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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법정]③하리수 이후 20년…'법의 시선' 어떻게 변했나

2000년대 초반 트랜스젠더 논의 활발…2006년 대법원 첫 성별정정 인정
헌법상 기본권 인정했지만…수술 요건 아직도 '논란'

(서울=뉴스1) 류석우 기자 | 2022-06-04 08:00 송고 | 2022-08-17 12:05 최종수정
편집자주 판결은 시대정신이다.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옳다고 믿는 가치와 때론 나아 가야할 방향을 담고 있어서다. 우리 사회는 짧은 기간 압축적으로 성장하면서 여러 차례 격변기를 거쳤다. 이 때문에 1년 전에는 옳다고 믿었던 시대정신이 오늘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역사의 변곡점에서 과거와 정반대의 판결이 많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20건의 판례를 통해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짚어봤다.
('광고고전' 유튜브 화면 갈무리) © 뉴스1
('광고고전' 유튜브 화면 갈무리) © 뉴스1

긴 생머리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여성이 카메라를 응시한다. 얼굴이 클로즈업되자 천천히 침을 삼킨다. 굵은 목젖이 버젓이 드러나 보인다. 화면에 남성을 상징하는 기호가 나타나더니 곧바로 뒤집어진다. 모델은 환하게 웃는다.
2001년 한 화장품 광고에 등장한 방송인 하리수씨(47·본명 이경은)의 모습이다. 성전환자가 TV광고에 처음으로 등장한 순간이었다. 광고는 큰 화제가 됐다. 하리수씨는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동시에 성전환자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하리수씨의 등장은 우리 사회에서 금기시됐던 트랜스젠더(성전환자) 이슈를 양지로 이끌어내는 계기가 됐다. 당시 한 언론은 성전환자의 호적변경 허용 여부에 대한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반대가 37,8%로 찬성(35.8%)을 약간 웃돌았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제도권에서도 의미있는 변화가 시작됐다. 고종주 전 부장판사(당시 부산지법 가정지원장)는 2002년 헌법상 인간존엄성과 행복추구권을 위해 성전환자들에게 호적 정정을 허용할 필요가 있다는 논문을 발표했고, 같은 해 성전환수술을 받은 성전환자의 성별정정을 처음으로 허가했다.

하리수씨도 같은 해 12월 인천지법에서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별정정을 허가받았다. 이름도 '이경은'으로 개명했다. 2002년 이후 각 지방법원에서는 성별정정 판단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했다. 이같은 흐름은 4년 뒤 대법원 판결까지 이어지게 된다.
◇나이 '50'이 넘어서야 인정 받은 성 정체성…대법원 첫 판결

2002년 이후 전국에서 성전환자들의 성별정정 허가 결정은 드문드문 나오기 시작했지만, 일부에 불과했다. 많은 성전환자의 성별정정 신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김진화씨(가명·71)도 성별정정 허가를 받지 못한 성전환자 중 한 사람이었다. 생물학적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어려서부터 자신의 성이 남성이라고 생각했다. 성주체성이 생긴 이후부터는 남성처럼 행동하며 살아왔다.

김씨는 주변 사람들에게 남성으로서 인정을 받을 때 행복감을 느꼈다. 20대 이후엔 본격적으로 남성으로 생활하며 공사 인부 등 육체노동에 종사했다.

그는 계속 성전환수술을 받길 원했으나 경제사정이 좋지 않았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한동안 수술을 받지 못했고, 41세 때인 1992년에야 서울의 한 병원에서 성전환증 진단을 받고 유방·자궁 등 제거술과 음낭성형 및 인공고환 삽입술을 받았다.

그러나 호적 등 공적인 면에서 김씨는 여전히 여성으로 취급을 받았다. 이에 김씨는 가정에서나 사회에서 완전한 남성으로 인정받고 살아갈 수 있도록 법원에 성별정정을 신청했다.

2003년과 2004년에 열린 1심과 2심은 모두 성별정정을 허가하지 않았다. "사람의 성별이 수정 시 성염색체에 의하여 결정이 되면, 그 후 변경될 수 없다는 사실은 생물학적으로 명백하다"는 판단에서다.

김씨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1심과 2심에서 연달아 패했지만 대법원의 판단을 받아보길 바랐고, 사건은 대법원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2년 뒤인 2006년,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처음으로 성전환자 성별정정을 허가한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린다. 김씨의 나이 55세 때의 일이다.

◇대법 "헌법상 기본권 침해"…처음으로 성별정정 기준도 제시

약 2년 동안 사건을 심리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성전환자도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향유하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와 인간단운 생활을 할 권리가 있다"며 원심을 깨고 사건을 돌려보냈다.

당시 대법원은 "사회통념상 전환된 성을 가진 자로 인식돼 법률적으로 전환된 성으로 평가될 수 있는 성전환자임이 명백함에도 종전의 성을 따라야 한다면 사회적으로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취급되고 결국 헌법상 기본권이 침해될 우려가 있다"고 판시했다.

반대의견을 낸 대법관들조차도 성전환자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위해 전환된 성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배려가 필요하다고 봤다. 다만 대법원의 판결이 아닌 국회의 입법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지적했다.

대법원은 판결 이후 '성전환자의 성별정정허가신청사건 등 사무처리지침'도 만들어 성별정정의 허가 기준도 제시했다.

기준에는 △만 20세 이상의 행위능력자일 것 △혼인한 사실이 없을 것 △자녀가 없을 것 △성전환증으로 인해 성장기부터 지속적으로 선천적인 생물학적 성과 자기의식의 불일치로 인해 고통을 받을 것 △성전환수술을 받아 외부성기를 포함한 신체외관이 반대의 성으로 바뀌었음이 인정될 것 등의 내용이 담겼다. 

