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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할 권리①] '채소 없는 식판' 옹호한 인권위에 맞서다

'채식 선택권 보장' 진정 김서진씨 "무관심보다 차라리 혐오가"
성인됐지만 '비건'이라는 이유로 여전한 차별…추가 진정 준비

(서울=뉴스1) 조재현 기자 | 2022-04-30 06:30 송고 | 2022-04-30 15:20 최종수정
편집자주 채식은 요즘 '힙'하다. 건강에 좋다고 해서 기후 위기나 동물이 불쌍하다는 이유로 MZ세대들의 관심은 날로 커진다. 채식주의자(vegetarian)들이 자신의 식생활을 주변에 고백하기까지 어려움을 담은 '채밍아웃'이란 표현도 이젠 낯설다. 그러나 단체급식이 이뤄지는 학교의 상황은 조금 다르다. 일선 교육청이 채식 급식을 확대하고 있으나 완전한 채식을 지향하는 '비건'들에겐 여전히 급식실은 괴로운 공간이다. 정작 먹을 수 있는 게 없어서다. 육류나 어패류로 채워진 식판을 받아들고 나면 자기 신념마저 침해당한 느낌을 받는다. 채식 선택권을 외치는 목소리가 늘고 있다. <뉴스1>은 이를 둘러싼 다양한 목소리를 짚어본다.
비건 채식인 김서진씨가 고등학교 재학 시절 찍은 급식 사진. 동물성 식품으로 만들어져 먹을 수 없는 반찬에 'X' 표시를 했다. (김서진씨 제공) © 뉴스1
비건 채식인 김서진씨가 고등학교 재학 시절 찍은 급식 사진. 동물성 식품으로 만들어져 먹을 수 없는 반찬에 'X' 표시를 했다. (김서진씨 제공) © 뉴스1

올해 스무 살이 된 김서진씨는 모든 동물성 식품을 거부하는 '비건' 채식인이다. 고등학생 시절 급식 일정표를 보는 게 고역이었다. 친구들은 저마다 좋아하는 반찬이 나오는 날을 확인하며 즐거워했지만, 서진씨는 치워버리기 바빴다. 처음엔 그나마 먹을 수 있는 걸 확인하기 위해 살폈다. 그러나 갈수록 먹을 수 없음을 뜻하는 '엑스'(X)만 넘쳐났다. 남는 건 밥과 김, 과일뿐이었다. 수개월째 반복된 상황에 식단 확인은 점차 무의미해졌다.

무상급식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버릴 수도 없었다. 잔반이라도 줄이자는 생각에 먹을 수 있는 걸 최대한 골라 먹었다. 교내 급식 만족도 조사 때마다 비건식 도입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음에도 졸업할 때까지 서진씨의 식판은 초라했다.  
학교가 묵묵부답으로 나오자 대화 채널을 바꿨다. 직접 국가를 상대로 목소리를 내기로 했다. 그는 지난해 6월 채식급식시민연대의 지원 아래 비건 채식 학생, 그리고 비건 채식 자녀를 둔 학부모 등과 함께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냈다. 

육류 중심으로 운영되는 학교 급식 체계를 바꿔보고자 한 것이다. 이들은 현행 급식 제도로 인해 양심의 자유, 자기 결정권, 건강권 등 헌법상 기본권을 침해받고 있다며 교육부 장관과 교육감 등을 상대로 채식 선택권을 보장해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인권위는 지난 1월 기각 결정을 내렸다. 급식 식단 구성은 학교장의 재량에 달린 것이며 각 시·도교육청에서 채식 선택권 보장을 위한 최소한의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게 이유였다.
© News1 김초희 디자이너
© News1 김초희 디자이너

◇ "비건, 취향이나 기호 아냐…생존과 직결"

서진씨가 '채식 선택권'에 대해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였다. 서진씨는 "가장 힘들었던 것은 채식을 개인의 취향이나 기호로 받아들이는 학교의 태도였다"며 "비건으로서 일반 급식을 마주하는 현실은 힘들었다. 누구에게나 먹는 문제는 중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인권위의 답변을 기다리는 새 서진씨는 성인이 됐으나 채식 선택권 보장에 대한 열망은 더 커졌다. 비건이라는 이유만으로 받는 차별과 혐오는 여전해서다. 재수를 결정한 서진씨는 최근까지 학원에 다녔다. 해당 학원은 식사를 제공하는 곳이었다. 앞서 비건임을 밝혔던 터라 초반엔 대체식을 준비해줘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하지만 점차 서진씨 식판에 대한 학원 측의 관심은 줄었다. 학생 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현실에 서진씨는 분개했다.

