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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미스터 션샤인'과 1920년대 뉴욕의 한인들

(서울=뉴스1) 조성관 작가 | 2023-03-16 12:00 송고 | 2023-03-16 19:24 최종수정
1927년 뉴욕 한인들이 기증한 연세대 백양로에 있는 기념석. 태극마크가 선명하다. /사진=조성관 작가 
1927년 뉴욕 한인들이 기증한 연세대 백양로에 있는 기념석. 태극마크가 선명하다. /사진=조성관 작가 

서울 연세대학교 정문을 들어서면 일직선으로 곧게 뻗은 길이 나온다. 백양로다. 연세대 캠퍼스를 처음 와본 사람에게는 이 백양로가 길고도 멀게 느껴진다. 하물며 수업 시간이 아슬아슬한 학생들에게 이 백양로는 야속하기만 하다.

백양로가 끝나는 부분에서 길은 세 갈래로 갈라진다. 왼편 언덕길은 인문대학인 외솔관으로 통하는 길이다. 언덕길 중간쯤에 윤동주 시비가 세워진 '윤동주 문학동산'이 보인다. 오른편 언덕길은 청송대와 안산으로 이어진다. 가운데 길은 본관으로 이어지는 화강암 계단이다. 계단 가운데에 화강암 표석이 비스듬히 누워 있다.

'뉴욕에 있는 우리 겨레로부터 붙여줌. 1927 Donated by Korean Friends in New York'

이 계단을 올라서면 언더우드 상이 나타나고, 그 뒤로 보이는 담쟁이에 뒤덮인 고색창연한 건물이 연세대 본관 언더우드관이다. 내 나이 푸르를 때 이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수없이 이 표석을 스쳐 지나갔다.  

'1927년에 뉴욕에 한국인이 살았고, 그들이 조국 독립을 염원하며 기부를 했구나.'

생각은 거기서 멈췄다. 내가 한국 근대사에 관심이 많았다면 '1927년 뉴욕의 한국인들'에 대한 궁금증을 탐구심으로 발전시켰을지도 모른다.

'미스터 션샤인'의 주인공은 실존 인물

5년 전 히트했던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이 드라마의 주인공 '유진 초이'는 실존 인물인 애국지사 황기환(188?~1923)을 모델로 했다. 황기환 지사는 뉴욕에서 사망, 뉴욕시 퀸스의 공원묘지 마운트 올리벳(Mount Olivet)에 묻혔다.

오랜 세월 망각 속에 묻혔던 황 지사의 묘가 발견된 것은 2008년. 국가보훈처는 박근혜 정부 시절인 2013년부터 황 지사 유해봉환을 추진해 왔다. 하지만 난항을 겪었다. 이장을 하려면 유족의 동의가 필요한데 그에게는 유족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족 동의없이 이장을 하려면 지역 법원의 판결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지 못한 또 다른 장애물이 등장했다. 그에게 유족이 없다는 사실을 입증할 공적 자료가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국가보훈처는 포기하지 않고 다른 방법을 모색했다. "2023년은 지사 순국 100주년인데 유해를 봉환해 한국인의 염원에 호응해달라"고 인류애로 설득했고, 최근 묘지 관리소 측과 유해봉환에 합의했다. 유해가 돌아오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다.

황기환 지사와 뉴욕시 마운트 올리벳 묘지의 묘비. /사진=국가보훈처 
황기환 지사와 뉴욕시 마운트 올리벳 묘지의 묘비. /사진=국가보훈처 

평안남도 순천 태생인 그는 어떻게 이역만리 미국으로 가게 되었을까.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그는 미국인의 도움으로 1904년 미국행 선박에 올랐다. 미국 시민권자가 된 그는 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자원해 유럽에서 지원병으로 활동한다. 유럽 전선에서 그는 부상자 구호를 전담한다.

종전 이후 1919년 파리강화회의가 열리자 김규식의 요청으로 파리강화회의 한국대표부에 합류했고,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팸플릿을 제작해 강화회의 참석자들에게 나눠줬다.

이를 계기로 상해임시정부 런던주재위원으로 잠시 활동하기도 했다. 런던과 파리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하던 중 그는 뉴욕에 머물던 이승만으로부터 편지를 받는다. 뉴욕에 정착한 그는 대한인국민회에 들어가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국민회 부회장으로 염세우 회장과 함께 뉴욕한인교회를 무대로 자금을 모아 상해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23년 심장마비로 마흔 살에 눈을 감는다.

'미스터 션샤인'의 실존 인물이 걸어온 길을 되밟다 보니 비로소 연세대 교정의 기념석 '1927년 뉴욕에 있는 우리 겨레로부터 붙여줌'의 의문이 풀렸다. '뉴욕의 겨레'는 대한인국민회와 뉴욕한인교회에 소속이었다.

이들 '뉴욕의 겨레'는 또 어떤 계기로 뉴욕에 터 잡게 되었을까. 한국인이 미국 땅을 처음 밟은 것은 1883년 조선 사절단인 보빙사의 일원으로 미국 본토에 내린 민영익, 홍영식 등이다.

