후 32년 간 계속됐던 군사정권을 종식시키면서 이른바 문민(文民) 정부 시대를 열었다.



특히 문민정부를 "5·18광주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부"(1993년 5·13특별담화에서)라고 규정했던 김 전 대통령은 취임 초 군사정권을 지탱해온 군부 내 사조직 '하나회'를 일거에 척결했다.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제정 이후엔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 신(新)군부 출신 인사들을 법정에 세움으로써 "성공한 쿠데타도 처벌할 수 있다"는 전례를 만들었다.

김 전 대통령은 또 청와대 주변의 '안가(安家·안전가옥)'를 없애고 청와대 앞길을 개방했다.

또 "정치와 경제의 검은 유착"이 각종 비리의 원인이 된다고 판단한 그는 재임 중 금융계좌와 부동산의 양대 '실명제'를 통해 과세 투명성을 확보하는 기반을 마련했고, 공직자 재산공개 제도를 도입하면서 공직 사회에서 부정축재를 퇴출시키는 데도 힘썼다.

김 전 대통령은 또 '역사 바로 세우기'에 힘써 일제 침략의 상징이었던 옛 조선총독부 청사를 폭파 철거하고,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바꿨으며, 전국 곳곳에 박혀 있던 쇠말뚝을 제거했다. 독도에 접안시설이 설치된 것도 김 전 대통령 재임 중의 일이다.

일각에선 김 전 대통령이 행한 일련의 조치들이 군부 세력에 대한 보복 등 다분히 '정치적 목적'에서 이뤄졌다는 분석을 내놨지만, 국민 여론의 호응도는 높아 집권 초 김 전 대통령에 대한 국정수행 지지율은 80~90%대에 육박했다.

지방자치제도의 확대·시행을 통해 이른바 '풀뿌리 민주주의'의 기틀을 마련한 것 역시 김 전 대통령의 주요 업적 가운데 하나다.

이외에도 김 전 대통령 임기 중 우리나라는 연평균 7%대의 경제성장과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 돌파 등에 힘입어 일본에 이어 아시아 국가 중 두 번째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으로 가입(1996년 12월)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OECD 가입 등 당시 정부가 '세계화'란 구호 속에 급속도로 추진한 시장 개방 정책은 결과적으로 우리 경제의 구조적 부실 요인을 드러내면서 김 전 대통령 임기 말 '환란(換亂)'으로까지 이어졌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정부가 추진 중이던 재벌개혁이 지지부진하던 차에 1997년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촉발된 외환위기는 해외은행들의 대출 중단과 만기연장 거부 등으로 이어지면서 국내에서도 급격한 자본 유출을 가져왔고, 이 과정에서 한보철강과 삼미그룹, 기아자동차, 한라그룹 등의 대기업이 줄줄이 도산하고 말았다.

이에 정부는 1997년 11월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 지원을 요청했고, IMF는 그해 12월 550억달러 상당의 긴급자금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국내 금융회사와 대기업 등의 구조조정을 요구, 이는 기업들의 인원 감축에 따른 대규모 실업 사태로 이어지게 된다.

비슷한 시기 차남 현철씨를 비롯해 홍인길 전 청와대 총무수석비서관 등 측근들이 연루된 권력형 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김 전 대통령은 대국민사과 성명을 발표해야 했다.

김 전 대통령은 또 취임 초엔 국군기무사령관의 대통령 독대 보고를 없애는가 하면,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의 정치개입 금지를 골자로 한 안기부법 개정을 단행하는 등 '정보 정치'와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였지만, 안기부의 도청 담당 '미림팀'은 해체 1년 만인 1994년 6월 부활해 주요 인사들의 동향을 파악해온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당시 여당이던 신한국당의 노동 관계법 및 안기부법 개정안의 날치기 처리, 그리고 1995년 지방선거와 96년 국회의원 총선거 당시 안기부 자금이 신한국당의 선거자금으로 쓰였다는 '안풍(安風)' 사건 등 또한 결과적으로 김 전 대통령의 '허물'이 됐다.

외교·안보 분야에선 취임 초부터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씨를 북한에 돌려보내는 등 남북한 화해 정책에 나서 김일성 주석과의 정상회담까지 추진했으나, 1994년 7월 김 주석의 사망으로 무산되면서 남북관계는 다시 냉각기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북핵(北核) 대응 등을 위한 미국과의 공조에서도 '엇박자'를 낸 경우가 왕왕 있었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를 비롯한 대형 인명피해 사고가 김 전 대통령 집권 중 잇따랐다는 점도 계속 회자된다. 압축성장 시기 지어졌던 건축물들이 이 시기를 전후로 그 문제점을 드려낸 것이다.

때문에 임기 말 김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10% 밑으로 추락하기도 했다.

이는 결국 '정권교체'의 빌미가 돼 1997년 대선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영원한 경쟁자'로 불려왔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당선으로 이어졌다.

"영광의 시간은 짧았지만, 고통과 고뇌의 시간은 길었다"(1998년 2월 대통령 퇴임사)는 말을 남기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김 전 대통령은 지병으로 향년 88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어갔다.

ys4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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