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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왜 지금 '리어왕'인가?

(서울=뉴스1) 조성관 작가 | 2022-02-24 12:00 송고 | 2022-03-03 15:32 최종수정
이순재의 '리어왕'
 
"남자 배우라면 젊을 때는 햄릿, 중년에는 맥베스, 말년에는 리어왕을 꿈꾼다. 나는 햄릿도 맥베스도 놓쳤고 마침내 죽기 전에 리어왕을 연기한다. 이 연극 망하면 내 책임이다. 체력적으로 힘들지만 손님이 많으니 신바람이 난다. 그동안 이순재의 연극 대표작은 '세일즈맨의 죽음'이었지만 앞으로는 '리어왕'이 될 것이다. 쓰러져도 좋다는 각오로 무대에 오른다."
배우 이순재가 지난해 11월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배우 이순재는 지난해 말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리어왕'을 연기했다. 3시간 20분짜리 이순재의 '리어왕'은 객석 3층까지 매진되는 대성공을 기록했다. 코로나 상황을 감안하면 경이로운 흥행이다.  

사람마다 문화면을 읽는 취향이 다르다. 문학, 영화, TV, 음악, 미술, 연극, 뮤지컬…. 문화면 기사는 모조리 섭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관심 장르만 편집적으로 읽는 사람도 있다. 내 경우는 특별한 경향이 없이 그때그때 다르다. 그런 가운데서도 전체적으로 보면 연극 관련 기사는 언제나 후순위였다. 영화는 언제나 최상위였던 반면.

그런데 최근 2년 사이에 변화가 생겼다. 연극 기사를 열심히 읽기 시작했다. 일차적으로 연극담당 기자가 재미있는 기사를 발굴하고 글을 잘 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게 전부는 아니었던 것 같다.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대학로티오엠과 같은 주요 연극전용 무대에 오르는 작품들이 내 관심을 끄는 작품이어서였다. '리어왕'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라스트 세션' '햄릿' '리차드 3세'….

셰익스피어 작품이 이렇게 자주 연극무대에 오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다.
지난 1월에는 CJ토월극장에서 셰익스피어 원작의 '리차드 3세'가 무대에 올려졌다. 리차드 3세(1452~1485)는 실존 인물이다. 권모술수로 큰형 에드워드 왕과 작은형 조지가 서로를 증오하게 만들어 형제 사이를 찢어놓는다. 그것으로 부족해 왕위 계승 서열이 높은 조카 두 명을 차례로 살해한다. 그의 악행은 차고 넘친다. 그렇게 왕위를 거머쥔다. 악인의 화신, 리차드 3세 역(役)을 배우 황정민이 맡았다.    

"날 봐. 좋은 핏줄로 태어났지만 거칠게 만들어졌지. 아무렇게나 찍어낸 듯 뒤틀린 모습. 나는 이 순간부터 훌륭한 배우가 되겠어. 때론 웃으면서 때론 동정의 눈물도 흘리면서…세상을 속일 명연기로도 내가 저 왕좌를 차지할 수 없다면, 그럼 조금 더 악해지면 되겠지."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고,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다. 무대의 막이 오르는 순간부터 무대의 주인공은 배우다. 연출자는 어두컴컴한 객석 뒤편에서 자신의 '연출'을 방관자처럼 지켜볼 뿐이다. 무대에서 대사를 까먹는 절체절명의 순간이 와도 "컷"을 외칠 수가 없다. 배우가 알아서 그 위기를 넘겨야 한다.

왜 TV나 영화에서 이름을 날린 실력파 연기자들이 연극무대에 서려 하나. 진정한 배우가 되고 싶어서다. 무대에서 직접 관객의 눈빛을 보며 연기하고 싶어서다. 무대에 서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감독의 컷 소리를 듣지 않고 소통하는 맛을. 관객도 마찬가지다. 거친 호흡과 침방울 속에서 캐릭터를 날것으로 만나고 싶은 거다.

이순재의 말대로 '햄릿', '맥베스', '리어왕'은 남자 배우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탐을 내는 배역이다. 여자 배우라면 셰익스피어 작품 중에서 레이디 맥베스를 탐내지 않을까. 배우 김동원(1916~2006)은 햄릿 역을 가장 많이 맡은 사람으로 손꼽힌다. 배우 유인촌도 햄릿 역을 많이 맡았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자서전 표지
 
영국 런던의 연극가 웨스트엔드에는 매일 밤 '햄릿'을 올리는 햄릿 전용 극장 길구드(Gielgud)가 있다. 평생 햄릿 역을 맡은 배우 존 길구드 이름을 딴 극장이다. 길구드는 로렌스 올리비에와 함께 20세기 영국의 3대 배우로 꼽힌다.

배우만 셰익스피어 비극에서 배역을 맡기를 원하나? 영화감독도 셰익스피어 비극을 연출하려 한다. 왜? 셰익스피어 비극은 불멸이니까. 연출을 빛나게 하는 작품이니까. 실력 있는 배우가 햄릿이나 맥베스로 연기력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처럼 영화감독 역시 고전 비극을 맡아 연출력을 공인받고 싶어 한다.

