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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명묵 칼럼] '20대 정치성향'이 궁금하다면 바로 여기

(서울=뉴스1) 임명묵 | 2021-09-05 09:56 송고
지난 7월6일 밤 서울 홍대 앞 거리가 시민들로 붐비고 있다. 2021.7.6/뉴스1 © News1 유승관 기자
지난 7월6일 밤 서울 홍대 앞 거리가 시민들로 붐비고 있다. 2021.7.6/뉴스1 © News1 유승관 기자

대학교나 직장 같은 일반 사회에서, 상급자가 불필요하고 쓸데없는 군대식 '갑질'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보통 '군대놀이'라고 한다. 심지어는 군과 대체로 인연이 없는 여성들 사이에서도 이런 군대놀이가 왕왕 행해진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런 악습은 인간이 특정한 사회적 관계에서 습득한 규범을 다른 사회적 관계에 마찬가지로 적용하려 하는 경향성을 아주 잘 드러낸다. 이는 징병제 국가인 한국에서는 전역자들이 군 문화를 자신이 속한 조직에 적용하고자 하면서 특히 더 두드러졌다. 워낙 그 확산이 광범위했기에, 군 경험이 없는 이들도 간접적으로 군 문화를 체험하며 문화 재생산에 참여했다.

이런 군사주의의 확산은 계급에 기초한 위계관계의 확립과 그에 따라오는 권력의 경험이 큰 역할을 했다고 이야기되며, 주로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측면으로서 많이 논해진다. 하지만 초창기 군 문화의 확산은 단순히 권력의 문제에서 그치는 것은 아니었다. 군사주의가 사회 일반으로 확산되는 것은 새로이 독립한 탈식민 국가 대부분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이는 신생 국가들에서 민간 행정 조직과 민간 사회가 아주 취약한 역량을 보유하고 있었던 반면, 군은 초강대국의 지원을 받으며 성장한 가장 유능한 집단이었기 때문에 발생한 불균형의 문제였다. 대표적으로 박정희 시대에는 군에서 여러 기술 교육을 받은 인구 집단이 배출되어 산업 현장으로 쏟아져 들어갔고, 이들은 한강의 기적에서 주역을 맡았다. 군은 개발 시대 한국에서 국민적 훈련장이나 다름없었고, 군사주의의 확산은 그에 따른 필연적 부산물이었다.

그러나 군과 민간 사회의 이러한 역량 차이는 한국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고, 사회가 폭발적으로 도시화되고, 양질의 교육이 빠르게 보급되면서 금세 뒤집혔다. 1979년의 정치적 위기나 1987년의 민주화는 이미 한국의 민간 사회가 군의 통제력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준 상징이었다. 그리고 이 무렵에 청년기를 보낸 후속 세대는, 물론 여전히 많은 이들이 징병제 국가답게 군을 훈련장으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훈련장을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 대학교 캠퍼스였다.

1980년대 대학교 정원이 확대되면서, 당시 청년층의 25%에서 30% 가까운 인구가 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이는 여전히 일부였지만, 급진화되고 있는 학생운동이 거대한 인구 풀을 발견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변화였다. 본격적 학생운동이 시작되는 1980년부터, 민주화 투쟁이 있던 1987년을 거쳐, ‘열사 정국’이 있던 1991년까지, 대학교 캠퍼스는 학생운동의 여러 노선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는 공간이었다. 학생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던 이들조차도 학생운동의 의미나 필요성을 둘러싼 논쟁의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을 수는 없었다. 

군이 다양한 사회 기관에서 조직 방법론과 문화를 전파했던 것처럼, 10여 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캠퍼스라는 공간과 그 속의 학생운동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청년층을 훈련하는 곳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80년대의 학생운동에 참여했던 이들은 필요에 따라서 조직을 만들고, 여론을 형성하고, 대중 동원의 기예를 철저히 익혔고, 이런 방법론들은 그들이 특히 정치적 과업을 수행하려고 할 때 아주 유용하게 쓰였다.

