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본문 바로가기 회사정보 바로가기

소득 無 중증 지적장애인 앞으로 날아든 13만원 건강보험료

대만인 父, 한국인 母 …어렵게 신분 찾자 모든 지원 '뚝'
지침과 규정 외의 삶…새로운 삶 시작도 막혀 버렸다

(서울=뉴스1) 박동해 기자 | 2021-08-29 07:00 송고 | 2021-09-01 12:55 최종수정
지난 9일 서울 도봉구 장애인거주시설 인강원에 머물고 있는 왕무형(51·가명)에게 배송된 건강보험료 고지서 두달치 건강보험료 26만3580원이 적혀있다. 2021.8.26/뉴스1 © News1 박동해 기자
지난 9일 서울 도봉구 장애인거주시설 인강원에 머물고 있는 왕무형(51·가명)에게 배송된 건강보험료 고지서 두달치 건강보험료 26만3580원이 적혀있다. 2021.8.26/뉴스1 © News1 박동해 기자


"응응…응응…"
주황색 반소매 등산복 상의에 검은색 7부 반바지를 입은 중년의 남성은 자신을 향한 질문에 "응, 응"이라는 답만 반복했다. 정수리까지 훤히 벗어진 머리와 이마에 깊게 팬 두 줄의 주름이 만 51년을 살아온 세월을 증명했다. 손톱과 발톱 역시 성한 구석이 없었고. 팔에는 누군가에게 긁힌 상처가 눈에 띄었다.

서울 도봉구 장애인거주시설 인강원에서 만난 지적장애인 왕무형씨(51·가명)는 말을 걸지 않으면 멍하니 주변만을 응시했다. 그의 사회 연령이 3.56세에 불과한 탓이다. 주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기본적인 말은 이해했지만 자기가 원하는 바를 정확히 전달하지는 못했다. 좋고 싫음에 대한 표현을 할 수는 있었지만 현재 처한 상황에 대해 묻자 "응, 응"이라고 답하며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35년이 넘는 세월을 인강원에서 보낸 무형씨에게 시설의 울타리는 사실상 세상과의 경계에 가까웠다. 평생 직업을 가져본 적도 돈을 벌어본 적도 없다. 그러던 무형씨에게 지난 9일 두 달치 건강보험료와 장기요양보험료 26만 3580원을 납부하라는 지로용지가 배송됐다. 이번 달부터 수급자에서 제외되면서 그동안 받았던 정부 지원이 끊기게 된 것이다.

무형씨는 연노랑 빛을 띄는 지로용지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수급이 끊겼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묻는 질문에 정확히 알지 못하겠다는 눈빛으로 기자를 응시했다.
◇'미등록자'에서 30년 만에 신분 찾았는데 모든 지원 끊겨

무형씨가 50대의 나이에 복지 사각지대로 던져진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자신의 본래 '신분'을 찾았기 때문이다. 1970년 중화민국(대만) 출신의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무형씨는 15세 때 인강원에 맡겨졌다. 당시 인강원 측 자료에는 "부친은 중국계이며 모친은 한국 사람이나 모친이 가출하여 행방불명되고 고모가 양육하고 있었으나 고모도 정신 이상으로 양육을 할 수 없기에 시설 수용을 의뢰해옴"이라고 기록돼 있다.

인강원 입소 후 30여 년간 사회에서 무형씨의 존재는 서서히 사라져갔다. 국내 행정기관에 출생 신고를 한 것도 아니었기에 주민등록번호도 없었고, 장애등록도 돼 있지 않았다. 신분을 증명할 제대로 된 문서가 남아 있지 않아 해가 지나면서 무연고 노숙인 취급을 받았고 노숙인복지법에 따라 의료급여와 생계급여를 받는 수급자로 지냈다. 덕분에 시설 이용비를 지원받을 수 있었고 정기적인 병원 진료도 받을 수 있었다.

