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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석레인저가떴다] 하늘과 맞닿은 한국의 알프스…일렁이는 억새에 묻히다

<46>간월산-신불산-영축산 17.9㎞…은빛 금빛 붉은빛 변화무쌍 억새밭
9개 산이 모여 빚은 자연, 절절한 삶의 흔적…자존심 서린 '바람의 산'

(서울=뉴스1) 신용석 기자 | 2022-11-25 09:00 송고
영남알프스 간월재에서 맞은 일출. 황홀한 새벽빛을 뚫고 빨간 불덩이가 쑤욱 솟아올라 천하를 깨우고 있다.

가을은 등산의 계절이다. 산행하기에 날씨가 딱 좋고, 단풍과 어우러진 컬러풀한 자연을 감상할 수 있으며, 그리고 억새가 있다. 단풍이 가슴을 콩닥콩닥 두근거리게 한다면 억새는 가슴을 꾹꾹 지긋이 누른다. 우리나라에서 억새가 가장 유명한 산으로 민둥산(정선), 명성산(포천), 그리고 영남알프스를 든다.

알프스(Alps)는 '희고 높은 산'이라는 뜻이다. 일찍이 알프스에서 산악활동이 시작되어, 건전한 도전의식과 전문적인 기술로 산에 오르는 활동을 알피니즘이라 하고, 그런 사람을 알피니스트라 부른다. 알프스라는 아름다운 이미지를 따서 일본에 북·중·남알프스라는 고산지대가 있고, 우리나라에도 영남알프스라고 부르는 산악지대가 있다.

영남알프스는 울산, 양산, 밀양, 청도, 경주시 일대에 이어져 있는 1000m 이상의 여러 산을 모아서 부르는 이름이다. 높고 넓은 산악과 초원지대가 알프스를 연상할 만큼 아름답다고 하여 붙인 애칭이다. 영남알프스에 속하는 산을 높이 순서대로 적으면 가지산(1241m), 천황산(1189m), 운문산(1188m), 신불산(1159m), 재약산(1108m), 영축산(1081m), 간월산(1069m), 고헌산(1034m), 문복산(1015m)이다

영남알프스의 9개 산을 모두 오르는 종주에는 2박3일 이상이 걸린다. 이 중에서 천황산-재약산-영축산-신불산-간월산을 동그랗게 종주하는 약 30㎞의 환종주길을 하늘억새길이라 부른다. 하늘과 맞닿은 능선 곳곳에 억새가 가득한 가을길이다. 기자는 이 길 중에서 간월산-신불산-영축산 코스를 오른다.

© News1 최수아 디자이너

◇ 배내고개-간월산-신불산 8.4㎞ "찬연한 새벽빛과 붉은 억새밭, 하얀 달을 만나다"

서울에서 12시에 출발한 산악회 버스가 배내고개에 도착하니 새벽 4시30분이다. 배가 많이 열리는 배내골(梨川洞)로 가는 길목이라 배내고개라 부른다. 환종주를 하는 사람들은 이곳에 차를 세워놓고 왼쪽으로 가든 오른쪽으로 가든 뺑 둘러서 원점회귀를 한다.

헤드랜턴에 불을 켠 일행들이 곧 흩어져 깜깜한 산을 오른다. 처음부터 침목 계단이 길게 이어진다. 이렇게 많은 침목을 밟은 적이 없었다. 가파른 기찻길을 오르는 기분이다. 10분쯤 지나 숨이 거칠어지면서 내 숨소리가 이렇게 컸던가?를 느낀다. 바스락 바스락 발자국 소리도 크다. 깜깜한 고요 속에 오로지 나하고만 가는 걸음이다. 무심코 숲속으로 후래쉬를 비췄더니 나무 기둥과 가지들의 맨몸이 하얗게 드러난다. 무엇인가가 부스럭 거린다. 미안해서 얼른 불을 끈다.

출발 30분 만에 배내봉(966m)에 닿는다. 하늘을 보니 까만 우주에서 노란 달빛이 가로등처럼 빛나고, 무수한 별들이 보석처럼 반짝인다. 그 아래 겹겹의 산들이 육중한 몸을 웅크리고 잠든 가운데 그 등어리들을 달빛이 은은하게 비추고 있다. 산 아래 언양과 멀리 울산의 불켜진 시가지는 야근을 하듯 번쩍거린다. 마치 영화관에 서 있는 기분이다. 

간월산 정상의 새벽. 지평선의 끝에 새벽빛이 찬연한 가운데, 정상석을 통과하는 사람들.


구름과 해와 달. (위) 구름에 잠긴 도시와 대지 위로 불덩이같은 해가 솟아, (아래) 간월재의 억새숲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해의 기세에 밀리지 않고, 서쪽 하늘은 여전히 달이 지배하고 있다

배내봉 이후는 부드럽게 오르내리는 능선길이다가 간월산 직전에서 가팔라진다. 헉헉대며 올라선 간월산(肝月山/1069m) 정상은 아직 깜깜한 어둠이지만, 동쪽의 지평선 경계가 주황색-주홍색-빨간색으로 찬연하게 물들고 있다. 빨강 계통의 스펙트럼으로만 그려지고 있는 새벽빛이 황홀하다.

