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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그들이 맛본 이 세상의 마지막 음식?

(서울=뉴스1) 조성관 작가 | 2021-09-23 12:00 송고 | 2021-09-28 13:40 최종수정
반으로 자른 머스크 멜론. 이미지투데이 제공
반으로 자른 머스크 멜론. 이미지투데이 제공

주말 밤 딸아이가 저녁을 먹고 배달 앱으로 설빙 빙수를 시켰다. 오랜만에 시켜 먹는 빙수. 요거통통멜론설빙. 한입에 먹기 힘든, 큼지막한 멜론 조각들이 제법 수북했다. 숟가락으로 멜론 조각으로 먹기 좋게 잘랐다. 그리고 요거트와 치즈로 범벅이 된 멜론을 먹기 시작했다. 멜론을 씹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이렇게 쉽게 멜론을 먹어도 되나?'
내가 멜론이라는 과일을 처음 맛본 것은 신문사에 입사한 뒤였다. 대학 시절에는 구경도 못 했다. 선배들이 사주는 고깃집에서 디저트로 멜론과 처음 만났던 것 같다. 그때로 계산하면 대략 33년 정도 된다. 그 뒤에 명절에 멜론 선물도 몇 번 받아 보았다. 나도 가끔 신세를 진 취재원에게 선물을 보낼 때 고민 없이 멜론을 골랐다. 그즈음 멜론은 과일 선물 중 최고로 대접받았다.    

1937년 4월17일 도쿄제국대 부속병원. 조선 유학생이 이날 쓸쓸하게 눈을 감았다. 이상(李箱 1910~1937)이다. 일본의 근대성을 열망했던 식민지 조선의 천재 김해경. 그는 폐결핵이 악화된 상태에서 '거동 수상자'로 몰려 유치장에 갇혔다가 병원에 실려 갔다. 이상이 도쿄제국대 부속병원에서 가뿐 숨을 몰아쉴 때 서울의 아내 변동림이 황급히 도쿄로 왔다. 남편은 아내에게 유언처럼 내뱉었다.
머스크 멜론. 조성관 작가 제공
머스크 멜론. 조성관 작가 제공

"센비키야 멜론을 먹고 싶다."

거대한 우주가 깜빡깜빡 소멸해가는 그 순간, 불운한 천재가 마지막으로 간절히 원한 것은 멜론이었다. 센비키야 멜론!
센비키야(千疋屋)는 도쿄의 유서 깊은 과일 전문 가게. 에도 시대인 1834년 도쿄 번화가 니혼바시에 문을 열어 지금까지 6대째 명맥을 이어온 노포(老鋪) 센비키야. 변동림은 니혼바시의 센비키야까지는 너무 멀어 병원 앞에서 멜론 한 조각을 샀다고 한다.

이상은 미식에도 비범한 미각을 가졌다. 그의 산문 '성천기행'(成川紀行)을 보면 여러 곳에서 음식과 관련된 언급이 자주 보인다. '성천기행'은 이상이 평안남도 성천에서 여름 한 달을 머문 뒤에 1935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문에 연재한 것이다.

<향기로운 MJB의 미각을 잊어버린 지도 20여 일이나 됩니다> <야채 '사라다'에 놓이는 '아스파라가스' 잎사귀 같은 또 무슨 화초가 있습니다> < 청둥호박이 열렸습니다. 호박꼬자리에 무시루떡-그 훅훅 끼치는 구수한 김에 좇아서 증조할아버지의 시골뜨기 망령들은~> < '코코아'빛 입술은 머루와 다래로 젖었습니다. 나를 아니 보는 동공에는 정제된 창공이 '간쓰메'가 되어 있습니다>  

멜론은 페르시아가 원산지. 고대 로마에 수입되어 최고급 과일로 승격했다. 교황청과 귀족 층에서 고급 과일 멜론을 집중적으로 소비했다. 교황청이 멜론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를 보여주는 극적인 사례.