지난 26일 왕무형씨가 인강원 생활관 앞에 놓여있는 벤치에 시설 정문을 바라보며 앉아있다. 인강원 관계자는 최근 탈시설로 인해 동료 장애인들이 시설 밖으로 나가 생활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무형씨도 '밖에 나가서 살고 싶다'는 의지를 자주 나타낸다고 밝혔다.  2021.8.26/뉴스1 © News1 박동해 기자
지난 26일 왕무형씨가 인강원 생활관 앞에 놓여있는 벤치에 시설 정문을 바라보며 앉아있다. 인강원 관계자는 최근 탈시설로 인해 동료 장애인들이 시설 밖으로 나가 생활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무형씨도 '밖에 나가서 살고 싶다'는 의지를 자주 나타낸다고 밝혔다.  2021.8.26/뉴스1 © News1 박동해 기자


그러던 중 2014년 인강원에서는 원장의 횡령과 거주 장애인에 대한 학대 문제가 드러났다. 이후 시설을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인력 교체가 이뤄졌고 새로 인강원에 들어온 직원들은 체류 자격 미등록 상태였던 무형씨가 국내에서 안정적이게 살아갈 수 있도록 신분을 찾아주기로 했다. 직원들은 2016년부터 가정법원과 출입국·외국인청, 주한대만대표부 등을 찾아다녔고 무형씨의 가족들을 수소문하는 등 다방면으로 노력했다.

이 같은 노력의 결과로 주한대만대표부로부터 무형씨의 부친이 과거 무형씨를 호적에 올린 기록을 확인할 수 있었다. 출입국청에서도 과거 무형씨의 부친이 체류 자격을 부여받은 기록이 발견되기도 했다. 불법체류로 규정된 기간에 대한 범칙금 문제 등 복잡한 과정과 갈등도 있어지만 결과적으로 무형씨에게는 대만 국적의 외국인 등록증과 여권이 발급됐다.

그런데 외국인으로서의 신분이 확정되자 그가 노숙인 신분으로 받던 국가 지원이 모두 차단됐다. 노숙인이든 장애인이든 기초수급이 가능한 것은 내국인일 때뿐이었다. 여기에 더해서 건강보험도 지역가입자로 전환이 되면서 매월 건강보험료를 내야 하는 처지가 됐다.

무형씨를 곁에서 돕고 있는 인강원의 백지혜 사회복지사는 "외국인 등록이 된 뒤 9월부터는 모든 급여가 중단되고 7월과 8월 두달 치의 급여가 환수될 수도 있는 상황"이라며 "경제적인 지원이 막히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백 복지사는 시설 이용료와 병원비 등 각종 비용이 발생하는 데 당장 지원을 끊어 버리는 것은 사회가 무형씨를 버리는 것과 다름없다고 강조했다.

앞으로 갈 곳이 없다는 것도 무형씨에게 다가올 또 다른 난관이다. 최근 장애인 관련 정부의 정책이 장애인들이 시설 외부로 나와 자립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탈시설'로 전환하면서 인강원도 2022년 폐쇄될 예정이다. 하지만 탈시설 장애인에 대한 지원은 내국인에게만 해당돼 무형씨는 관련 혜택을 받을 수 없다.

자립해 살아가기 위해서는 생계 유지가 가능한 직업을 갖는 것이 핵심인데 중증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한 고용지원을 받을 수 있을지도 불확실한 상황이다. 백 복지사는 이와 관련해 문의를 넣어봤지만 '장애인고용공단에 등록은 가능하나 외국 국적은 사업장마다 구인 조건이 달라 말하기 어렵다'는 답만 돌아왔다며 외국 국적 때문에 고용에 있어서도 차별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장애인 등록 상태도 애매한 상황이라 다른 시설로의 전원도 어렵다는 것이 인강원 측의 설명이다. 앞서 인강원은 무형씨의 건강 상태를 정밀 확인 하는 과정에서 구청에 장애등록을 신청해 등록증을 발급받았는데 이 등록이 취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제형 재단법인 동천 변호사는 "장애인 등록이 가능한 유형이 아닌데 구청이 관련 지침을 잘못 해석해서 등록을 받아 준 것 같다"라며 행적 착오로 장애인 등록증이 발급이 된 것이기 때문에 후에 취소가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실제 장애인등록법상 외국인이 장애인 등록을 하기 위해서는 결혼이민자나 난민법상 난민인정자에 해당돼야 한다. 무형씨는 이에 해당이 되지 않는다.