그렇게 군을 비롯한 국가적 관료 엘리트 기관에서 훈련받은 이들과 대학교 캠퍼스의 저항 운동을 통해 훈련받은 이들은 각각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을 형성하여 대립했다. 각 집단의 핵심 세대들은 실질적으로 대한민국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세대로 자리매김했다. 이 같은 세대와 집단 간 투쟁은 그런 의미에서 서로 다른 훈련장 간의 패권 투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군 경험에도 냉소를 보내고, 학생운동 몰락 이후에 태어난 청년 세대는 어느 조직과 집단에서 정치적 '훈련'을 받을까? 당장 떠오르는 공간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2000년대 이후, 혹은 1990년대부터 시작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 청년층이 '정치적'이지 않고 '개인적'이라는 논의 또한 기존 훈련장이 갖던 지배력의 퇴조와도 무방하지는 않을 것 같다.

군이 갖던 훈련장으로서의 위상은 민주화 이후 광범위한 관료 조직들로 분산되었다. 캠퍼스는 학생운동의 쇠퇴 이후에도 당분간은 청년층이 정치적 의식을 형성하고 의견을 교환하는 장으로 남았다. 그러나 두 훈련장 모두 대중적 기반은 빠르게 상실되었으며, 자연히 청년층은 정치나 사회 이슈, 여론 등을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다는 진단과 비판 의식이 번져나갔다.

하지만 그런 인식은 급변하고 있던 현상을 절반만 보는 것이었다. 확실히 새롭게 부상하는 청년층은 당장은 눈에 보이는 정치적 영역에서 덜 눈에 띄고, 그런 이슈에 덜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보였다. 그들은 소비, 대중문화, 여가 등 선진국 도시 사회의 핵심적 관심사에 더 몰두하는 것처럼 보였고, 실제로 그러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사회적 문제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또 그와 관련된 여론을 형성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곤란하다. 그저 그들이 논쟁을 하고 갈등을 빚던 장소, 즉 새로운 정치적 '훈련장'이 기성세대의 시선에 포착되지 않은 것이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새로운 훈련장의 이름은 바로 인터넷이었다.

물론 인터넷을 정치적 여론 형성과 동원의 장으로 활용한 것은 지금의 청년층이 처음은 아니었다. 처음을 알린 것은 과거의 청년층으로, 주로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생에 걸쳐 있는 세대였다. 1990년대에 컴퓨터와 인터넷이 가졌던 혁신적 성격과 희소성을 감안하였을 때, 그들이 주로 대학 캠퍼스라는 훈련장을 통해 형성된 정치적 집단이었음은 불문가지다.

이 때문에 인터넷은 주로 민주화 세력이라고 칭해지는, 대학 캠퍼스의 문화와 조직 방법론이 적용된 공간으로서, 어떠한 연장 선상으로서 인식되었다. 2002년의 노무현 돌풍을 만들어낸 노사모는 그 대표적인 상징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로 그 2002년에 나는 인터넷에서 노무현 돌풍이 아니라 전혀 다른 현상에 정신이 팔려있었는데, 그것은 나보다 10살은 많은 이들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던 것처럼 보인 '군 가산점 논쟁'이었다. 남성에게만 가해지는 군복무의 불평등함, 여성이 임신과 출산으로 지어야만 하는 특수한 부담에 관한 치열한 논쟁이 게시판마다 잊을 만하면 등장했다. 9살이던 우리 학급의 남녀학생들은 인터넷에서 그 논리를 학습하여 현실에서 언쟁을 벌였다. 돌이켜보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예고하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성년이 되고 인터넷을 접한 세대는 이제 중장년이 되었고, 유년기 때부터 인터넷을 접한 세대는 청년이 되었다. 그들은 하루 시간의 많은 부분을 인터넷에 할애했으며, 세상의 정보와 여론,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 잠재적 동맹자와 대적자들의 구성을 인터넷을 통하여 학습했다. 커뮤니티 안에서 치열한 논쟁에 참여하면서 몇몇 이들은 인터넷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논리를 전개하고 상대방의 주장을 억누르고 관중들을 환호케 하고 다른 커뮤니티와 연합하는 법 등 수많은 기술을 배워나갔다.