이들은 공무 출장으로 미국을 다녀왔다. 다음 해인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청나라로부터 독립과 조선의 개화로 목표로 일으켰다가 삼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 거사의 핵심 인물은 김옥균, 김윤식,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유길준, 홍영식 등. 그중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거사 실패 직후 일본으로 망명했다.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하던 시절의 서재필. /사진=서재필기념회 
미국에서 의사로 활동하던 시절의 서재필. /사진=서재필기념회 
일본에 머물다가 김옥균은 중국 상하이로 갔고, 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은 미국행을 선택한다. 상하이에서 도피 생활을 하던 김옥균은 자객의 칼에 죽는다.

미국행을 선택한 이들 중 서재필의 행로를 들여다보자. 스무 살에 미국 땅을 밟은 서재필은 막노동으로 생계를 꾸리며 필사적으로 영어를 익혔다. 1890년 조선 최초의 미국 시민권자가 되었고, 다시 천신만고 끝에 1893년 최초의 양의(洋醫)가 되었다.

워싱턴에서 미국 여자와 결혼한 서재필은 정변 11년 뒤인 1895년 말 아내와 귀국해 경성에서 자유와 평등을 설파한다. 최초의 한글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했고 독립문을 세웠고 독립협회를 조직한다.

서재필은 독립문에 태극기를 새겼을 뿐아니라 독립신문 제호에도 태극기를 인쇄했다. 태극 문양은 이렇게 서재필에 의해 자유독립국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독립협회 활동이 반대에 직면하자 절망한 나머지 두 번째 미국 망명길에 오른다.

해방 후 미군정 초청으로 잠시 귀국했지만 정치적 논란에 휩싸이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951년 미국에서 87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평범한 한국인이 처음 미국 땅을 밟은 것은 1902년. 최초의 하와이 이민계약 노동자 121명을 실은 미국 기선이 제물포를 출항했다. 이 배는 부산을 거쳐 일본 고베(神戶) 항에 도착했다. 고베 항에서 배를 갈아타고 11월29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내렸다. 미국 이민사는 이렇게 사탕수수농장 노동자로 시작됐다.

1904년 8월, 이승만이 한성감옥에서 5년 7개월 만에 석방된다. 감옥에서 논설 '미국 교육을 일으킨 신법'을 쓴 이승만은 본격적으로 미국 유학 계획을 세운다. 기독교 국가인 미국의 교육제도를 배우고 싶었다. 1년 전인 1903년 미국 땅을 밟은 안창호 역시 미국교육 제도를 배워 조국의 개화에 기여하고자 했다.

프린스턴대에서 국제법 박사학위를 받은 직후의 이승만. /사진=이승만기념사업회
프린스턴대에서 국제법 박사학위를 받은 직후의 이승만. /사진=이승만기념사업회

이승만은 한국에 나와 있는 미국인으로부터 모두 19통의 추천서를 받았다. 그중 한 사람이 연희전문을 세운 호러스 언더우드 선교사였다. 19통의 추천서를 소지하고 같은 해 11월 제물포에서 미국 배를 탄다. 12월 샌프란시스코에 내린 이승만은 로스앤젤레스(LA)로 가 대륙횡단 열차를 타고 시카고를 거쳐 워싱턴 DC에 도착한다.

조지 워싱턴대학은 이승만이 건넨 추천서를 읽어보고 그를 '한국의 천재'로 판단해 예외적으로 3학년 편입을 허가했다. 이로써 조지 워싱턴대 학사-하버드대 석사-프린스턴대 박사를 5년 4개월 만에 끝내는, 믿기지 않은 일이 벌어진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서재필과 편지교환을 하며 여러 가지 조언을 받기도 했다. 그가 프린스턴대에서 받은 박사학위 논문은 '미국의 힘에 영향받은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S). 그는 이미 1910년대에 미국의 파워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1921년 그는 구미위원회 소속으로 워싱턴에서 열린 군축회의에 서재필과 함께 참가하기도 했다. 
 
연희전문의 태극마크 건물들

스물일곱 해를 살다 간 시인 윤동주(1917~1945). 그의 짧은 생애에서 가장 빛났고 행복했던 시기는 연희전문 4년(1938~1941)이었다. 그가 연희전문에 다니던 시절에 있었던 건물이 언더우드 동상 뒤편의 언더우드관, 스팀슨관, 아펜젤러관이다.

이들 건물은 1920년대 미국 장로교의 후원으로 세워졌다. 미국 건축가는 서양식 건물을 설계하면서 한국의 자유독립을 기원하는 의미로 건물 곳곳에 태극 마크를 새겨 넣었다.

연세대 본관 언더우드관에 새겨진 태극마크. /사진=조성관 작가 
연세대 본관 언더우드관에 새겨진 태극마크. /사진=조성관 작가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던 일본도 이것만은 어쩌지 못했다. 일본이 세운 혜화동의 경성제국대학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주 용정에서 일본의 압제를 경험한 그는 연희전문에서 태극마크를 보며 숨통이 트였고 자유를 만끽했다. 태극 마크는 식민지 경성과 뉴욕의 한인을 하나로 묶는 연결고리였다.

황 지사의 유해봉환 기사를 읽고 약소국 백성으로 온갖 신산(辛酸)을 겪어야 했던 1920년대 선각자들을 떠올렸다.

* '뉴스1'에 연재해온 <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은 이번 180회를 끝으로 마무리짓습니다. 2019년 가을부터 3년반 동안 이 연재 칼럼을 사랑해주신 '뉴스1' 독자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뉴스1' 독자님의 뜨거운 응원 속에 <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은 인문 칼럼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독자님이 키워주신 <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은 앞으로도 계속 전진할 것입니다. 변함없는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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