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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쳐들어온 군인…누나·여동생 지키려던 10살 머리 맞아 기절"

[5·18 정신적 손해배상㊱] 계엄군에 폭행 국민학교 4학년 박순범씨
'간질' 증상으로 성악가 활동도 어려워…"편하게 노래하고 싶어"

(광주=뉴스1) 박준배 기자, 이수민 기자 | 2022-08-13 10:29 송고 | 2022-08-16 10:31 최종수정
편집자주 '80년 5월'은 현재 진행형이다. 40여년이 흘렀으나 피해자들은 그날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인 모를 질병과 트라우마, 우울증 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자살한 피해자들도 많다. 최근 이들에 대한 정신적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뉴스1광주전남본부는 5·18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정신적 손해 배상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점검한다.
12일 오후 광주 서구 5·18기념재단 오월기억저장소에서 만난 5·18 피해자 박순범씨(52)가 80년 5월 당시의 기억을 회상하고 있다. 국민학교 4학년이던 박씨는 5월27일 집에 쳐들어온 계엄군에게 폭행당해 평생 간질 등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2022.8.13/뉴스1
12일 오후 광주 서구 5·18기념재단 오월기억저장소에서 만난 5·18 피해자 박순범씨(52)가 80년 5월 당시의 기억을 회상하고 있다. 국민학교 4학년이던 박씨는 5월27일 집에 쳐들어온 계엄군에게 폭행당해 평생 간질 등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2022.8.13/뉴스1

"아직도 군인들이 집안에 쳐들어와 폭행하는 꿈을 꿔요."

고작 만 10살 소년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아니 그땐 국민학교 4학년. 어린 꼬마가 감당하기엔 충격이 너무 컸다.

12일 오후 광주 서구 5·18기념재단 오월기억저장소에서 만난 5·18 피해자 박순범씨(52). 그는 아직도 악몽을 꾼다고 했다.

"꿈을 꾸면 1980년 5월27일 늦은 오후 그날로 돌아가요. 꿈속 세상은 여전히 생생해요. 그날의 온도와 습도, 햇빛의 따가움, 그림자 방향까지도 선명해요."

두 눈을 질끈 감고 42년 전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던 그의 표정이 한껏 일그러졌다.

80년 5월27일 오후 계엄군 2명이 집 문을 발로 차고 쳐들어왔다. 철모를 쓰고 총을 든 두 남자는 군홧발 차림으로 거실까지 들어왔다.

"야 이 XX들아, 누구 숨겨둔 놈 없어?"

군인들은 집에서 놀고 있던 순범씨와 누나, 여동생을 향해 큰소리를 쳤다. 목소리에 살기가 느껴졌다. 

당시 순범씨 가족은 서구 양3동의 한 주택에서 월세로 살고 있었다.

"부모님은 일을 나가셔서 집에 안 계시고, 집주인 아주머니가 옆집에 살고 있었는데, 군인들이 주인집을 수색하고 우리 집으로 온 거였죠."

27일은 5·18민중항쟁의 마지막 날. 계엄군은 이날 새벽 전남도청을 진압한 이후 인근 주택을 돌며 이른바 '잔당' 수색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일 때문에 집을 비운 순범씨의 부모 대신 집주인 아주머니가 황급히 따라 들어와 "숨긴 사람 없다니까요"라며 군인들을 말렸다.

순범씨와 누나, 여동생은 겁에 질려 안방 담요 더미 틈으로 숨었다. 숨소리조차 내지 못할 공포감이 엄습했다.  

군인들은 부엌과 장롱 안을 샅샅이 뒤졌다. 욕설과 함께 "누구 숨겨둔 사람 없어?"라는 말만 반복적으로 하며 씩씩거렸다. 군인 중 한 명이 아이들이 숨어있던 담요 앞에 섰다.

"왜 숨어있고 난리야? 어, 니들은 뭐야?"

갑자기 '퍽, 퍽' 발길질이 시작됐다.