앞세대에서 이런 경향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나, 청년층은 훨씬 더 능수능란하게 기술을 활용할 수 있었고, 또 수많은 일상적 주제에 대해서 이런 방법론을 통해 여론을 만들 수 있었다. 따라서 산업화 세대가 군에서, 민주화 세대가 캠퍼스에서 학습하였던 그것을 그들은 인터넷에서 학습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문화와 공간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군은 효율적으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일사불란한 상명하복 문화와 지휘 체계를 지향한다. 군 문화는 거의 30년에 걸친 군사 정권과 엘리트가 갖는 효율성을 보장했다. 학생운동은 강한 국가에 대항하여 대중의 힘을 동원해 맞서야 했다. 따라서 캠퍼스 문화는 공안 기관의 감시망을 피하는 법, 대중에게 다가가는 호소력 있는 여론을 만들어내는 법, 그것을 조직적으로 퍼트리는 법을 가르쳤다.

청년 세대의 인터넷이라는 공간도 마찬가지로 비슷한 기능을 했을 것이라고 상상해볼 수 있다. 가까이 잡아도 2010년부터 시작된 커뮤니티 간의 숱한 전쟁, 대중문화를 둘러싼 여러 갈등(핵심적으로는 남녀 갈등)에서 승리하기 위한 문제는 어떻게 속도감 있게 여론을 조직하고 폭발시킬 것인가에 달려있었다. 그것이 아이돌 팬덤 활동, 인터넷 방송 시청, 게임, 게시판 내부와 게시판 간의 투쟁의 요체였다. 이를 위해서는 아주 고도로 의식화되어 있고 행동력이 높은 소수가 필요했다(모든 성공적 대중운동이 그러하듯).

그들은 ‘화력’을 집중시켜서 이목을 끌어야 했고, ‘좌표’를 공유해 자신들에 동조할만한 새로운 사람들의 유입과 참여를 독려했으며, 커뮤니티 전쟁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대다수의 인터넷 유저가 기거하는 대중 공간에서 명분과 논리를 잡기 위한 일종의 전략 지침과 행동 프로토콜들을 개발했다. 그것을 명확한 교리로 정리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커뮤니티를 오래 살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문법을 알고 있다.

20대, 혹은 90년대생이 주축이 된 예상치 못한 정치적 돌풍으로 여러 현상이 논해진다. 2015년부터 본격화된 ‘페미니즘 리부트’, 혹은 30대 당대표를 만들어낸 ‘이준석 신드롬’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기존의 틀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런 사건이 연이어 튀어나오니 어떤 식으로 이 새로운 현상들을 해석해야 할지 막막해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그러나 이런 모든 현상의 근원을 살펴보면, 결국에는 온라인 공간이 새로운 정치적 훈련장으로 부상했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그 온라인 공간의 투쟁 내용들, 20대에게 여론을 조직하고 폭발시키는 법을 훈련하는 그 사건들은 정치와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경우가 많다. 한때 지나가는 대중문화 뉴스, 혹은 신문 사회면의 단신 기사 같은 게 연쇄적 폭발의 계기가 되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시시해 보이는’ 사건에서 형성된 갈등 관계와 투쟁의 방법론은, 정치라는, 한국 사회의 주류 영역에 순식간에 쇄도해 들어올 수 있다. 애초에 지난 10년만 돌이켜보아도 우리는 이미 몇 가지 사례를 꼽아볼 수도 있다.

따라서, 청년층 여론의 동향을 알기 위해 인터넷 세계의 여러 지형을 탐사하는 것은, 군사 정권을 이해하기 위해 군을 들여다보고, 진보 정치인들을 분석하기 위해 1980년대 대학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과 정확히 같은 중요성을 지닌 작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정치적 훈련장이 궁금하다면 먼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것이 어떨까.

지난 6월8일 경기 광명시의 한 스터디카페에서 임명묵 작가가 뉴스1과 인터뷰하고 있다. 2021.6.8/뉴스1 © News1 이승배 기자
지난 6월8일 경기 광명시의 한 스터디카페에서 임명묵 작가가 뉴스1과 인터뷰하고 있다. 2021.6.8/뉴스1 © News1 이승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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