간월재로 내려가다 해돋이를 만난다. 땅 속에서 마그마가 올라오듯 시뻘건 덩어리가 쑤욱 올라와 빛과 열을 터뜨린다. 까맣던 산에 빛이 들고, 환해지는 주변을 둘러보니 온통 붉은 억새밭이다. 잔잔하게 흔들리는 억새 물결 위로 하얀 달이 '아직도 당당하게' 떠 있다. 해에 밀리지 않는다. 그래서 이름에 달(月)이 들어간 간월산일 것이다.

간월재 전경. 아침햇살을 받아 검붉던 억새밭이 황금빛으로 변하고 있다. 건너편 산은 신불산.

간월재(900m)에 내려왔으나 아직 휴게소 문을 열지 않아 이곳의 유명한 컵라면과 구운계란은 다음을 기약한다. 휴게소에 붙은 데크에서 김밥에 보온병 차를 홀짝대는 사람이 많고, '핫앤쿡'이라는 발열식품을 열어 호호 부는 사람도 있다. 가장 부러운 건 버너에 라면을 팔팔 끓여 소리나게 흡입하는 전문가다.

간월산과 신불산 사이에 오목하게 자리한 간월재는 예전에 언양장터를 오가던 상인들과 주민들이 넘나들던 고개로, 당시에 맹수들이 많아 사람들이 모여서 재를 넘었다고 한다. 산 밑의 주민들은 이곳의 억새를 베어 날라 여름에는 퇴비로 쓰고, 가을에는 지붕을 이었다. 현재의 간월재는 이곳에 펼쳐진 5만 평에 이르는 억새밭을 구경하거나 등산을 위해 찾는 명소로 변모되었다. 해돋이 빛에 빨갛게 물들었던 억새들이 서서히 황금빛으로 변색되는 모습을 바라보며 간월재를 떠난다. 

신불산을 오르며 바라본 영남알프스. 해가 떠오르며 왼쪽 재약산과 천황산, 오른쪽 간월산을 따듯하게 비추는 모습. 곧 가운데 산 아래에도 빛을 쪼여줄 것이다.

신불산으로 향하는 가파른 계단을 30분쯤 올라 데크 전망대에서 간월재를 내려다 본다. 휴게소의 삼각형 지붕과 억새밭 '정원'이 미니어처처럼 귀엽게 보인다. 이제 해는 높이 올라 우람우람한 봉우리들의 어깨를 따듯하게 비추고, 서서히 산 아래의 어둠을 걷어내고 있다. 멀리 영축산이 전망되는 부드러운 능선길을 걸어 신불산에 도착한다.  

◇ 신불산-영축산-죽전마을 9.5㎞ "억센 바람에 일렁이는 억새 물결에 묻히다"

신불산(神佛山/1159m) 정상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산들을 바라본다. 멀리 가지산과 운문산, 가까이 재약산과 천황산, 영축산 등 영남알프스 가족들이 사방에 뺑둘러 있다. 짙푸르렀던 초록빛이 불그스럼하게, 누렇게, 잿빛으로 변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할 일 다하고 이제 쉬려는 가을산들의 편안한 모습이다.    

신불산 정상의 풍경. (위) 풍경보다 인증사진 찍기에 바쁜 사람들. (아래) 영축산 능선을 바라보는 명당에 텐트를 친 백패커(backpacker)들.


신불산에서 바라본 낙동정맥. 오른쪽 멀리 고헌산에서 가운데 가지산으로 이어진 능선이 이곳 영남알프스로 뻗었다. 멀리 왼쪽은 운문산.

신불재로 내려서며 영축산까지 광활하게 펼쳐진 억새의 바다를 바라본다. 험준해야 할 산 꼭대기에 어떻게 60만 평에 이르는 평평한 고원과 억새초원이 생겼을까? 이곳이 고원인 이유는 고위평탄면(高位平坦面), 즉 낮고 평평한 지대가 솟아오른 지형이기 때문이다.

억새초원이 된 이유에 대해서는 <영남알프스 오디세이(배성동, 2013)>에 이렇게 적혀있다. "비료가 없는 화전민들은 억새밭에 불을 질렀다. 간월재에서 지른 불은 신불산을 거쳐 영축산까지 번졌다. 겨우내 타들어가는 밤하늘의 불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불을 질러야 이듬해에 억새가 제대로 자랐고, 산나물이 지천으로 깔렸다.(필자 편집)"

11월의 진달래와 쑥부쟁이. 햇빛 쨍쨍한 양지에서 진달래가 계절을 착각해 꽃을 내밀었고, 다른 꽃들이 다 졌는데도 쑥부쟁이 종류 한 무더기가 쌩쌩하게 피어있다.


신불재 억새밭. 은빛 꽃술들은 다 떨어지고, 빈 이삭만 바람에 흔들리는 황금빛 물결.