14세기 교황청이 남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겨간다. 세계사에 나온 '아비뇽의 유수'(幽囚)다. 교황청 요리사들이 아비뇽으로 가면서 멜론 씨앗을 가져갔다. 흙과 물과 바람이 다른 캔털루프 마을에서 자란 멜론은 교황청에서 먹어본 멜론과는 빛깔과 맛이 달랐다. 껍질은 녹색이지만 과육은 오렌지색! 캔털루프는 새로운 멜론의 원산지로 자리 잡는다. 캔털루페 멜론의 탄생 스토리다. 캔털루프 멜론은 프랑스 파리로 흘러들어 귀족과 상류층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파리 문화예술계의 미식가인 소설가 알렉상드르 뒤마가 유명한 캔털루프 멜론 마니아였다.

이상은 언제 누구와 니혼바시 센비키야에 가서 멜론을 먹어봤을까? 그때 이상의 뇌를 마비시킨 것은 머스크 멜론이었을까, 아니면 캔털루프 멜론이었을까. 일본의 근대성이 혀끝에서 느껴지는 멜론으로 각인되었던 것이리라.
     
접시에 올려진 오르톨랑 요리 / 사진출처 = 영화 '바베트의 만찬'
접시에 올려진 오르톨랑 요리 / 사진출처 = 영화 '바베트의 만찬'

문화대통령 미테랑과 오르톨랑 요리


14년간 프랑스 대통령을 지낸 프랑수아 미테랑(1916~1996). 지성인이었던 미테랑은 문화강국 프랑스의 위상을 높인 대통령으로 평가받는다. 그가 재임 중 추진한 것이 건축을 앞세운 그랑 프로제(Grand Project)다. 루브르 유리 피라미드, 라데팡스, BnF가 미테랑 재임 중에 세상빛을 봤다.

그는 전립선암으로 투병하다 운명했다. 인생 소풍을 끝내는 시간이 괘종시계의 초침처럼 째깍째깍 다가올 때 가족은 그를 위한 마지막 만찬을 준비했다.

1995년 12월31일. 마지막 식탁에 올라가는 메뉴는 4가지. 마렌느굴, 푸아그라, 구운 수탉, 그리고 오르톨랑. 미테랑은 가금류를 좋아했다. 그중 미테랑이 특히 좋아한 것은 오르톨랑(ortolan) 요리.

프랑스 사람들은 멧새의 일종인 오르톨랑 요리를 즐긴다. 프랑스는 오르톨랑을 보호하기 위해 오르톨랑 사냥을 금지하고 매매를 불법으로 했지만 먹고 싶은 욕망을 이기진 못했다. 오르톨랑은 공공연하게 식재료로 유통된다. 오르톨랑 요리는 코냑에 푹 담가 절인 뒤에 오븐에 구워내는 것이다. 한 사람당 한 마리씩 먹는다.

하지만 1995년의 마지막 날 저녁 미테랑의 아내는 특별히 한 마리를 더 준비했다. 한 마리를 다 먹고 아쉬워하는 미테랑에게 한 마리를 더 내놓았다. 그는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오르톨랑 구이를 먹었다. 그 후 일주일 동안 미테랑은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침대에 누워있다가 1996년 1월8일 깊은 잠에 들었다.  

오르톨랑 요리는 1987년에 개봉한 덴마크 영화 '바베트의 만찬'(Le Festin de Babette)에도 등장한다. 이 영화는 최초의 요리 영화로 평가받는다. 전쟁을 피해 덴마크의 한적한 해변 마을로 피난 온 프랑스 여성 요리사 바베트가 복권에 당첨되어 마을 사람들을 초대해 정통 프랑스 정찬을 대접한다는 줄거리다. 그때 코스 요리 중 하나로 나오는 게 오르톨랑이다.
  
영국의 '피시 앤 칩스'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영국의 '피시 앤 칩스'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104세 과학자와 '피시 앤 칩스'


안락사에 관심이 많은 이들은 데이비드 구달(1916~2020)이라는 호주 과학자를 기억할 것이다. 구달은 안락사가 허용된 스위스 바젤로 가서 그곳의 병원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너무 오래 살았다. 이제 그만 여행을 끝내고 싶다."