재수생임에도 더 목소리를 내는 이유다. 일단 채식 선택권 보장을 위해 후배들과 머리를 맞대고 있다. 인권위에 추가 진정을 준비하는 동시에 국제 인권단체인 엠네스티의 문을 두드리는 방안 등도 고려 중이다. 6월 지방선거에 나서는 교육감 등에게 관련 질의서를 보낼 계획도 있다고 귀띔했다. 서진씨는 "채식 선택권 보장을 위해서라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싶은 마음"이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6월 채식 선택권을 보장해 달라며 인권위에 진정을 냈던 학생이 급식 시간에 찍은 식판. 동물성 식품으로 만들어진 반찬을 받지 않은 식판은 초라하다. (유기농문화센터 제공)© 뉴스1
지난해 6월 채식 선택권을 보장해 달라며 인권위에 진정을 냈던 학생이 급식 시간에 찍은 식판. 동물성 식품으로 만들어진 반찬을 받지 않은 식판은 초라하다. (유기농문화센터 제공)© 뉴스1

◇ 한 달에 두 번 채식 식단으로 부족…"인권위 결정은 자기모순"

서진씨는 인권위의 결정에 대해 "자기모순적 행태"라고 꼬집었다. 인권위는 학교에서 채식 선택권을 보장하는 것은 단지 개인의 선택권을 보장하는 차원의 문제를 넘어 타인의 신념에 대한 존중과 환경보호 등 공익적 가치를 공유하는 법을 배우는 교육적 기능이 크다고 평가했다. 유엔(UN) 아동권리협약에서 정한 '아동 최선의 이익 원칙'에 입각해 볼 때 아동은 신념과 신체적 특성에 적합한 음식을 선택하는 동시에 영양학적으로 고려된 식단을 제공받아야 한다는 의견도 표명했다.

그런데도 각 교육청이 추진 중인 '채식의 날' '그린급식' 등의 프로그램이 있다는 이유로 비건 학생들의 건강권 등을 침해한 것으로는 보기 어렵다는 결론을 냈다. 인권위는 "완전한 채식 선택권이 보장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급식 체계 개선을 위한 과도기적 단계에 있다고 봄이 상당하다"고 부연했다.   

지난해 6월 채식 선택권 보장 관련 기자회견에 참가한 (왼쪽에서 두 번째) 김서진씨. (유기농문화센터 제공) © 뉴스1
지난해 6월 채식 선택권 보장 관련 기자회견에 참가한 (왼쪽에서 두 번째) 김서진씨. (유기농문화센터 제공) © 뉴스1

그러나 서진씨를 비롯한 진정 당사자들은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결정이라고 입을 모았다. 별도 급식 프로그램의 경우 육류를 해산물로 대체하는 수준이고, 국 또한 채소가 아닌 고기 육수를 사용해 비건 식단을 하는 학생들은 먹을 수 없다. 이마저도 많으면 1주일에 1회 또는 한 달에 2회 정도만 운영될 뿐이다. 학교 급식은 한 달 평균 20일 정도 이뤄지는데 비건 학생의 경우 18일은 제대로 된 식사를 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실제 서울시교육청은 지난해 4월부터 매월 두 차례 채식으로 식단을 꾸리는 '그린급식'을 시행하도록 관내 초·중·고교에 지침을 내렸다. '그린바'를 설치해 매일 채식 식단을 따로 선택할 수 있게 하는 생태전환교육 중점·선도학교도 점차 늘려가고 있다.

하지만 일선 현장에선 채식 급식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참여가 저조하다는 목소리가 많다. 학교 간 편차도 크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서진씨와 함께 인권위 진정에 참여했던 이승주씨는 "월 1회만 나오는 급식으론 비건 학생들의 건강권 보장은 불가능하다"고 전했다. 중학생 자녀를 대신해 진정에 나섰던 임모씨도 "기념일 같은 느낌을 물씬 풍기는 채식의 날 운영은 무의미하다"며 "채식을 선택한 사람들도 균형 잡힌 식단을 제공받을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라"고 촉구했다.

© News1 이지원 디자이너
© News1 이지원 디자이너

공익변호사 단체 두루 소속으로 인권위 진정을 도왔던 지현영 변호사(법무법인 지평)는 "알레르기가 있는 학생을 위한 급식 환경 개선이 꾸준히 이뤄지고 있는 것처럼 채식 선택권 역시 학교장의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이뤄질 수 있는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 10명 중 8명은 무관심과 혐오…비건 알릴 수만 있다면 기꺼이

서진씨는 '비거니즘'을 지향한다. 과거 단순한 채식 위주의 식습관으로 인식됐지만 최근엔 동물성 제품의 소비를 거부하는 삶의 방식으로 그 의미가 확장됐다. 서진씨는 인간이라고 해서 동물을 착취하거나, 학대할 권리는 없다고 강조한다.  

그렇기에 마주하는 혐오도 빈번하다. 개인 사회관계망서비스(SNS)까지 찾아와 험담을 늘어놓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개의치 않는다. 대신 정중하게 본인의 신념에 대해 설명한다. 

서진씨는 "비건에 대한 혐오 의견은 다수다. 다수를 상대로 싸워야 하기에 힘들 때도 있는데 무관심보다는 차라리 혐오가 낫다"고 말했다. 왜 일까. 혐오를 표출하는 방식 자체엔 동의할 수 없으나 무관심은 말 그대로 비건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조차 없다는 방증이기도 해서다. 서진씨는 "한 발짝이라도 비건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다면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계속 의견을 표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무리 힘들어도 착취당하는 동물들보다는 힘들지 않기 때문에, 뜻을 굽히지 않겠다"며 밝게 웃었다.


cho84@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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