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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추석, 고향의 맛을 찾아가는 시간

(서울=뉴스1) 조성관 작가 | 2021-09-09 12:00 송고 | 2021-09-09 19:51 최종수정
영화 '라이언' 포스터
영화 '라이언' 포스터

집집마다 그 집안의 역사와 내력이 담긴 음식이 한두 개쯤 있다. 오로지 그 집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음식,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레시피로 조리하는 음식, 가족의 유대감과 결속력을 강화해 주는 음식. 그 패밀리의 소울 푸드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 같다.

'맛남의 광장'이라는 TV프로그램이 있다. 백종원이 진행하는 이 프로그램은 재고가 많은 농수산물의 소비를 촉진하는 요리를 선보인다. 한번은 조기를 다양하게 요리하는 법을 소개했다. 백종원은 지느러미를 손질한 조기를 기름에 튀겨 출연자들과 나눠 먹었다.
그 프로그램을 본 뒤 아내는 인터넷으로 조기를 주문했다. 조기가 도착하자 아내는 "일요일 저녁은 마늘조기찜"이라고 예고했다. 그 말에 아이들의 눈이 커지고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마늘조기찜의 레시피는 이렇다. 조기, 잘게 다진 생마늘, 곱게 간 고춧가루. 조기의 비늘과 지느러미를 없앤 다음 그 위에 잘게 다진 생마늘을 얹는다. 그 위에 고춧가루를 골고루 뿌린다. 양념이 된 조기들을 찜기에 올려놓고 찐다.

마늘조기찜. 조성관 작가 제공
마늘조기찜. 조성관 작가 제공
 
마늘조기찜 요리를 맛있게 먹으려면 젓가락질에 능숙해야 한다. 마늘과 고춧가루가 조기살 위에 얹힌 상태로 발라내 먹는다. 고춧가루 양념이 밴 마늘만을 따로 음미할 수도 있다. 더 이상의 설명은 필설이 부족한 관계로 생략한다. 아이들은 조기 대가리와 뼈만 남겨놓고 다 발라 먹었다.
내 고향은 칠갑산이 있는 충남 청양이다. 양념 조기찜은 아이들에게 '청양표 음식'이다. 작고한 아버지와 어머니는 각각 청양, 홍성 사람이다.  

친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명절 때 친가에 내려가면 아이들은 언제나 이 조기찜을 먹곤 했다. 이제는 큰어머니가 이 레시피를 전수받아 명절 때마다 상에 차려놓는다. 그때마다 우리 식구는 조기찜을 집중 공략한다. 갈비찜 같은 것에는 어지간해서 젓가락이 가지 않는다. 나는 이런 마늘조기찜을 다른 지방에서는 먹어본 일이 없다.
 
꿈에도 그리운 어머니 손맛 김치밥

처가에도 조기찜 같은 음식이 있다. 김치밥이다. 작고한 장인어른은 황해도 은율 출신이고, 장모님은 평안북도 영변 출신이다. 장인은 어린 시절 겨울철마다 맛있게 먹었다면서 오래전 장모님께 '김치밥'을 주문했다고 한다. 장모님은 들어본 적도 없는 그 음식을 남편의 단편적인 기억을 조합해 복원해 냈다.

돼지고기 목살을 엄지손가락 절반만 한 크기로 자른다. 잘 익은 김장김치를 씻어서 역시 잘게 썬다. 김치와 돼지고기를 삶는다. 그 국물을 김치·돼지고기와 함께 밥솥에 넣고 밥을 한다. 여기에 만들어놓은 양념장을 뿌려 비벼 먹는다. 지금은 아내가 김치밥 노하우를 전수받아 겨울철이면 두어 번 해 먹는다.

김치밥은 황해도 은율에서 자주 해 먹던 음식이라고 한다. 장인은 아련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김치밥이 그렇게 먹고 싶었던 모양이다. 1930년생인 장인은 북한이 공산화된 직후 형제들과 월남해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다. 6·25 전쟁이 터지면서 금방 돌아갈 줄 알았던 고향과는 영영 이별이었다. 장인은 구월산이 보이는 빛바랜 흑백 사진을 탁자 유리판 밑에 끼워놓고 평생 고향을 그리워했다. 그랬기에 어머니의 손맛이 더욱 간절했으리라. 김치밥은 갈 수 없는 고향이었고, 꿈에도 그리운 어머니 손맛이었다.
 
영화 '로맨틱 레시피'
영화 '로맨틱 레시피'
 
하산은 왜 울음을 터뜨렸을까   

2014년에 나온 '로맨틱 레시피'(원제 The Hundred-Foot Journey)라는 영화가 있다. 인도 출신 요리사 하산이 우여곡절 끝에 프랑스로 가서 셰프로 성공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같은 이름의 소설을 영화로 제작한 것이다. 어느 날 밤, 하산은 인도에서 막 올라온 요리사가 인도에서 공수받은 향신료로 아내가 만들어준 도시락을 먹는 것을 본다. 별생각 없이 한입 먹어본 하산은 그만 울음을 쏟는다. 프랑스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식당을 하겠다고 결심한다. 영화는 소설의 속의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음식을 만들고 먹고 그 요리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수다를 떠는 즐거움이 인간의 원초적인 즐거움이다. 인종·문화·언어의 차이를 뛰어넘는, 영혼의 피로를 씻어주는 최고의 카타르시스다."