백지혜 사회복자사가 사준 샌들을 신은 왕무형씨의 발. 무형씨는 백 사회복지사가 샌들을 사준 이야기를 하자 인터뷰 중 처음으로 웃었다. 무형씨의 손과 발 얼굴 곳곳에는 상처가 있었다. 동료 장애인들이 물거나 긁어 생긴 상처도 있었지만 최근 건강이 안 좋아지고 걷는 것이 힘들어 지면서 넘어져 생긴 상처가 많았다.  2021.8.26/뉴스1 © News1 박동해 기자
백지혜 사회복자사가 사준 샌들을 신은 왕무형씨의 발. 무형씨는 백 사회복지사가 샌들을 사준 이야기를 하자 인터뷰 중 처음으로 웃었다. 무형씨의 손과 발 얼굴 곳곳에는 상처가 있었다. 동료 장애인들이 물거나 긁어 생긴 상처도 있었지만 최근 건강이 안 좋아지고 걷는 것이 힘들어 지면서 넘어져 생긴 상처가 많았다.  2021.8.26/뉴스1 © News1 박동해 기자

◇간이귀화가 답이지만…요건 '자산 3000만 원'은 사실상 불가능

현재 상황을 해소할 수 있는 것은 무형씨가 귀화를 해서 한국 국적을 얻는 방법뿐이다. 한국인 어머니를 두었던 무형씨의 경우 국적법 6조 2항에 따라 '간이귀화' 대상이 된다. 하지만 간이귀화가 대상자가 되기 위해서는 생계유지 능력을 입증해야 하는 것이 문제다.

생계유지 능력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3000만 원 이상의 금융·부동산 자산을 입증하거나 취업 혹은 취업예정 사실을 증명해야 한다. 장애가 있고 일자리를 구하기 힘든 무형씨에게는 사실상 불가능한 조건이다.

정 변호사는 일단 간이귀화를 신청했지만 생계유지 능력 입증에 대해 면제나 완화를 해줄 수 있는 규정이 없다며 "법무부가 아직 거부 처분을 하지는 않았지만 통화를 해보니 지침이 없어서 확인이 어렵다는 답을 들었다"고 전했다.

윤제원 인강원 원장은 "무형씨는 처음부터 대한민국에서 살아온 장애인이고 50여 년을 살아오셨는데 존재를 하는 아무런 근거가 없어서 이분의 존재 근거를 찾아주기 위해 4~5년 정도 노력을 해왔다"라며 "일들이 잘 풀려나가 이제는 됐다고 생각했는데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더불어 윤 원장은 "규정과 지침이 없어서 안 된다고 하는데 그렇게 따지면 (무형씨는) 아무런 지침이 없이 살아오신 것"이라며 "아무런 신분이 없는 분을 시설 보호자로 해서 그동안 생계비도 지원을 해왔는데 이제 새롭게 자리를 잡아가지고 제대로 살려고 하니 지침이 없어서 안 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설명했다.

지난 2006년 제61차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장애인의 권리에 관한 협약' 10조(생명권)는 "당사국은 모든 인간이 천부적인 생명권을 부여받았음을 재확인하고, 장애인이 다른 사람과 동등하게 이러한 권리를 효과적으로 향유할 수 있도록 보장하기 위하여 모든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어 이 협약의 11조(위험상황과 인도적 차원의 긴급사태)는 장애인이 '인도적 차원의 긴급사태'에 처했을 때 당사국이 '장애인을 보호하고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모든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고 규정했다. 대한민국은 지난 2008년 이 협약을 비준했다.


potgus@news1.kr

이런 일&저런 일

    더보기