'나, 셰익스피어 비극도 연출한 감독이야.'

할리우드의 천재 감독으로 불렸던 오손 웰즈도 1948년 '맥베스'를 영화로 만들었다. 이번엔 아카데미와 칸 영화제를 석권한 조엘 코언 감독이 연출한 영화 '맥베스'가 나온다. 덴젤 워싱턴이 맥베스를 맡았다. 

덴젤 워싱턴이 연기한 2022년 판 '맥베스'
덴젤 워싱턴이 연기한 2022년 판 '맥베스'
 
권력에의 탐욕과 추락

'사람은 젊어서 배우고, 늙어서 이해한다'는 말이 있는데, 내가 딱 그렇다. 학창 시절 나는 영문과를 다녔다. 대학 4년을 돌이켜 볼 때 내가 가장 잘한 선택은 영문과를 다니며 영어연극을 해봤다는 것이 아닐까. '맥베스'에서 단역이나마 캐스트로 무대에 올라봤다는 사실. 비록 스쳐 지나가는 배역에 불과했지만 어두컴컴한 무대 뒤에서 주연과 조연들의 연기를 지켜보았다. 이 경험은 4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내게 영향을 미친다.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그때 '맥베스'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었다. 스무살 언저리의 평범한 대학생이 어찌 '탐욕에 눈이 멀어 무너지는 권력자의 심리'를 감히 헤아릴 수 있다는 말인가. 인생을 조금 살아보니 '맥베스'가 왜 고전으로 상찬되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일본이 자랑하는 영화감독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1910~1998). 그는 1951년 '라쇼몽'으로 베네치아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았다. 이때부터 세계는 일본 영화를 주목한다. 1954년 '7인의 사무라이'를 내놓아 또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했다. 할리우드 영화 '황야의 7인'은 이 영화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영화감독으로서의 역량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는 셰익스피어에 도전했다. 그 첫 번째 작품이 '맥베스'다. 그는 제목을 '거미집의 성'으로 하고, 시대 배경과 등장인물을 일본풍으로 바꿨다. 1985년에는 '리어왕'을 일본풍으로 각색해 '란'(亂)을 연출했다.

나는 2019년 출간한 '도쿄가 사랑한 천재들'을 쓰면서 구로사와 감독의 영화를 거의 다 섭렵했다. 그러면서 기 소르망, 스티븐 스필버그, 조지 루카스, 프란시스 코폴라 같은 세계적 명사들이 왜 침이 마르게 구로사와를 찬미했는지를 깨달았다.

영화 '란' 포스터
 
구로사와를 연구하면서 내가 특히 경탄한 것은 '거미집의 성'과 '란'이다. 이미 여러 성공한 감독들이 도전했다가 원작이 주는 중압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실패를 거듭한 게 '맥베스'와 '리어왕'이다. 구로사와는 시대 배경을 16세기 전국시대로 바꿨고 셰익스피어 희곡의 특징인 화려한 대사를 과감하게 생략했다.

그런데, 원작의 메시지가 더 선명하게 전달되었다. 피골이 상접한 채 황야를 떠돌며 미쳐가는 이치몬지 히데토라. 모든 걸 잃고 탄식하듯 내뱉는 독백에서 나는 구로사와가 위대한 감독임을 실감했다. 그리고 그 너머에 셰익스피어가 산맥처럼 버티고 있는 게 보였다.

시간은 살아있는 모든 것을 소멸시킨다. 고전은 그 시간의 파도를 거슬러 살아남은 작품이다. 어떤 문학 작품이 고전의 선반에 놓이려면 후대에 의해 지속적으로 리메이크되어야 한다. 시대 상황에 따라 그 의미와 메시지가 다르게 해석되고 전달되는 것, 그게 고전의 힘이다.

오노레 드 발자크(1799~1855)는 프랑스 소설의 아버지로 불린다. 발자크가 '리어왕'을 모티브로 쓴 소설이 '고리오 영감'이다. 러시아 작곡가 쇼스타코비치(1906~1975)는 1934년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이라는 오페라 곡을 썼다. 뮤지컬 '라이언 킹'과 뮤지컬 영화 '웨스트사이드 스토리'는 각각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영국 배우 로렌스 올리비에는 76살에 '리어왕'을 연기했다. 그로부터 38년. 이순재는 86살에 '리어왕'이 되었다. 가히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최고령 ‘리어왕'의 탄생이다. '리어왕' 이순재는 말한다.

"리어왕은 쫓겨난 다음에야 '그동안 내가 백성들을, 가난한 자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구나' 참회한다. 늙을수록 칭찬을 좋아하는데 리어왕도 그러다 속아 넘어갔다. 리더란 무엇인가 묻는다는 점에서 이 연극은 시대를 초월한다."

* 외부 필진의 글은 뉴스1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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