독일 농촌에서는 한국인이 가을에 김장을 하듯 겨울 식량으로 부어스트(소시지)를 만든다. 부어스트는 주(州)마다 그 제조법과 맛이 다르다. 한국인이 김치에서 고향맛을 느끼는 것처럼 독일인은 부어스트에서 고향을 음미한다. 프랑스, 스페인, 그리스, 이탈리아, 이집트 같은 지중해 연안 국가에서는 치즈가 그런 역할을 한다. 지중해 연안 사람들은 치즈의 쿰쿰한 군내에서 향수를 느낀다. 프랑스에는 치즈 종류가 360개가 넘는다. 프랑스 가정에는 10종류의 치즈를 준비해 치즈 파티를 여는 문화가 있다.

뉘른베르크 소시지. 조성관 작가 제공
뉘른베르크 소시지. 조성관 작가 제공
 
가스트로피직스(gastrophysics)라는 학문 분야가 있다. 미식학 gastronomy와 물리학 physics를 합성해 만든 신조어다. 영국 옥스퍼드대학교 정신물리학자 찰스 스펜스 교수가 심리학, 인지과학, 뇌과학, 마케팅, 디자인을 융합해 가스트로피직스라는 지식 분야를 창조했다. 스펜스 교수는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음식은 혀가 아닌 뇌가 맛본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이 맛에 미치는 영향이 미각만큼 중요하다."

맛은 음식을 둘러싼 주변적인 요인에 크게 좌우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나의 오랜 단골인 서울 정동추어탕집은 모든 게 33년 전과 똑같다.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공간이 달라지면 음식 맛도 달라진다는 데 주인과 손님이 합의한 결과다.

똑같은 음식이라도 어떤 용기에 내놓느냐에 따라 뇌는 맛을 다르게 느낀다. 무거운 식기를 쓰면 고객들은 그 식기에 나오는 음식을 더 고급스럽다고 평가한다. 일류 레스토랑에서 묵직한 포크와 식기를 쓰는 이유다. 또한 고급 식당에서는 벽면을 포함한 전체적인 색조를 빨강 계열로 하는 이유도 레드가 식욕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이민자로 20년 이상 살다가 노년에 들어 귀국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젊었을 때야 돈 버느라 정신 없이 보내지만 노년에 접어들면 고향이 그리워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부모님도 없고 산천은 의구(依舊)할리 없건만 왜 고향을 그리워하나. 고향의 맛이 그리운 것이다. 고향은 원점이고 0이다.
  
인도 서벵갈 지방에서 잘레비를 기름에 튀기고 있는 모습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인도 서벵갈 지방에서 잘레비를 기름에 튀기고 있는 모습 / 사진출처 = 위키피디아
 
튀김과자 잘레비가 소환한 25년 전 고향

'라이언'이라는 호주 영화가 있다. 1986년 인도 칸드와에서 있었던 실화를 영화로 제작했다. 다섯 살 소년 사루는 어머니, 형과 함께 하루 벌어 하루 먹는 궁핍한 생활을 한다. 하루는 열차를 잘못 탔다가 잠들어 눈을 떠보니 수천㎞ 떨어진 낯선 곳에 도착했다. 말이 다른 지방에서 우여곡절 끝에 호주 가정에 입양된다. 훌륭한 부모의 보살핌으로 고향을 잊은 채 대학을 마치고 사회인으로 성장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인도 친구들 집에 초대받아 갔다가 '잘레비'라는 과자를 먹어본다. 어릴 적 고향에서 형과 함께 먹었던 기름에 튀긴 과자 잘레비. 그때부터 무의식의 심연에 침전되어 있던, 까마득한 어릴 적 기억들이 소용돌이처럼 수면으로 떠 오른다. 고향 생각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회사도 그만두고 집에 틀어박혀 구글 어스로 희미한 기억 속의 고향 위치를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그리고 25년 만에 고향을 찾아간다. 고향에서 이사를 가지 않은 채 자신을 기다려온 어머니·형과 기적적으로 재회한다. 얼마 후 다시 호주의 양부모가 고향을 찾아 친어머니와 만난다. 영화에서 가장 울림이 큰 대사다.

"엄마가 절 잘 길러주신 것에 감사드린대요. 또 두 분이 제 가족인 걸 이해하신다 하셨어요.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엄마의 의미가 변하진 않아요. 엄마 사랑해요. 아빠도요."

이 모든 것은 잘레비 과자에서 비롯되었다. 마치 프루스트가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를 먹으면서 잃어버린 시간을 소환시킨 것처럼.

20세기 유럽에서 폴란드만큼 비극적인 운명에 놓였던 나라를 찾기도 힘들 것이다. 폴란드에서는 친척이 집을 찾아오면 가장 먼저 내놓는 게 맛대가리 없는 '검은 빵'이다. 나라를 잃고 오랜 세월 가난과 굶주림에서 살아내야 했던 조상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다.    

입양아 출신 미국 사업가 토머스 클레멘트. 1956년 미국에 입양된 그는 42년 만인 1998년 한국을 방문해 일주일간 서울에 머물렀다. 미국에서 성공한 과학자로 사는 그가 몇 년 전 다시 한국을 찾았다. 그때 그가 신문인터뷰에서 털어놓은 여러 대목에서 나는 전율을 느꼈다. 그중 밑줄을 그어놓고 스크랩한 대목은 이것이다.

"처음 보는 음식 같았는데, 입에 넣는 순간 세포들이 살아나는 것 같더군요. 내 몸은 떡과 김치와 팥죽을 기억하고 있었어요."


autho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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