그가 104세로 영면하기 직전 맛본 음식은 무엇일까. 백년이라는 시간을 훌쩍 넘는 기나긴 여행을 마치고 온 곳으로 돌아가는 그 장엄한 순간. 베토벤의 9번 교향곡 '합창'을 마지막으로 감상한 구달 박사는 '마지막으로 드시고 싶은 것'을 혀끝으로 음미했다. 그것은 '피시 앤 칩스'와 치즈 케이크였다.

왜 '피시 앤 칩스'였을까? 구달은 영국 출신이다. 그는 젊은 날 호주의 대학에 일자리를 얻어 호주로 이주했다. 영국인들은 '피시 앤 칩스'를 즐긴다. 영국 이민자들의 후손인 호주 사람들도 마찬가지.

나는 2006년 호주에 취재를 하러 갔다가 애들레이드 해변에서 남극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피시 앤 칩스'를 먹어본 일이 있다. 그때 '피시 앤 칩스'에 대해 갖고 있던 모든 선입견과 고정관념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전까지 간간이 '피시 앤 칩스'를 맛볼 때마다 이렇게 맛없는 음식을 영국사람들은 왜 그렇게 좋아하는 걸까 의아하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본고장에서 제대로 요리된 '피시 앤 칩스'를 맛보니 그게 아니었다. 미루어 짐작건대, 구달 박사에게 '피시 앤 칩스'은 인생의 소울푸드였던 것이다. 그랬으니 이승을 떠나는 그 순간에 마지막으로 맛보고 싶었으리라.
 
도쿄의 한 식당에서 나오는 우나동. 조성관 작가 제공
도쿄의 한 식당에서 나오는 우나동. 조성관 작가 제공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의 소울푸드


백남준(1932~2006)은 만성 당뇨병 환자였다. 커피를 설탕물처럼 마셨고 추위에 특히 민감했다. 그래서 백남준은 겨울철이 되면 철새처럼 따뜻한 플로리다로 가서 겨울을 나곤 했다. 마이애미 해변의 아파트를 장기 임대해 부인 구보다 시게코와 지냈다. 2006년 새해 첫날 아침도 플로리다 마이애미의 아파트에서 맞았다. 1월26일 밤, 잠을 자던 백남준은 잠꼬대했다. 그는 앞서간 예술가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중에는 요셉 보이스도 있었다. 이를 지켜보던 시게코는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그렇게 이틀이 흘렀다. 1월29일은 음력 설날. 백남준은 시게코에게 저녁에 장어덮밥을 먹고 싶은데 해줄 수 있냐고 했다. 장어덮밥, 우나동(鰻井)은 백남준의 '최애' 음식이었다. 뉴욕 소호에 살 때도 백남준은 정기적으로 일본식당에 가서 우나동을 즐겼다.

뇌졸중 후유증으로 몸 한쪽을 쓰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휠체어를 타고 우나동을 먹으러 외출하곤 했다. 한국인이 복날 삼계탕이나 보신탕을 먹는 것처럼 일본인은 복날이 되면 우나동을 보양식으로 즐긴다. 일본인이 우나동을 먹기 시작한 것은 에도시대부터. 우나동은 '우나기 돈부리'의 줄임말.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고 일본인 부인 덕에 백남준은 우나동을 즐겨 먹었던 것이다.  

백남준은 음력 설날 시게코가 만들어준 우나동을 한 그릇 다 비웠다. 그리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몇 시간 뒤 그는 침대에서 거칠게 숨을 쉬었고, 잠시 후 고개를 떨궜다. 미디어아트의 창시자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소울 푸드를 맛있게 먹고 아내 곁에서 눈을 감았으니 온 곳으로 돌아가는 여행길이 행복했으리라.  

모든 감각이 죽어도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게 미각이다. 맛에 대한 기억은 뇌에 새겨진 문신처럼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내가 세상에 나온 사명을 다하고 빈 배로 떠나는 그날, 나는 마지막으로 무엇이 먹고 싶어질까.


autho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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