"분명히 담요 속에 있던 우리랑 눈이 마주쳤어요. 그놈들은 우리가 숨어있던 시민군이 아니라, 애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팬 거예요."

군홧발에 맞은 머리가 '띵'했다. 순범씨는 그대로 기절했다.

"열 살 어린 나이에도 남자니까 누나와 여동생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양팔로 누나와 여동생을 끌어안았는데, 발길질이 전부 나한테 집중된 거죠."

박순범씨의 어린시절 사진. 80년 8월 박씨가 집 책상에 앉아있다. (독자 제공) 2022.8.13/뉴스1
박순범씨의 어린시절 사진. 80년 8월 박씨가 집 책상에 앉아있다. (독자 제공) 2022.8.13/뉴스1

박씨의 오월 기억은 또 있다. 군인들이 집으로 찾아오기 일주일 전인 5월20일이다.

당시 서림국민학교 4학년이었던 그는 5·18로 휴교령이 내려지면서 심심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친구들을 만나지도 못했고, 여동생과 누나도 집에 없었다.

여동생과 누나는 엄마를 따라 아침 일찍부터 앞집 '화영이네'에 갔다. 화영이네 집에선 동네 아주머니들이 며칠째 주먹밥을 만들고 있었다.

광주천변과 가까운 '발산마을'은 친구들과 자주 만나던 집결지였다. 순범씨는 혹시나 그곳에 가면 함께 놀 아이들이 있을까 싶어 마을 입구까지 갔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때 광주천 건너편 서림 교회 쪽에서 '탕탕' 총소리가 났다. 박씨는 놀라 집으로 뛰어 돌아왔다.

어렴풋이 사람이 죽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시체를 직접 보진 못했다.

그러나 항쟁기간이 끝난 뒤 상무관에서 처음으로 사람의 시체를 보며 '당시 발산마을에서도 사람이 죽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열흘간의 항쟁이 끝난 뒤 찾은 상무관은 입구부터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상무관 안쪽에는 봉사자들이 시체를 관에 옮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무척 끔찍했다.

"상무관 안에 사람 시체가 잔뜩 쌓여 있더라고요. 바닥은 시뻘건 피로 물들어있고. 어깨랑 머리, 귀에 총 맞아 구멍 뚫린 사람들이…."

너무나 끔찍한 기억이었다. 그날을 얘기하던 박씨가 '헥헥'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42년이 지났지만 그때만 떠올리면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무력해진다고 했다.

그때의 충격이었을까. 박씨는 80년 이후 발작 증세가 생겼다. 

"잠깐 두통이 오면서 '어? 어?' 한 뒤 온몸이 바들바들 떨리고 발작을 해요."

80년 가을쯤만 해도 하루 한두 번 그러던 것이 겨우 1~2년 새 하루 7~8번으로 늘었다. 한번 증상이 오면 30~40초 동안 고통이 찾아왔다.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이 지난 2018년 공개한 영상 캡처. 1980년 5월 신원 모를 한 아이가 병원에서 치료 받는 모습. © News1DB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이 지난 2018년 공개한 영상 캡처. 1980년 5월 신원 모를 한 아이가 병원에서 치료 받는 모습. © News1DB

몇 년 뒤엔 '전조 증상'도 겪었다. 발작이 오기 전 '쿵, 쿵' 군인들이 거실로 들어오는 군홧발 소리가 귀에서 맴돌았다.

한약을 먹어 보기도, 정신과와 신경과에 가 양약을 먹기도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한의원은 7년, 신경정신과는 13년을 넘게 다녔다.

80년대에 한 달에 30만 원씩 하는 한약을 먹었다. 무려 아버지 봉급의 절반이나 되는 돈이었다.

"어머니께서 '니 병을 고치려고 집 두세 채는 날린 것 같다'고 말씀하시곤 했죠. 죄인이 된 것 같은데, 아무리 나으려고 해도 나아지지 않았어요."