또 첨부해야 할 서류로 성전환증 환자임을 진단한 정신과 전문의의 진단서와 성전환시술 의사의 소견서, 부모의 동의서 등도 명시됐다.

◇"제도권에서 물꼬 터준 판결"…성기 수술 요건엔 "아쉽다" 지적도

A씨의 변호를 맡았던 법무법인 청풍의 이태화 변호사는 당시 판결을 두고 "상당히 의미있는 판결"이라고 회상했다. 그는 당시 사회 분위기가 대법원 판결까지 이어지게 됐다고 봤다.

이 변호사는 뉴스1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부산지법의 (고종주) 판사 한 분이 성전환자 성별정정과 관련된 논문도 발표하고 여러 정황상 사회 분위기도 무르익었다"며 "결국 대법원이라는 최고 법원에서 성소수자 배려에 대한 명확한 의지 표현을 해줬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기본적으로는 사회도 용인을 하고 성숙해야 하지만, 제도권에서 (성전환자의 인권을 신장하는데) 물꼬를 터준 것이라고 본다"고 덧붙였다.

당시 주심 대법관이었던 김지형 전 대법관은 퇴임 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케이스야말로 법관이 역할을 할 수 있는 사건"이라며 "사람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고 밝히기도 했다.

대법원도 당시 판결을 두고 해설집에 "성전환자의 헌법상 기본권과 호적법의 합헌적 법률해석 등을 통해 성전환자의 의미를 밝히고 호적정정 허가를 인정한 최초의 결정"이라며 "성전환자의 호적정정에 관한 입법적 조치가 이뤄지지 않은 현시점에서 성전환자에 대한 유일한 구제방법"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성소수자단체나 진보시민단체 등은 대법원이 지나친 성기 중심주의적 인식을 담은 판결을 내렸다고 비판했다. 호적정정 허가 요건으로 성전환 수술을 받고 반대 성의 외부 성기를 갖도록 한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2021.3.27/뉴스1 DB © News1 황기선 기자
 2021.3.27/뉴스1 DB © News1 황기선 기자

◇대법 판결 이후…성기성형수술 없이도 성별정정 결정 잇따라

반드시 반대 성의 외부 성기를 갖도록 한 대법원 기준이 비판받았던 이유는 외과적 수술이 복잡하고 가격도 비싸기 때문이었다. 특히 여성에서 남성으로 성전환을 한 'FTM'(Female To Male)의 경우 수술이 더 복잡하다.

성전환자 실태를 분석한 논문이나 보고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성전환자 인권실태조사 기획단이 2006년 발간한 실태조사를 보면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을 한 MTF(Male To Female)의 경우 78%가 수술경험이 있었지만, FTM의 수술 비율은 34%에 불과했다.

정소와 난소제거 수술의 평균 비용은 333만원, 성기형성수술의 평균 비용은 1390만원으로 조사됐다. 16년 전의 물가 수준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금액이다. 이와 별개로 성전환자들이 수술에 대해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문제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2013년 서울서부지법에서 대법원 판결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간 긍정적인 판결이 나왔다. 남성 성기 성형수술을 하지 않은 트렌스젠더 남성에 대한 성별정정을 법원이 처음으로 허가했다. 

2017년 청주지법 영동지원은 반대로 여성 성기 수술을 받지 않은 트랜스젠더 여성에게 성별 정정을 허가하는 첫 판결을 내렸다. 당시 재판부는 "여성으로서 성별 정체성을 확인하는 데 있어 성기 형성 수술은 필수적이지 않다"며 "수술을 받지 않은 성전환자는 사고나 질병으로 생식기를 잃은 경우와 다르지 않다"고 지적했다.

지난해도 수원가정법원에서 의미있는 판결이 있었다. 자궁적출술과 같이 생식능력의 비가역적인 제거 없이도 호르몬요법 만으로 성별정정이 가능하다는 판결이 처음 나온 것이다.

당시 1심은 자궁난소적출술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성별정정 신청을 기각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는 "생식능력의 비가역적인 제거를 요구하는 것은 성적 정체성을 인정받기 위해 신체의 온전성을 손상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라며 "자기결정권과 인격권, 신체를 훼손당하지 아니할 권리를 지나치게 제약하는 결과가 된다"고 지적했다.

◇대법원 판결 이후 16년…"보편적 기준 없어 여전히 문제"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이후 각 법원에서는 진일보한 판결들이 하나둘씩 나오고 있고, 대법원의 예규도 점차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해결돼야 할 문제가 남아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법원이 성별정정 허가 기준을 두기 위해 2006년 만든 사무지침은 이후 8차례 개정됐다. '성별정정의 허가기준'을 뒀던 조항은 2011년 '조사사항'으로 바뀌었고, 2020년 '참고사항'으로 바뀌었다.

반드시 충족해야 하는 기준에서 참고할 수 있는 사항으로 바뀐 셈이다. 또 성인 성전환자가 성별정정을 신청할 경우 반드시 제출해야 했던 부모의 동의서도 2019년 법원의 결정 이후 예규에서 사라졌다.

행동하는성소수자인권연대(인권연대)는 뉴스1과의 서면인터뷰에서 "일부 법원에서 변화는 있으나 아직 보편적인 기준이 되지는 못했다"며 "여전히 많은 법원에서는 대법원 예규에 근거해 수술받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같은 예규를 두고도 재판장이 누구냐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인권연대를 비롯한 성소수자 인권단체들은 지난해 말 "대법원 예규에 있는 트렌스젠더의 성별정정 수술요건을 폐지하라"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한 바 있다. 또 성별정정 특별법 도입도 주장하고 있다.
 



sewryu@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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