억새들을 가까이 들여다본다. 억새들에게도 깊은 가을이다. 새털처럼 촘촘히 박혀있던 은빛 꽃들은 다 날라가고, 새 발가락처럼 가느다란 금빛 이삭만 흔들리고 있다. 거센 바람에 허리가 휘청하지만 결코 꺾이지 않고, 머리카락(이삭)도 엉키지 않는다. 억세고, 자존심이 서려 있다.        

신불산 고원의 여름과 가을. 여름엔 정말 스위스 알프스 초원같고, 가을엔 천상 한국의 산이다.

신불재에서 기다란 계단을 올라 언덕에 서니 거기엔 또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신불재가 잘 다듬어진 억새밭이라면 이곳은 완전히 야생의 억새산이다. 억새산은 바람의 산이다. 왼쪽의 벼랑끝 허공으로부터 억센 바람이 불어와 억새숲의 가장자리를 쑤욱 밀어댄다. 이 바람소리를 어떻게 적을지 메모가 잘되지 않는다. 슈슈슉슉~, 파파바바~, 휘휘~휫휫... 구불구불 난 소로를 걸어가는 사람들의 어깨가 억새물결에 묻힌다. 

영축산 정상에서 바라본 고원. 산 정상이 독수리의 부리처럼 생겨 영취(鷲)산으로도 불렀는데, 기자의 그림자가 독수리처럼 드리워졌다.

영축산 정상(1081m)에 오른다. 영'취'산(靈鷲山)이라 쓰지만, 불교식 발음은 영'축'산이라고 한다. 석가모니가 활약했던 인도의 산 이름이다. 사방팔방을 둘러본다. 북쪽으로 새벽부터 걸어온 배내봉-간월산-신불산 능선을 아득하게 바라보며 꽤 멀리도 왔다고 스스로에게 축하를 보낸다. 북서쪽으로 재약산-천황산 라인을 조망하니, 언젠가 저곳에서 비박을 할 때 땅을 쿵쿵 울리며 다가왔던 짐승은 누구였을까? 그때 스틱을 꽉 잡고 긴장했던 두려움이 기억된다. 

영축산에 난 상처. 폭 10m, 길이 약 1㎞의 방화선(防火線) 자갈길. 어서 복원해주기 바란다.

산을 내려서며 영축산의 흉터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영축산 정상에 비포장 도로처럼 그어진 폭 10m가 넘는 방화선(防火線) 자갈길은 우리나라 산 정상의 어디에도 없는 흉물이다. 수백 년 살았을 식물과 수천 년 쌓였을 흙을 완전히 밀어내고, 자갈과 모래만 뒹구는 황폐지가 1㎞ 가까이 방치되고 있다. 산의 아름다움은 물론 산의 신성함을 완전히 망가뜨렸다.

더구나 이 방화선이 영축산 아래 단조(丹鳥)늪을 횡단해 습지환경을 훼손시키고 있는 듯하여 더욱 안타깝다. '알프스'라는 이름을 붙였으니 그에 걸맞는 자연관리를 해주기 바란다. 특히 습지의 원형을 찾아 복원해주기 바란다. 

하산길 풍경. 허물어진 단조산성을 지나 억새평원의 경계를 내려서는 사람들.

하산길에 단조성터의 무너진 돌무더기를 지난다.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왜군의 진격을 저지했던 성이다. 성의 역할을 끝내고 허물어져 있는 상태가 돌들에게는 오히려 편안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성터를 지나 좁은 하산길에 샛길이 몇 군데 있다. 마구 다니는 사람들이 낸 샛길로 들어가면 또 다른 샛길이 나와 사고 위험이 크다. 정해진 길로만 다녀야 하는 이유다.

한 시간은 부드러운 낙엽길을, 한 시간은 급경사 너덜길을 내려서서 백련골에 이르고, 아스팔트 길을 따라 산 바깥으로 나오니 배내골 죽전마을이다. 마을 뒷산은 벌겋게 익었고, 가로수에 매달린 가랑잎마다 구멍이 송송하다. 다음 주 기사에도 단풍사진을 올릴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이제 가을은 깊게 저물었다. 

재약산 아래 사자평원의 여름. 영남알프스에서 가장 넓은 억새밭이 펼쳐져 있다.

9개 산이 모여 겹겹의 산산골골을 이룬 영남알프스에는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사람들의 애환이 절절한 스토리가 많다. 그런 관광잠재력이 커서, 이제 영남알프스는 영남을 벗어나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즐겨찾는 명소가 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영남알프스가 제대로 보호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지나친 관광개발계획만 있을 뿐, 정작 관광의 대상인 자연과 문화에 대하여는 이렇다 할 보전계획이 없다. 어느 지자체에서 대형 개발사업을 하면 다른 지자체에서도 그에 버금가는 개발사업을 벌일 것이다. 그러면 결국 영남알프스는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영남알프스는 '한 몸'이다. 발가락을 찌르면 온 몸이 아프다. 5개 시·군이 합심하여 영남알프스 전체의 보전계획을 만들고, 그것을 전제로 관광개발을 하기 바란다. 국립공원 지정을 통한 전문적인 관리도 검토해 보기 바란다. 일본알프스의 대부분도 국립공원이다. 스위스 알프스가 부러워할 한국의 알프스가 되길 바람한다.


stone1@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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