노래에 재능이 있어 광주예고와 조선대 음악교육과를 졸업하고 성악가로 데뷔했다. '세컨드 테너'로 광주시립합창단 등에서 활동했으나 간질 증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박씨의 '정신적 트라우마'는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다. 2006년 10월19일 열린 '국립 타타르스탄 심포니 오케스트라 초청 연주회'에서는 앙코르 공연을 포기해야 했다.

"그날 역시도 안정제를 맞고 공연에 올랐어요. 무리 없이 맡은 노래를 다 해냈는데 관객들이 박수를 치며 '앙코르'를 외쳤죠. '앙코르'를 해달라니까 연주자가 '빰빠람빠'하고 반주를 하는데 갑자기 공포가 확 몰아치더라고요. 결국 노래를 하지 못했어요."

여수의 한 고등학교 음악 교사 자리를 제의받기도 했지만 간질 증상 때문에 포기해야만 했다.

박씨는 국가로부터 5·18 피해자 '보상'을 받을 때도 여러 차례 반려 처리당하며 상처 입었다.

1983년 1월 박씨가 사춘기를 겪으며 '트라우마'로 힘들어했을 무렵, 어머니는 아들의 이름을 바꾸면 병이 나아질까 싶어 개명을 해줬다. 원래 '박성필'이었던 이름을 '박순범'으로 바꿨다.

이후 1990년 국가에서 5·18 피해보상을 시작했다. 박씨도 피해를 신청했으나 광주시는 '기각' 처리했다. 첫해는 워낙 많은 피해자가 몰린 탓에 기각 사유조차 제대로 듣지 못했다.

3차 때가 돼서야 '박순범'이라는 이름으로는 자료가 없다는 걸 알았다. 광주시청 5·18관련자 보상심의위원회가 80년 당시 이름인 박성필이 아닌 박순범이란 이름으로 조사한 것이다.

"신청 서류에 분명히 '개명'을 했다는 점을 명시했는데요. 그들이 '개명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고 하더라고요. 국민학교 4학년 때 담임 선생님도 찾아갔었다는데 '순범이 아냐'고 물으면 모른다고 하죠."

5·18민주유공자가 되기 전 '장애 판정'을 받기도 했다. 2006년 계속되는 간질 증세에 서울에 있는 큰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박씨의 병명이 뇌 신경세포가 반복적으로 마비되는 '뇌전증'이라며 장애 3급을 판정했다.

5·18 관련자 보상이 빨리 이뤄졌다면 보훈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었겠지만 보상이 이뤄지지 않은 탓에 병원비는 온전히 개인이 부담했다. 그는 80년 5월의 자신을 '그 애기'라며 한탄했다.

"그 애기가 뭘 잘못했다고, 내 인생이 이렇게 꼬이나 싶었죠. 그 무렵 아내와 이혼까지 해서 진짜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보상심의위원회는 2011년에야 중점조사대상으로 그를 지정해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와 담임교사에 대한 사실 조회, 현지 조사를 진행했다.

조사가 끝나고 순범씨는 5·18 피해자 장애 9급으로 인정받아 보상금 8700만원을 받았다.

그러나 8700만원은 수십년간 박씨가 겪어온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치유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2016년 박씨는 서울에 있는 대형병원에서 뇌혈관을 잘라내고 연결하는 수술을 받았다. 의사는 '해마' 옆에 있는 작은 혈관이 그의 '간질' 증상을 자극한다고 했다.

"자극으로 생긴 병이라고 하더라고요. 아마 군홧발로 폭행당했을 때 혈관이 터졌나 봐요. 수술하고 나선 예전보단 덜해요. 여기까지가 제 삶의 기억입니다."

수술받았던 머리 부위를 손으로 만지작거리던 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수술해서 간질 증상이 덜해졌지만, 여전히 약을 먹어야만 버틸 수 있어요. 트라우마가 사라진 건 아니거든요."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냐고 물었다.

"꿈을 이루고 싶죠. 아예 완벽하게 고통을 지워서, 마음 편하게 노래하고 싶어요. 80년 5월의 나를 찾아가서 내가 대신 맞아주고, 걔는 아무것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아이로 살 수 있게 하고 싶어요."


breath@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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